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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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후기 진잠과 주변 지역의 천주교 신앙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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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8 ㅣ No.1143

조선후기 진잠과 주변 지역의 천주교 신앙공동체*

 

 

국문초록

 

조선시대 진잠현은 작은 지역이었으나 양반사족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조세 부담을 지지 않아 일반 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산으로 둘러싸인 진잠 지역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으로 북쪽으로 공주, 동남쪽으로 진산, 서남쪽으로 연산과 접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지리적 배경은 천주교가 상류층이나 중심지역보다는 일반 민들과 산간 경계 지역에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791년 진산사건을 계기로 진산, 금산, 고산, 연산 지역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김유산이 진잠 산막동에 거주하면서 1790년대 후반 진잠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이후 진잠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다가 1836년 이전부터 신자들이 진잠 장안동 일대에 거주했던 것이 확인된다. 특히 한재권은 1840년대 후반~1850년대 전반 사이에 진잠의 공소 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박해 때는 진잠 바랑골과 앞재에 살던 이 바오로, 강순지, 전자연, 김 스타니슬라오가 공주로 잡혀가 순교했다. 1878년에도 진잠 오리울에 살던 장정선[장희철]이 다른 지역 신자들과 함께 잡혀 서울에서 순교했다.

 

자료에 나타난 진잠 지역 신자 거주지는 현재 대전 서구 장안동과 오동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진산, 서쪽으로는 연산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산골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인근 지역(진산, 금산, 연산, 고산)으로 이주하기 쉽고 타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산골 경계지역이 신자들에게는 알맞은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진잠으로 이주해온 신자들 대부분 충청도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었는데, 내포 지역에서 박해를 피하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해 내륙 산골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반면 진잠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에는 현재 완주군 북부의 산간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는 산골에 터전을 잡은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도 산길을 따라 이동했고, 다른 신자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이다.

 

 

Ⅰ. 머리말

 

진잠(鎭岑) 지역1)은 18세기 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던 초창기부터 신자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주변의 진산·금산[현재 충남 금산군 지역], 연산[현재 논산시 동부 지역], 고산[현재 전북 완주군 북부 지역] 지역과 함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자리를 잡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잠 지역의 신앙공동체[교우촌, 공소2)]나 진잠 관련 신자[순교자]들의 활동은 천주교 교구 역사의 차원에서 정리된 적은 있지만,3) 신앙공동체의 형성부터 전개, 발전 과정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역사 연구는 미진했다. 따라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분석하여 진잠 지역 천주교의 역사적 실체와 진잠 지역이 천주교 전파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 기초 작업이 절실하다.

 

이 글은 진잠 지역 천주교에 대한 기초 연구의 일환으로 천주교가 전래되고 공식적인 금압(禁壓) 상태에 놓였던 조선후기[18세기 말~19세기 중반] 진잠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주변 지역 신앙공동체간의 교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를 통해 진잠과 주변지역 신자들의 거주, 활동 내용을 정리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Ⅱ장에서는 진잠 지역의 역사 지리적 배경을 고찰함으로써 진잠 지역의 특성과 인근 지역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겠다. Ⅲ장에는 한국천주교 초창기 이래 1860~70년대까지 진잠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알아보겠다. Ⅳ장에서는 해당 시기 진잠과 주변 지역 신자들의 교류와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진잠과 주변 지역 천주교 역사의 실체를 밝혀내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잠과 주변 지역 천주교가 가지는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차후 진잠 지역 교회사 연구의 초석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Ⅱ. 조선후기 진잠 지역의 역사 지리적 배경


