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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가정사목] 가정 안에서 전례의 생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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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53

가정 안에서 전례의 생활화

 

 

머리말

 

전례생활에 대한 신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성당에서 사제가 예절을 거행하면 신자들은 거기에 참여하는 거룩한 행위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신앙인으로서 삶이 성당 안에서만 의미를 갖고, 성당 밖 일상생활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앙 안에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민간신앙 쪽으로 쉽게 마음이 쏠리는 경향마저 생기는데 이는 신자생활 자체가 전례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귀결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외적인 신앙대회나 큰 신심행사에는 만사를 제쳐놓고서라도 기를 쓰고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자신들이 속한 '작은 교회' 안의 일상적인 행사에서는 그 의미를 깨닫기는커녕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당에서 행해지는 보편적인 전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자체가 신앙적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한 전례의 중심이 되는 미사성제의 중요한 부분들을 작은 교회라 불리는 가정과 연결하여 '가정 안에서 전례의 생활화'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다음 주제들을 갖고 살펴보겠는데, 먼저 복잡다양한 현대세계의 상황 속에서도 가족 구성원을 신앙 안에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고찰로 <작은 교회인 가정>, 다음은 가정 안에서 말씀 전례를 생활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말씀의 식탁을 마련한 가정>, 그리고 전례의 극치를 이루는 성(聖)변화와 연결시켜 <기도로 성화되는 가정>, 끝으로 영성체를 통한 우리 삶의 변화와 쇄신을 바라는 <나눔을 실천하는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시작하는 말

 

부모님 덕에 나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공소생활을 체험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큰 공동체보다는 작은 공동체의 화기애애한 모습 속에서 모든 전례를 체험하고 맛보며 살아온 추억이 지금도 내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준다. 그때는 모두 전례 참여자요 진행자였으며, 모두 한 마음으로 일치된 분위기였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모여 조만과를 바치고 묵주기도를 하며 희노애락을 같이 나누었던 일들이 내 기억 속에 가득 차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가족이 함께 모여 행한 가정 안에서의 전례생활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가정 안에서 전례 분위기를 느끼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며, 자녀들에게 그러한 신앙 유산을 남겨주려고 마음쓰는 부모가 얼마나 있는가?

 

다원화되어 복잡한 현대 상황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하나로 뭉치기보다 제 각각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자연히 신자들의 생활도 세상 물결을 타게 마련이므로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친다거나 아침, 저녁 기도를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가족들의 참 만남은 점점 더 희박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삶의 표상인 전례적 삶을 성당에서만이 아닌 가정 안에서, 살아 숨쉬고 생활화한 리듬으로 되살려내야 한다. 가족들의 관계 안에서 전례적 삶을 맛들이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전례 현장(顯場)으로서 가정

 

전례는 교회의 아름다운 꽃과 같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공적으로 만나는 곳이 교회인 만큼 그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전례행위는 사람들을 한마음, 한 의식으로 모아주고 거기에서 아름다운 삶의 꽃들을 무수히 피우게 해준다. 그렇다보니 교회를 한갖 건물로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교회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전례의식만이 전례의 모든 것인 듯 생각하기 쉬우며, 그 틀 안에서 고정된 형식에 매여 생활 현장 속에 살아있는 전례의 참맛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결국 신자들은 전례를 외적인 의무행위 정도로만 여기게 되므로 전례의 참맛을 새롭게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전례의 공동체적인 형식을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는 더 더욱 맛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작은 교회인 가정생활 자체가 인위적인 한 삶의 모습으로만이 아닌 하느님의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전례 현장으로서 근원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변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점차 커가고 있다. 따라서 신앙 공동체의 기초요 뿌리인 가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가정은 생명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 현장이다.

 

가정 안 모든 삶의 자리는 바로 하느님의 창조적 삶의 자리로 이어지며 하느님 사랑 안에 맺어진 부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최초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귀중한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가정은 단순한 숙식 제공의 자리로서만 남아있을 뿐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하느님 사랑의 꽃은 피우지 못할 것이다. 전례를 만들어가는 현장으로서 가정의 본래 기능을 되살려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흔히 기도하러 간다고 할 때,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는 것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언어가 되었는데, 별도로 기도한다는 그 행위를 두고 성당만을 기도의 현장으로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일상생활까지 그대로 생생하게 기도의 현장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둘째, 가정은 믿음의 현장이다. 

 

가정은 어떤 절차나 규제 없이 자연스레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장 튼튼한 믿음과 신뢰의 장이다. 신앙은 바로 이러한 가족관계의 끈끈한 연결고리와 같이 인간 공동체의 틀이 그 기반이기 때문에 가정은 모든 전례가 싹을 틔우고 자라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터전이 된다. 그러므로 이 안에서 머물며 숨쉬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신앙 공동체로서는 우선적으로 모든 삶을 전례화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이다. 부모들이 이를 잘 엮어나간다면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로서 많은 신앙생활의 꽃이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셋째, 가정은 그 구성원이 분명하다.

