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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11: 김양홍 신부 - 전주교구 자립 터전 닦은 초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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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07 ㅣ No.475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11) 김양홍 신부(1875-1945)


전주교구 자립 터전 닦은 초대교구장

 

 

"그는 성인 신부다."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며 정확한 판단력을 가졌다."

 

"그는 몸이 아프면서도 어느 대축일 전날 고해소를 떠나지 않고 성사를 주다가 쓰러져서 신자들이 그를 방으로 옮기고 나서야 자기가 쓰러진 것을 알았다."

 

1931년 5월10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에게서 초대 전라도 감목 대리로 임명된 김양홍(스테파노,1875~1945) 신부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증언이다. 함께 전라도 지역을 사목했던 보두네ㆍ미알롱ㆍ베르몽 신부에 따르면 김양홍 신부는 교우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책망을 들어 마땅한 사람을 꾸짖을 때도 마음 상하지 않게 할 줄 아는 사려깊은 사제였다.

 

한국인 첫 감목대리인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떠난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을 관장했다. 김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될 당시 전라도 교세는 한국인 신부 15명, 신자 1만757명, 본당 14개, 성당과 경당 36개, 공소 199개였다.

 

이내수 신부에 이어 1900년 9월에 전라도 출신 두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김양홍 신부는 감목대리로 취임하자마자 몇 가지 난항에 부딪쳤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인 신부들의 자세였다. 감목대리구 내 한국인 신부 대다수가 기성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사목할 뿐 외교인 개종과 선교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김 신부는 감목대리구 모든 본당에 유급 전교회장을 배치해 외교인 개종에 힘썼다.

 

아울러 본당뿐 아니라 공소에까지 전교회, 부인회, 수년회, 호상계, 청년회, 가톨릭 품꾼회, 노동 공신조합 등을 조직해 평신도들을 육성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적 어려움이었다. 도서지방과 낙후 지역이 많아 막대한 전교비가 소요됐지만 교구 운영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김 신부는 전라남도 지역을 수도회나 선교회에 이양할 것을 대구교구장에게 건의했다. 이에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교황청 포교성성(오늘날 인류복음화성)과 협의해 1934년 전남 지역을 새로운 선교단인 골롬반외방선교회에 이양하고 김 신부는 전북 지역만 담당하게 했다.

 

김양홍 신부는 한국인 자치교구 설립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고, 전교를 통한 교세 성장에 주력했다. 그 결과 감목대리 설정 6년 만인 1937년 4월 13일 교황 비오 11세는 한국인 최초의 자치교구인 전주 지목구를 설정하고, 지목구장으로 김 신부를 임명했다. 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드망즈 주교는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인도와 보호를 기원하는 뜻으로 "복자 안드레아여 인도하소서"라고 김 신부의 교구장 문장을 직접 지어 선물했다.

 

하지만 김 신부는 교구장으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했고, 무능하고, 성격적으로 결함도 많다며 교구장직을 사양했다. 전주교구가 한국인 최초 자치교구로 설정된 것은 16만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간절한 소망과 순교 선조들의 정신이 이뤄낸 결과로 이해한 그는 스스로 교구장으로서 부적격자라 판단한 것이다.

 

도쿄 주재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는 그의 사임을 일축했고, 드망즈 주교 역시 주교품을 받지 않은 김 신부를 "김양홍 주교"라 부르며 주교로 예우했다.

 

결국 교구장으로 부임한 김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교구로 진출시켜 전주 해성학교를 맡기고, 교구 유지재단을 설립하는 등 교구 자립에 매진했다.

 

그러나 사사건건 일제 황국 신민화 정책에 의해 좌절을 맛봐야했다. 일제의 경찰은 성당 안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신자들이 성당을 출입할 때 일장기 앞에 경례할 것과 미사와 기도 등 모든 성무 집행 때 일본 국가를 부르게 했다. 또 경찰이 성당 열쇠를 관리해 그들이 문을 열어줘야만 미사를 드릴 수 있었고, 비밀통신행위로 간주해 고해성사를 금했다.

 

교황청으로 라틴어 교세 통계를 보내는 일도 스파이 행위로 간주했다. 김 신부는 사제들과 교우들이 이를 어길 때마다 교구장으로 책임을 지고 구금돼 옥고를 치뤄야만 했다.

 

고령에 일제 간섭과 탄압을 견딜 수 없어서 김 신부는 1941년 11월 21일 교구장직을 사임했다. 사임 후 석동본당 주임으로 있던 김 신부는 후임 교구장 주재용 신부로부터 공금 유용 명목으로 '성무집행 정지'를 받았다. 일제 말기 전동본당이 운영하던 해성국민학교가 자금부족으로 어려움에 봉착하자 교구장 입장에서 방치할 수 없어 교구 공금을 지출한 것인데 이를 공금 유용으로 단정한 것이다.

 

이같은 조치에 교구 사제들은 교구장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김양홍 신부는 이 일이 있은 후 광주교구로 이적, 광주 북동, 나주 본당 주임으로 사목을 하다 1945년 5월 3일 72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평화신문, 2009년 11월 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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