1. 진잠 지역의 역사적 변천과 특성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기성동과 유성구 진잠동,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 일대에 해당하는 진잠 지역은 한반도의 중남부,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상 진잠 지역이 확인되는 것은 백제시대부터인데, 당시는 진현현(眞峴縣)이라 불리었다. 진잠을 포함한 현재 대전 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최전선이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660년 백제가 망하자 백제 지역의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초기 부흥운동은 진현현 관내의 진현성(眞峴城)4)에서 있었는데, 신라가 웅진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전략상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 진현성을 비롯한 거점은 함락 당했고, 신라는 진현현을 진령(鎭嶺)이라 고쳐 황산군(黃山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인 940년에 ‘진잠’의 이름을 갖게 되었고 공주에 예속되었는데 조선 초기인 1413년에 와서 진잠현이 되었다.6) 임진왜란 당시 지역이 피폐해지자 1598년에 공산(公山, 공주)에 합병했다가 1609년에 현으로 복귀되었다.7) 이후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잠군이 될 때까지 진잠현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 진잠현은 공주목의 관할에 속했는데 관할 영역이 작고 인구도 적은 지역이었다. 산지가 많아 경작지가 좁고 토질이 윤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8) 공주를 포함하여 공주목에 속한 부여, 석성, 연산, 진잠, 은진, 회덕, 정산, 이산(정조대에 노성으로 바뀌어 불림) 지역 중에서 진잠현은 제일 읍세가 약한 지역이었다.

 

15세기 《세종실록》 〈지리지〉와 18세기 《여지도서》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15세기에는 호수가 153호이고 인구는 583명이었는데 18세기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1,555호 인구는 6,680명으로 증가하였다. 인구는 10배가량 늘었으나 토지 결수는 2배가량만 증가하여 곤궁했을 생활규모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읍세가 가장 약했던 진잠현의 경우에 진잠보다 결수가 많았던 정산에 비하여 훨씬 많은 양의 세곡을 부담하고 있었다.9)

 

인구와 토지에 비해 조세 부담이 컸던 이유 중에는 진잠 지역에 사대부 집안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10) 그들에게 주어진 면세 혜택만큼 일반 민들이 고스란히 부담을 져야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청 감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근래 이웃과 친족을 침징(侵徵)하는 폐단이 전보다도 심한데, … 진잠은 산수(山水)가 다소 좋아서 사대부들이 많이 살다 보니, 사대부들을 제외하고 나면 지금 민호(民戶)가 400여 호에 불과한데 군액의 숫자는 8, 9백 명이나 되어 궐액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충정(充定)한 뒤에 궐액이 생긴 것이 아니라 바로 애당초 충정하기 이전의 궐액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보다 군정(軍丁)을 얻기가 더 어려워 한 사람이 3, 4명의 군역(軍役)을 지다가 백성이 모두 도망가서 민호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급기야 민호가 다 없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11)

 

1724년 영조(英祖)와 만나는 자리에서 충청 감사 송인명은 군포(軍布) 징수의 문제를 보고했는데, 특히 진잠 지역이 원래 할당된 군포가 많은데다가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여 일반 민들의 부담이 실제로 3~4배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양반 집안들이 회덕과 연산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진잠에도 터를 잡고 있었다.12) 이러한 사정이 진잠현의 재정 부족을 야기했고 일반 민들의 부담 가중으로 작용한 것이다.

 

진잠현이 조선후기에도 공주목 관할 지역에서 제일 읍세가 약했던 것은 변함이 없다.13) 관할구역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호수와 인구수에는 변화가 확인된다. 1759년 장적(帳籍)에 근거한14) 《여지도서》에는 5개면 42개리 1,555호 6,680명 인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1871년에 편찬된 《호서읍지》15)에는 5면 93리 1,387호, 인구 4,972명이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중반에 비해 19세기 후반에는 동리 수가 배 이상 늘어났지만 이는 관할 자연 촌락을 세분하여 기록한 것으로 동리마다 몇 호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 호수와 인구수는 줄어들었는데 이는 진잠현의 생활 여건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6)

 