 

가정은 그 중심이 되는 아버지 곧 가장이 있고, 살림을 꾸려가고 다듬어주는 어머니가 있고, 그 가운데 자녀들이 있음으로 한 가족이 이루어진다. 그 가족의 모든 중심이 가장에게 있고 그것을 살아움직이게 하는 어머니의 역할이 어우러져 서로서로 삶의 몫을 나누며 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교회도 구성원들의 바로 그러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공소회장이 한 지역 공동체의 모든 사목을 본당 신부를 대신하여 맡아 돌보듯 마찬가지로 작은 교회를 맡은 가장도 가족의 모든 사목적 배려의 중대한 몫을 이미 맡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상호보완 작용을 하면서 가정은 전례적인 모든 삶을 이룰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갖춘 훌륭한 공동체의 표상이 된다.

 

넷째, 가정은 모든 일에 질서와 조화를 갖고 있다.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가정 공동체의 리듬은 가족들에게 생기를 주고 활력을 주어 살아있는 공동체의 윤활유가 된다. 본당의 모든 전례가 그렇듯이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 한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현상들이 그 안에 있다. 이런 리듬의 흐름이 가정 안에 살아 숨쉬는 근원적인 생명력인데,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근래에 와서 자꾸 깨지고 흐트러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가정이 육신이 머무는 거처로 전락해 가고 있다. 같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보다는 모두 제 각각 자기 방식대로만 움직이는 기계 부속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가정이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질서와 조화의 삶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 사명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주어진다.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가정전례를 부활시킴으로써 작은 교회가 다시 일어나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3. 가정의 전례 분위기

 

본당에서 신자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다 보면 여러 형태의 가정을 보게 되는데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몇몇 가정이 있다. 가정방문을 할 때 어느 집을 들어서면 가정축복을 위한 방문기도를 바치기 위해 가장 먼저 집안의 십자가를 찾게 된다. 그런데 보통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십자가나 성상은 하나의 장식품처럼 어느 한 구석에 놓여있거나 그냥 책상 위나 텔레비젼 위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장식물로 그 집에 놓여져 있는 것을 흔히 본다. 아니면 벽에 걸어놓는 경우에도 다른 많은 물건들이 함께 있어 어수선하게 혼란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꽤 여러 해 전 어느 가정을 방문했을 때 나는 교우집에 왔다는 느낌보다는 작고 아담한 공소에 와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십자가와 성서와 성상이 그 집의 중심에 잘 차려져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들어섰을 때 벽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감실과 같은 집을 나무로 지어 그 안에 십자가를 모시고, 성서를 펴놓고 그리고 성모상을 모셨다. 그리고 촛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이곳에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느냐고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그분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 가정이 작은 교회인데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는 가정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려고 가장 중심이 되고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를 모셨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미사도 봉헌할 수 있겠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가정의 전례 분위기가 가족 구성원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며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같다.

 

우리가 성당을 들어서면 성당의 중심이 어디인지 곧바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자 가정이라면 우리가 그 집 안에 들어갔을 때 주님의 가정인지 아닌지 그 분위기에서 곧바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참으로 이 가정은 작은 교회이구나 하는 것을 분위기에서 먼저 느끼게 해주는 것은 좋은 모습이다. 전례 분위기를 갖춘 가정은 이미 가정생활이 전례적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이며, 작은 교회의 평화로운 터전이 거기에서 싹트는 것이다.

 

또 어느 가정에서는 집 안에 작은 방 하나를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로 잘 꾸며놓고 기도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거기에 들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기도하는 가정이 있었는데 퍽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내가 근무하는 교구청에도 깔끔하게 꾸며진 소성당이 있어 아무리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잠시 일손을 멈추고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져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러니 집 안에 기도방을 꾸며놓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요 축복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좁은 단칸방에서라도 그곳에 사는 이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기도 분위기가 참될 수 있다. 가정이 작은 교회의 모습을 지닐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집 안에 온갖 성상을 모셔놓고 마치 굿판이나 성물 진열장같이 해놓는 것이다. 전례 분위기는 가능한 한 단순한 것이 좋다.

