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강론자료

2013-0828...사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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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8-26 ㅣ No.1405

연중 21 주간 수요일 - 홀수 해

테살로니카전서 2,9-13        마태 23,27-32

2013. 8. 28. 등촌3.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주제 : 사람의 변화(?)

오늘은 아우구스티노성인의 축일입니다. 이분이 어떻게 사셨는지, 어떤 분이었는지, 새삼스레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성인의 삶에 관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가 직접 찾는 것이 훨씬 더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남들의 얘기보다는 말입니다.

 

전설같은 얘기로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제 기억했던 모니카성녀인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삶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고, 후세에 사는 우리들에게까지도 그 이름이 전달된 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와 노력으로 한 사람의 삶이 변화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희생을 해야 하고, 다른 한쪽은 혜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기억하는 아우구스티노의 삶을 보고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일까요? 어머니 모니카 쪽일까요, 아니면 아들 아우구스티노 쪽일까요?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고, 얼마나 악하게 살 수 있는지 질문하면 어떤 대답이 나오겠습니까? 뜬금없이 하는 이 질문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분노에 찬 마음을 내가 하는 마음이라고 할 때 물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판단에 따라, 이런 정도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이미 갈 데까지는 다 간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개과천선의 기회가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일은 가물에 콩이 나는 일보다 더 적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삶을 어떤 모양으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내가 실제로 악한 일을 하기 때문에도 가능한 일이지만, 내 조상이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새겨진 아주 성질을 제대로 떼어내지 못할 때도 드러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벗어나 자기 멋대로 멀어져간 습성이 우리들에게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끝에 나오는 기록이 그것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것을 느끼면서도 일관성 있게 자신의 삶을 그렇게 몰고 가셨을까요? 이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상상하면 어떤 대답이 가능할까요?

 

주먹은 주먹으로 망한다는 서글픈 소리가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악한 모습으로 드러난 악인은 자기존재의 멸망이 아니고서는 자기 모습을 달리 갖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서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서러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테살로니키 공동체에 살던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사람들이라면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른 소리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면, 다른 이에게 삶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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