1862년에 전국적으로 부패한 정부와 지방 관리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진잠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던 나무꾼들이 집단을 이루어 민가를 불태우고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충청감사 유장환(兪章煥)이 진잠현의 초군(樵軍, 나무꾼)들이 무리를 이루고 당을 만들어 인가를 불태운 일로 장계한 데 대해 전교하기를,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걸핏하면 당을 모아 놓고 끝에 가서는 인가를 불태우고 난 다음에야 그쳤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들의 소원을 펴거나 유감을 풀길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이 고을 저 고을 할 것 없이 거의 조용한 날이 없으니, 백성들의 습성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묘당에서 품처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 이미 그 자리에서 사로잡지 못하고서 추후에 체포하였으니, 수창(首倡, 앞장선 사람) 몇 놈 외에 또한 참작해서 구별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이러한 뜻으로 일체 행회(行會, 실행 방법을 토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17)

 

진잠현이 독립된 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지역 주민에게도 부담이 되고 효율적인 지방행정 관리에도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진잠현을 폐지하여 인근 지역과 통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약용(丁若鏞)은 새로운 지방 행정구역 개편안을 구상하면서 진잠을 회덕(懷德, 현재 대전 대덕구와 동구 지역)에 합병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18) 또한 구한말 시기에 국가 개혁안을 구상했던 이기(李沂) 역시 연산과 진잠을 합병하여 연진(連鎭)이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19)

 

 

 

 

이러한 행정구역 개혁안은 당대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진잠현이 주변 지역과 통합해야 하는 필요성은 인식되고 있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잠과 회덕20) 지역이 통합하여 새로운 대전군(大田郡)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산지가 많은 진잠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전략 요충지였는데 고려 이후 공주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진잠현으로 독립했으나 영역이 좁고 생산력이 높지 않은데다 세 부담이 높아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이었다. 사대부 집안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상류계층에서는 유교문화가 정착해갔지만 일반 민들은 많은 조세 부담을 져야 했고 민란에 참여하여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독립적인 현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합리했기 때문에 행정구역 개편이 논의되었고, 1914년 대전으로 통합되었으며 현재 대전광역시의 서구와 유성구 지역이 되었다.

 

 

2. 진잠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주변 지역과의 연계

 

진잠 지역은 계룡산(鷄龍山)과 대둔산(大芚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서남 방면에 위치해 있고, 계룡산과 대둔산에서 발원한 갑천(甲川)21)과 그 지류(금곡천, 두계천, 매노천)가 흐르는 분지 지역이다.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산맥이 바깥쪽으로 되돌아간 것은 기호(畿湖, 경기와 충청) 지방의 남북 들판에 서리어 있다. 덕유산의 정기는 서쪽으로 가서 마이산(馬耳山)과 추탁산(麁濁山)이 되었고, 남쪽으로 지리산이 되었다. 마이산 서쪽과 북쪽에서 뻗은 두 지맥은 진잠과 만경(萬頃)에서 그쳤다. …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또한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를 잡아야 큰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곳이 나라 안에 네 곳이 있다. 개성(開城)의 오관산(五冠山), 한양(漢陽)의 삼각산(三角山), 진잠의 계룡산,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이다. … 계룡산 남쪽 골(洞府)은 한양과 개성에 견주어 기세가 훨씬 떨어진다. 또 판국 안에 평지가 적고, 동남쪽이 널따랗게 틔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맥(來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22)

 

공주의 동남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계룡산이 있다. 전라도 마이산 맥의 끝이며 금강(錦江) 남쪽에 있다. … 계룡산 남쪽 마을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으로 정하려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이 골짜기 물이 온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서 진산(珍山)·옥계(玉溪)의 물과 합치고, 북쪽으로 금강에 흘러드는데 이 냇물 이름이 갑천이다.