 

아무튼 가정은 그리스도를 믿는 식구들이 함께 머물고 호흡하며 살아가는 작은 교회이므로 먼저 가정의 분위기를 주님을 생각하게 하고 기도하고 싶게 하는 전례 분위기로 바꾸어놓는 것이 가족 모두의 일상 삶을 전례적 삶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4. 가정미사를 통한 축복

 

신자들은 어떤 특별한 날 집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새 집을 마련하였거나, 이사를 하였거나 특별히 감사해야 할 뜻깊은 날이 있을 때, 가정에서 미사를 봉헌해 주기를 부탁한다. 가능하다면 이런 가정미사는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가정에서 새 집을 짓고 가구를 들여놓기 전에 집 축복과 함께 감사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함께 기쁨의 감사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 집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새로 입주하게 되었으니 이곳이 바로 작은 교회이고,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모두 모였으니 작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그 집을 축복하여 주었다. 그랬더니 식구들 모두가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오래도록 작은 교회의 모습을 간직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여 그 집 안에 구원을 약속하셨듯이 가정미사도 그런 지향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그 집에 사는 이들은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가정 안에서 가장 가까이 느껴볼 수 있을 것이며 가정미사에 함께 한 이웃들도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한층 살아있는 전례를 체험하게 되고 생생한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모든 본당에서 다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어느 시기에 구역, 반 미사를 통해서 아니면 본당 사목자가 늘 열려있는 마음으로 작은 교회의 새로운 축복을 위해 각 가정을 가정미사로 연결시켜 줄 수 있다면 더욱 아름답고 살아있는 신앙적인 가정의 분위기를 이끌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정에는 정해진 성찬의 식탁이 없다. 그래서 가정미사를 봉헌하게 될 때 나는 꼭 그 집의 밥상을 제단으로 쓴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을 거행하셨던 성찬의 식탁이 바로 그때의 밥상이었던 것처럼 그 집안의 밥상을 성찬의 식탁으로 사용함으로써 가정을 작은 교회의 모습으로 쉽게 연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모두 편안하게 앉아 전례의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의미를 새기면서 봉헌하는 분위기로 이끌어준다. 또 미사를 마치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간단한 식사에서 그야말로 미사의 모든 부분들이 이미 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절감하는 초대교회의 아가페 잔치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미사를 통한 축복을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연결시켜주면 전례적 모든 성찬의 근원이 바로 작은 교회인 가정에서 시작되었음을 생생히 상기시키고 재조명해 주게 된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근원적 힘이 전례 현장의 본래 장소였던 작은 교회인 가정, 바로 거기서 생겨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5. 구역, 반모임의 현장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사용할 만큼, 멀리 사는 친척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웃이 더 낫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이 제각기 흩어져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이웃'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교회도 초대교회의 본래 상태로 돌아가 지역 공동체가 서로 이웃사촌으로 살 수 있는 이웃의 만남인 반모임을 가능한 소공동체로 엮어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한 조직의 운영으로서만 머물게 된다면 생명력도 친근감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반모임 공동체를 전례적 의미로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큰 교회인 성당은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 이 두 식탁이 있어 사제와 신자들이 혼연 일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 친교와 일치를 통하여 모든 신앙 공동체가 함께 찬미와 감사의 잔치를 벌이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구역, 반 공동체는 식탁이 하나뿐으로서 말씀의 식탁만이 중요한 자리가 된다.

 

구역, 반 모임은 거의가 집집이 돌아가면서 말씀의 식탁을 통한 말씀의 잔치를 마련하는데 대부분이 사제 없이 말씀의 그릇인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자리를 발견하고 느끼며 거기에서 그 말씀의 양식을 나누는 전례행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이 된다. 곧 신앙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친교를 가짐으로써 그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느끼고 더 활기찬 하느님 백성으로서 삶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역, 반 모임의 기초 자리는 이웃 공동체로서, 말씀 전례가 그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어가야 함이 우선인데, 해야 하기 때문에 모임을 한다면 즐거움보다 의무감에서 하고마는 또 다른 제도만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우리 신앙 선조들이 천주 신앙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모든 전례행위는 가정에서만 은밀히 이루어졌다. 거기다 소공동체의 말씀의 잔치는 정말 전례 자체가 신자들의 관계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졌고 한마음으로 서로 엮어질 수 있었던 큰 믿음이 그들 마음 안에 가득 차있었기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우들의 삶 자체가 곧 전례행위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천주 신앙의 뿌리였다. 우리는 옛 선조들의 그 확고하고 열열한 믿음을 다시 배워 가정에서, 반모임에서 모든 전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야겠다.

 

 

6. 맺는 말

 

성당에서 중심이 되는 미사의 모든 부분들이 하느님 백성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향하는 가장 큰 전례형태이다. 이러한 큰 교회의 전례행위는 공적인 표상이지만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전례행위는 어떤 면에서 개별적인 그리스도인 삶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깊고 친밀한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이 전례적 삶의 자리를 익혀 보려면 교회 전례의 모든 요소들을 가정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런 제시가 듬성듬성은 펼쳐져도 구체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아 늘 아쉬웠다. 그러므로 구역, 반 모임의 현장이 되는 가정에서 말씀의 식탁 자리를 마련하듯이 신자 각 개인의 가정은 어떤 형태의 전례행위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자리 마련이 있어야겠다.

 

이제 대희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우리의 모든 전례행위가 작은 교회인 가정 안에서 그 나름대로 뿌리내리게 되면 온 교회의 역동적인 힘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사목, 1998년 2월호, 하화식(춘천교구 사목국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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