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 유정률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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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07

성 유정률 베드로(1837-1866, 회장, 병인박해 때 장살)

 

 

성 유정률(劉正律) 베드로는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읜 후로 짚신을 엮어 팔아 어렵게 생활했다. 1864년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교리를 배운 후 곧 상경하여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자신의 기쁨을 큰 소리로 표현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성인은 지난날의 방탕했던 생활과 아내를 난폭하게 학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신 꼬리로 자신의 몸을 매질하며 오직 극기와 인내로 생활했다. 그의 아내도 이렇게 변화된 모습에 감동하여 남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이나 한 듯 "안녕히들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하고 하직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 날 저녁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읽고 있던 중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같이 체포된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 알렉시오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그는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할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했으나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은 배교 한 교우 100여 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했다. 결국 유정률은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른바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한 것이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했다.

 

이러한 성 유정률 베드로의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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