 

냇물 동쪽은 회덕현이고, 서쪽은 유성촌(儒城村)과 진잠현이다. 동서 양쪽의 산이 남쪽으로 들판을 감싸 안으며 북쪽에 와서는 서로 교차되어 사방을 고리처럼 둘러막았다. 들 가운데는 평평한 둔덕이 구불구불하게 뻗었고, 산기슭이 깨끗하고 빼어나다. 구봉산(九峯山)과 보문산(寶文山)은 남쪽에 불끈 솟아 맑고 밝은 기상이 한양 동교(東郊)보다 나은 듯하다.23)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속리산, 마이산을 거쳐 진잠 계룡산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계룡산의 남쪽 지역(현재 계룡시 신도안면)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 후보지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갑천을 경계로 회덕과 진잠이 나뉘며, 진잠은 동서로 산이 감싸는 형세로 산기슭이 깨끗하고 빼어나다고 했다.

 

진잠에서 계룡산은 떨어져 있지만 그 산세가 이어지기 때문에 진잠과 계룡산을 하나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24) 또한 진잠의 서남부 지역을 감싸 도는 산들은 대둔산에서 이어진 것으로 자연스럽게 인근 지역과의 접경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진잠의 지리적 특성은 무엇보다 내륙 산지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진잠현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경으로서 북쪽으로 충청도 공주[현재 대전시, 공주시], 동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현재 금산군 진산면 일대], 서남쪽으로는 충청도 연산[현재 논산시 벌곡면 일대]과 접하고 있었다. 현재도 명막산(330.5m) · 조중봉(333.5m) · 안평산(471.2m)으로 이어지는 300~400m급의 산지가 금산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논산시 벌곡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에서는 장군봉(268.2m) · 시루봉(159m) · 털바우산(247m)이 주요 산지를 이루고 있다.25)

 

산들이 도와 군현의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그리 험준하지 않기 때문에 산등성이 고개 길은 다른 지역과의 교통로로서 활용되었다. 《여지도서》와 《호서읍지》를 보면 진잠에서 인근 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8개인데 이중 산길로 보이는 소로(小路)는 4개이고 모두 진산과 연산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현재 계룡시에 속한 남선리를 제외하면 3개 소로는 모두 현재 서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괴곡동과 장안동에서 동쪽으로 금산군 복수 · 진산면과 통하며 우명동에서 논산시 벌곡면으로 통하고 있다. 이러한 도로 외에도 여러 산길을 통해 인적 물적으로 인근 지역과 교류했을 것이다.

 

 

 

진잠과 경계를 접한 진산과 연산을 거쳐 남쪽으로는 금산(현재 금산군 남부 지역)과 고산(전북 완주군 북부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은진(논산시 서부 지역) 지역으로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진잠 지역은 도와 군현이 경계를 이루는 접경 지역이었고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였다.

 

 

Ⅲ. 진잠 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신앙공동체 형성


1. 진잠 지역의 천주교 전파

 

서울과 경기의 남한강 일대,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27), 전라도 진산 · 전주 지역에 자리를 잡은 초창기 천주교는 조선정부와 지배층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근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 인접하면서 산골지역에 자리잡은 진잠과 인접 지역에도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1791년(신해)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태움)로 말미암아 발생한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후 천주교는 불효불충한 사악한 종교로 낙인 찍히게 되었고, 진산사건의 여파는 다른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미치게 되었다.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자기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진 이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이의 이목과 포졸들의 체포망을 피하기 위해 산골 지역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진산에 살던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은 고향을 떠나 고산 저구리28)로 터전을 옮겼고29) 전주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 유관검(柳觀儉) 형제와 함께 천주교 신앙 실천과 전파에 힘썼다. 한편 내포 지역에서 천주교 전파에 힘썼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은 1791년 박해를 피해 홍산(鴻山, 현재 충남 부여군의 홍산면 일대)으로 이주했다가 금산으로 거처를 옮겼다.30) 1795년 금산에서 고산으로 이주한 이존창은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모실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그해 4월 주문모 신부는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을 사목 방문하고 이존창의 집에 머물렀다.31)

 

