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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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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47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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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분의 아버지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흥주군 다랫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집안이다. 최경환은 원래 성질이 괄괄해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업어서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고 곧잘 다투었다. 이러한 성질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여 후일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온화해진 성품을 보고 탄복하였다.

 

그가 살던 지방 교우들은 오랫동안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대부분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최 프란치스코는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가원도, 부평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뒷듬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뒷듬이마을 사람들은 드문드문 집을 지어 담배일 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최경환은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살면서 새로 찾아오는 교우한테는 집을 마련해 주었다. 밤에는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등 마을을 교우 촌으로 만들어 나갔다. 훗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친은 자주 묵상을 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은 힘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주셨다."

 

1863년 모방(Maubnt) 신부가 입국하여. 조선에서는 서양신부가 들어와 전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어느 교우가 최경환의 맏아들이 총명한 아이라고 천거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들 부부를 찾아가 최양업(토마스)을 신부로 만들자고 하였다. 그때 최경환은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뜻이 아니라 천주의 부르심이요 소명입니다. 저희 집안에 이러한 기쁨이 찾아올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하며 흔쾌히 승낙하였다. 당시는 유교적 관념이 뿌리박고 있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형이나 아우한테 양자로 보내는 것도 꺼려하던 때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대 회장이 된 그는,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한테는 순교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다. 같은 해 7월 13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반가이 맞으며 요기를 하고 쉴 것을 청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안심한 포졸들은 그날 밤 평안히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잠을 깬 포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대접받은 뒤 최경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체포해 서울 포청으로 이송하였다.

 

포장은 프란치스코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면서 고문을 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 최양업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자 포장은 더욱 화가 나 무지하게 매질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려졌다. 교우들은 형벌을 못 이겨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태형 삼백사십 도와 곤장 일백여 도를 맞으면서도 아내(이성례 마리아)와 친척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9월 11일 프란치스코는 포장앞에 끌려가 치도곤 오십대를 더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 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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