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생활의 몇 가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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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155

영성생활의 몇 가지 문제점

 

 

오늘은 우리 영성 생활에서 몇가지 문제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신부님,

1) 저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2) 하느님은 내 기도를 잘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3) 하느님은 전능하다고 하시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합니까?

4)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똑같은 죄를 계속 고백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까요?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신앙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어야 하는데 어느 때는 불안하고 죄의식에 싸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입니까? 갓난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서서히 성장해야 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서서히 성장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 정도는 어린아이면서 항상 거룩한 성인 흉내를 내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엄마처럼 되고 싶어서 엄마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닙니다. 하지만 신발이 너무 커서 어린아이는 넘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자꾸만 고집부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 정도는 어린아이면서 거룩한 성인들이 했던 것처럼 살려고 하다보니 걸려 넘어지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하듯이 신앙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른이 되기까지 어린아이는 규칙적인 생활과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어린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 필요하듯 우리 신앙도 역시 그렇습니다. 하기 싫어도 매일매일 규칙적인 기도, 미사,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이틀 굶었다고 한꺼번에 이틀분 식사를 하면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매일매일 알맞는 식사를 해야 합니다. 운동을 무리하게 하면 안되고 적당히 매일매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 하루종일 열심히 기도했으나 그 다음날부터는 기도가 안되어 포기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잘 안되는 이유는 분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분심이 든다는 사실에 분심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은 흩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흩어지는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고 평화스럽습니다. 기도할 때 망상, 번뇌, 잡념이 오면 그런 것일랑 올테면 오라고 대기하고 있으면 됩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대한 숭고한 생각만 해야 한다'고 단정해버릴 때 생활의 번민이나 하찮은 고민 등이 떠오르면, '분심, 잡념'이라고 생각되어 빨리 털어버리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점점 잡념만이 심하게 되어 마음은 허탈해지고 기도는 맛을 잃어 무미건조하게 됩니다. 이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자야겠다', '자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잡념을 없앤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잡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잡념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방향이 잡힌 잡념은 벌써 잡된 생각이 아닙니다. 가령 기도중에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떠올랐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랑과는 인연이 먼 미움이란, 잡념이라기 보다 기도가 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기도중에 그 사람이 떠올랐다고 해서 자꾸 없애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 또렷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실망해버립니다. 기도할 때의 허점, 실수는 마음이 흐트러질 때 기도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심잡념의 방향을 잡았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 앞에서 기도하려는 데 평소에 미워했던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주님, 저에게 미움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미워했던 사람에게 당신 사랑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미워했던 사람은 분심잡념이 아니라 내가 이제껏 바쳤던 기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기도로 바꾸는 촉매제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분심잡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분심잡념을 어떤 방향으로 잡아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방향지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심잡념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이제부터 분심잡념 때문에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분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항상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하느님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내 기도만을 잘 들어주시는 분이라면 세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승리해야 하니 모두 망할 것이고, 학생들은 시험을 보면 모두 100점을 맞아야 하니 모두 똑같아야 하고,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일류대학은 초만원일 것이고, 모두 오래 살아야 하니 세상은 좁아져서 사람으로 넘칠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 기도를 다는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기도에 대해 세가지로 응답하십니다.

 

1) 그래 알았다 :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때와 사람의 기도가 일치한 것입니다.

2) 안된다 : 자기 욕심에 이끌려서 잘못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기다리라 : 하느님의 때가 아직 안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의 경우에만 만족할 뿐 2)와 3)일 경우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이 언젠가 길을 가다가 두 팔이 없는 아주 불쌍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그 사람은 바라보다가 집에 돌아와서 십자가 앞에 앉아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착하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저 불쌍한 거지를 도와주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어떻게 조치를 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께서 전능하시니 기적을 내리시어 그에게 행복을 내려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말하듯이 나는 전능하고 착한 하느님이다. 그래서 나는 불쌍한 거지를 위해 너를 그 자리에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 거지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고 바라만 보다가 돌아와서는 나에게 원망만을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란다.'

 

혹시 우리도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내가 할 일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우리 인간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 서로간의 관계에서는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진실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고해성사를 볼 때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신부님, 저는 매일 똑같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습관적으로 잘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실까요? 이렇게 자꾸만 죄를 짓는데요.'

 

그 때 저는 그런 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른 죄를 고백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고해성사를 볼 때는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죄를 고백하고 다음 번에는 또다른 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죄악을 뒤집어쓴 인간일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 볼 때마다 똑같은 사소한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 고해성사 볼 때마다 색다른 대죄를 지어서 고백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똑같은 잘못만을 습관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일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신부님, 세상의 죄란 죄는 다 지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죄에 관한한 일가견이 있는 듯합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의심하는 것은 신앙이 부족하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같은 잘못을 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방을 한 번 깨끗이 청소했다고 해서 항상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가 지나면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집니다. 계속해서 매일 청소해야 합니다. 더러워진다고 해서 방문을 꼭 닫아걸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면 아무 쓸모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고백성사 보았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또다시 잘못을 하게 됩니다. 또다시 죄를 진다고 해서 아무것도 않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쉽게 좌절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완전성은 전지전능하신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전지전능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완전함은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주시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이와같이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줄 때 하느님의 완전함에 가까이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조건을 무시하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셨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지켜나갈 때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아멘.

 

[박희원 신부님 / 수서 성당 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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