진잠 인근의 연산 지역에도 신자들의 거주가 확인되는데, 1795년 6월 주문모 신부의 정체가 드러나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주 신부는 지방으로 도피하여 연산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의 집에서 수개월간 머물렀다.32) 또한 이보현에게 천주교를 전했던 황심(黃沁, 토마스)33)도 연산으로 이주했는데 윤지헌과 유항검 형제가 그를 조선천주교회의 밀사로 보내 중국 북경을 왕래했다.34)

 

윤지헌과 이존창이 금산 · 고산 지역에 자리를 잡자 다른 신자들도 따라서 이주하게 되었고,35) 진잠의 산간 지역에도 신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충청도 보령현 역촌(驛村)에서 태어난36) 김유산(金有山, 토마스)은 이존창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이존창을 따라 고산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진잠으로 옮겼다.

 

저는 본래 의지할 데 없고 머물 데도 없는 사람으로, 승려가 된지 수년 만에 다시 환속하여 홍산 땅에 가서 신발을 팔면서 살았습니다. 제가 사는 촌락에 이존창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여러 날 꼬드기면서 천주교로 권하였던 까닭에 저는 기뻐하며 따르다가 매우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또한 몇 년 있다가 고산(高山) 적오리(積梧里, 저구리)37)로 옮겨갔지만, 이존창의 집에 왕래하면서 이전처럼 학습했습니다. 근년 이래로 진잠 산막동(山莫洞, 현재 대전 서구 장안동)에서 살아 왔습니다.38)

 

고산 저구리와 진잠 산막동에 살면서 김유산은 이존창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학습했고 그의 부탁을 받고 조선천주교회의 밀사로서 두 차례 중국 북경을 왕래했다.39) 윤지헌도 고산 저구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김유산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1801년(신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김유산은 진잠에서 잡혀 전라 감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서울 포도청과 의금부 국청으로 이송되어 윤지헌과 유항검 형제들과 함께 국문을 받았고 그해 10월 24일에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1791년 진산사건을 계기로 진산, 금산, 고산, 연산 지역에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존창과 관계가 깊었던 김유산이 고산 저구리와 진잠 서남쪽 산골 마을인 산막동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했다. 따라서 늦어도 1790년대 후반에는 진잠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반사족 집안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진잠 지역의 중심지에는 천주교 전파가 어려웠지만 진산 · 연산과 인접해 있는 산간 지역인 장안동 일대에는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진잠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신자들의 활동


1) 김유산 – 진잠 산막동 거주.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

 

1801년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은 김유산은 진잠 산막동에서 체포되었는데 이후 한동안은 진잠에 거주했된 신자들이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2) 박영근의 고향

 

다시 진잠 지역에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은 1830년대 이후이다. 1900년 3월 시복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박영근(토마스)은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은진 쇠목40)에 거주하고 있는데, 나이는 65세[1836년생]이었다고 증언했다.41) 이 증언을 통해 볼 때 1836년 이전에 박영근의 부모가 진잠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 순선지의 아들 손순화의 고향. 손선지 - 전주 대성동 신리골에서 잡혀 전주에서 순교

 

또한 1866년 전주에서 순교한 손선지(베드로) 가족이 고향을 떠나 진잠에 이주한 내용이 손선지의 아들 손순화(요한)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손순화는 자신이 손선지[1820년생]와 김 루치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0년 당시 62세[1839년생]로 진잠 장안(壯安)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다42). 손선지의 고향은 임천(林川) 고인돌43)인데 어렸을 때 세례를 받고 10대 후반의 나이로 샤스탕 신부에게 공소 회장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한다.44) 손선지가 처음 회장으로 임명되었던 곳이 진잠 장안동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39년 당시 진잠 장안동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회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박영근과 손순화의 증언에 따르면, 늦어도 1836년 이전부터 진잠에 박영근 · 손선지 가족을 비롯한 신자들이 거주하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신부의 사목방문을 받는 공소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손선지의 딸이자 1868년에 여산(礪山, 현재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손 막달레나는 1841년에 고산 차돌박이45)에서 태어났다고 한다.46) 이 증언에 의하면 1839년 이전부터 진잠 장안동에 살던 손선지 가족이 1841년 무렵에는 고산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손선지의 또 다른 딸인 손 데레사는 1848년에 고산 차돌배기(차돌박이)에 태어났는데47) 손선지 가족이 지속적으로 고산에 거주하고 있었을 알 수 있다. 손선지의 다른 아들인 손 토마스가 1856년에 전주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48)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으므로,49) 손선지 가족은 1856년 이전에 고산에서 전주 신리골로 이주했을 것이다. 1866년 손선지가 자기 집에서 붙잡혀 정원지, 한재권과 함께 12월 13일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5) 정원지의 고향.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서 잡혀 전주에서 순교

