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강론자료

연중 04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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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1-29 ㅣ No.184

연중 제 4 주일 (나해)

(사회복지 주일- 2차 헌금-해외의 도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될 것)

 

          신명기 18,15-20  1고린 7,32-35  마르코 1,21ㄴ-28

     2000. 1. 30.

 

제목 : 올바른 믿음과 그 믿음을 전하기

 

오늘은 추운 1월을 마감하는 전날, 연중 4 주일입니다.

 

연중시기는 우리가 평소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첫 번째 독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예언자가 갖추어야 할 올바른 자세를 이야기’를 전하고, 두 번째 독서에는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진정으로 실천하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움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덤비는 악령 들린 자의 외침이 나옵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저에게 면담을 했으면 좋겠다고 왔습니다. 면담이라는 말은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는 묘한 것인가 봅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와서 면담하고 싶다고 와서는 다짜고짜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없고, 하느님에게도 잘못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찌하여 하는 일마다 도대체 풀리지 않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저를 만나기 위해서 온 사람의 의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때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과 친한 분이니까, 도대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더라구요. 그렇게 안타깝고 힘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해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신부의 입장은 참 난감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성당에 어떤 마음으로 오십니까?

주일에 성당에 왔다가 가시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 주간을 지낼 힘을 얻고 가십니까?  아니면, 이번 주간에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니 맘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당에 머물고 있는 저는 미사시간이 되면 성당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희망을 갖고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곤 합니다. 그렇게 고민하다보면 가끔씩은 급한 낭떠러지를 만나서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거나,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언덕을 만나서 그것 역시도 오르기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일을 대신 해 줄 것을 부탁할 수도 없는 상황은 일상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도 같은 입장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암담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이 담긴 성서는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들으신 독서와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 세상의 물결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올바른 믿음과 그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종교와 신앙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던 단체<’천존회’>의 교주가 불법모금과 사기혐의로 구속됐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혼란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 13장의 말씀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제는 그런 세상이 된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한 생각도 듭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면 자신들의 목숨을 잃을까봐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주는 예언자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자 예언자가 그 본연의 임무는 망각(妄覺)하고 치부(致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설치게 되면, 독서에 나온 것처럼 ’거짓 예언자’ 하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을 지내며 망하는 사람들은 혼자만을 위한 욕심을 갖고 산 사람들입니다. 자신만 잘 되고자, 자신의 ’혈육 부치’만 잘 되고자,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훗날 자기에게 도움 줄 사람들만 잘되고자 힘쓰고 돈 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위해주던 사람들 모두 같은 길로 가게되면 판단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오신 여러분은 자신이 가진 믿음의 모양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복음말씀은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믿음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면담을 요청한 사람’이 가졌던 것과 비슷한 자세가 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자세는 애석하게도 하느님을 경쟁의 상대자로 받아들였던 악령이 들린 사람의 자세입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말을 알아듣기 쉽게 풀이하면, ’예수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칩시다. 그건 좋은데, 세상을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다는 식으로 적당하게 나눠 먹읍시다’는 요청이자, 반항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룩한 분으로 알고 인정한다면, 그 아는 대로 실천하면 되는 일입니다. 행동 없이 말만 앞세운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야고보서 2,17)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그의 편지에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욕심을 바르게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올바른 길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에만 맞춰 산다면,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입을 다물고 여기에서 떠나거라"하는 심판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현재 어느 상태에 있는지 볼 줄 압니다.  재산이 얼만큼이나 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왔는지,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나를 위해서 함께 걱정해 줄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압니다. 그 상황을 두 번째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혼인에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나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가 하는 행동은 ’결혼한 남자나 여자가 하는 행동’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미혼인 사람들이 옳은 행동’을 한다거나 ’결혼한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현실을 파악하고, 현실에 성실한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연중 4 주일입니다.

여러 가지 계획과 다짐으로 시작했을 2000년의 첫 달도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더불어 가족과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좋은 마음을 간직하고 돌아가는 주일 미사 봉헌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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