 

손선지 · 한재권과 같이 전주에서 순교한 정원지(베드로)는 진잠에서50) 천주교 부모 밑에서 태어나51) 전주 양량소 늘마루(현재 충남 논산시 양촌면 신기리)52)에 살다가 금구(金溝)53) 지역을 거쳐 전주 소양면 성지동(현재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으로 이주했다.54)

 

정원지는 심문을 받을 때 부형(父兄)이 공주에서 치명하고 자신은 조실부모하여 떠돌아다녔다고 했는데,55) 그는 체포되기 전까지 성지동에서 형의 가족56)과 함께 살았고57)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노모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 내용58)을 보아 모친도 살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원지의 순교할 때 나이가 19세[1848년생] 또는 21세[1846년생], 22세[1845년생]로 엇갈리지만, 늦어도 1848년 이전에 신자였던 정원지의 가족이 진잠에서 거주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6) 한원여[한재권]59) – 진잠 공소회장. 전주 대성동 신리골에서 잡혀 전주에서 순교

 

손선지 · 정원지와 함께 전주에서 순교한 한재권(요셉)도 진잠에 거주했을 뿐 아니라 공소 회장으로 활동했다. 손선지의 아들 손순화는 한원여가 “충청도 진잠에 살 때 어느 신부께 맡은 지는 몰라도 회장이었는데 그 회장 직분을 어떻게 채운지는 말 못 들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60) 한재권의 조카인 한 토마스61)는 한재권[1836년(병신)생]이 충청도에 살 때는 회장이었는데 전라도 대성동으로 온 후는 그 동네에 있는 손선지가 회장이므로 회장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한재권이 충청도에 살 때부터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62)

 

한 토마스의 증언에 의하면, 한재권이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했을 때 이미 손선지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앞의 손선지 자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손선지 가족은 1848년 이후 1856년 이전에 신리골로 이주했으므로, 한재권이 신리골로 이주한 시기는 이르면 1848년경, 늦으면 1856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재권이 진잠 공소 회장으로 활동한 시기는 1850년대 이후 1860년대 전반기까지 볼 수 있다. 나이로 보자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것이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한재권은 충청도 금정역63) 출신이었는데64) 진잠에서 회장 활동을 했고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해서는 손선지 회장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7~8) 김선양과 최 마리아 부부 – 진잠 거주. 서산에서 체포되어 홍주에서 순교

 

공주 새재65)가 고향인 김선양[1810년생]은 1839년에 자신의 형이 거주하는 고산 시어동66)에 가서 같이 살다가 그해 4월 박해 때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이후 시어동에서 5년을 살다가 진잠으로 와서 10년을 살았다. 다시 전주 소양면 약바위67)로 옮겼고 1858년에68) 잡혔다가 풀려나와 공주로 가서 3년, 서산 강당리로 가서 6년간 거주했다. 1866년 서산에서 잡혀 그해 12월 27일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 아내인 최 마리아는 나중에 잡혀 1867년 1월 22일에 홍주에서 순교했다.69)

 

김선양 부부가 진잠에서 살았던 시기는 대략 1844년부터 10년간으로 보인다. 또한 손선지와 정원지, 한재권처럼 김선양 부부도 진잠에서 전주 소양면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01년 박해로 김유산이 순교한 이래 대규모 박해인 1839년(기해) 박해 때에는 진잠 지역과 관련된 순교자는 기록에 확인되지 않는다. 인근 지역인 진산과 금산, 고산, 전라도의 용담, 광주 지역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붙잡혔고 신앙을 끝까지 지킨 이들은 순교했다.70) 반면 진잠 지역은 별다른 사건 없이 장안동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던 것이다. 또한 김선양 부부처럼 박해를 피해 진잠으로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866년(병인)에 일어난 대박해는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고 진잠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해 4월 18일 관변 측 기록에도 이러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공충(公忠, 충청) 감사 신억(申檍)의 장계에, “진잠 현감 윤태익(尹泰益)71)이 사악한 무리를 체포하는 때에 죄 없는 사대부를 잡아들이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행동이 놀랍고 망령되니 우선 파직하고 담당관[攸司]으로 하여금 그 죄상을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라고 한 것과 관련하여 전교하기를, “구전(口傳, 말로 전함)으로 (다른 인물을) 차출하여 재촉하여 내려 보내라.” 하였다. 이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이덕초(李悳初)를 진잠 현감으로 삼았다.72)

 

1866년 2월부터 본격화된 천주교 박해는 지방으로 확장되었고 진잠 현감 윤태익은 천주교 신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체포망을 확장하다가 사대부들까지 체포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양반사족들이 많이 살던 진잠 지역에서 이런 현감의 행동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현감이 갈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1866년 초반부터 진잠 지역에 천주교 탄압과 신자 체포 현상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10) 이 바오로 – 진잠 바랑골 거주.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 원 베드로 – 잡혔다가 풀려남

 

이 바오로[1812년생]는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진잠 바랑골73)에 정착해 살다가 1867년 1월(음력)[또는 1866년 3월]74) 진잠 포교에게 잡혀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원 베드로도 같이 잡혔는데 그는 풀려나와 이 바오로의 치명 사정을 증언했다. 그는 원래 전주노론이75)에 거주하다가 진산 진밭들76)로 이주했고, 거기에서 진산 포교에게 잡혀 전주로 가서 고초를 겪다가 8개월 만에 풀려나 진잠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는 홀아비로 지내면서 여러 해 동안 약 장사를 했다.77)

 

이 바오로는 1856년 9월 13일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나오는 진밭들 공소회장 이 바오로78)와 동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79) 그렇다고 한다면 1856년에 체포되어 전주에서 8개월 옥살이로 하고 난 뒤에 이 바오로가 진잠으로 들어온 시점은 대략 1857년경이 될 것이다. 이후 1867년 1월[또는 1866년 3월]까지 대략 10년간 진잠 바랑골에 거주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11~13) 강순지, 전(田)자연, 김 스타니슬라오 – 진잠 앞재, 바랑골 거주.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

 

강순지(요셉)와 전자연(베드로)는 진잠 앞재80)에 살면서 항상 ‘박해를 만나면 피하지 않고 잡혀 죽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1867년[또는 1866년 11월 26일81)]에 진잠 포교에게 잡혀 공주로 가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82) 잡힐 때 그 동네 사람 김덕보의 진술로 잡혔다고 하고, 증언자인 강 프란치스코가 자기 형인 강순지가 공주로 갈 때 목격했다고 하므로 그도 진잠 앞재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진잠 앞재 마을에 강순지, 강 프란치스코 형제, 전자연, 김덕보 등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순지와 전자연이 잡혀간 후 전자연의 진술로 진잠 바랑골에 살던 김 스타니슬라오도 잡혀 공주에서 3명이 함께 순교했다.83) 이를 통해 보면 1866년 말 또는 1867년 당시에 진잠 지역에 적어도 앞재와 바랑골 신앙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병인년의 박해로 이 바오로와 강순지, 전자연, 김 스타니슬라오가 진잠 앞재, 바랑골에서 잡혀 공주로 이송되었으며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대박해는 1873년 대원군의 하야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진잠에서는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다.

 

1866년 이래로 10년간 선교사들이 없다가 1876년에 다시 입국하기 시작했다. 서양 선교사들의 존재는 곧바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중 일부[리델 주교와 드게트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원군 집정기와 달리 조선 정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추방했지만 함께 체포된 신자들은 풀어주지 않고 죽였다. 진잠 지역에서도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옥에서 숨졌다.

 

14) 장정선[장희철] - 진잠 오리울 거주.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

 

장정선(요셉)은 진산 출신으로 진잠 오리울84)로 이사해 살다가 서울 포교에게 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순교했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던 김성오[김수경]가 장정선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85) 1878년 4월 포도청에 끌려간 후 감옥에서 만난 박 안드레아는 장정선이 선교사의 행적을 묻고 배교를 강요하는 형관에 맞서 오로지 죽기만을 바라며 감옥에서 6개월만 고초를 겪다가 동료 신자들과 함께 죽었다고 했다.86)

 

이러한 장정선의 행적은 관변 측 기록에 나오는 장희철(張希哲) 요습[요셉]87)과 유사하여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1878년 4월 10일 심문에서 장희철은 자신은 진잠 출신으로 1863년에 진산 남면 이랑동(梨浪洞)88)에 살던 김공우(金公祐)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그 다음해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1866년의 대박해 이후에도 진잠 지역에는 신앙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었고, 선교사들이 새로 교회조직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신자가 있었던 것이다.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로 천주교의 전파가 어느 정도 용인되면서 진잠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위에서는 진잠과 연관된 시기별로 신자들의 활동 내역을 정리했는데, 아래에는 지역별로 그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처럼 1790년대 후반부터 박해를 피하기 위해 또는 신앙생활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신자들이 진잠 산간 지역으로 이주해 왔고, 신앙공동체를 세워 신부의 사목 방문을 받는 공소로 발전시켰다. 1801년과 1866년, 1878년 박해 때에 잡혀간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순교자가 되었다.

 

자료에 나타난 진잠 지역 신자 거주지는 현재 서구 기성동에 속한 장안동과 오동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진산, 서쪽으로는 연산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산골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공식적으로 천주교가 금지되고 탄압을 받던 시기에 다른 군현으로 이주하기 쉽고 타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산골 경계지역이 신자들에게는 알맞은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Ⅳ. 진잠과 주변 지역 천주교 신자간의 교류


1. 진잠 관련 신자들과 교류했던 다른 지역 신자들

 

Ⅲ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진잠 관련 신자들 중에 진잠에서 출생한 경우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다른 지역 출신으로 진잠에 이주해 왔다. 또한 진잠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방문을 맞이하기 위해 공소가 세워졌는데 공소 주변의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면서 서로 교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잠과 인근 연산, 진산, 고산 지역 신자들은 서로 유대하면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발전시켰고, 개항기 이후 천주교가 이 지역에 뿌리내리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여기서는 진잠 관련 신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신자들과 연고지역을 정리함으로써 조선 후기 당시 진잠과 주변 지역 천주교 신자들 간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진잠으로 이주해온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 충청도 지역[현재 보령, 부여, 공주, 금산]에 연고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던 내포 지역에서 박해를 피하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해 내륙 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89) 또한 평야지대에서 비신자들과 섞여서 살던 신자들이 산골 지역으로 이주하여 좀 더 결속력이 강한 신앙공동체[교우촌]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진잠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에는 고산이나 전주 소양면 등 현재 완주군 북부의 산골지역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산골에 터전을 잡은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도 산길을 따라 이동했고, 다른 신자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들 간의 교류와 연락망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자료를 통해 진잠 지역 신자들과 관련을 맺었던 다른 지역 신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장에서 언급했듯이 김유산은 고산 저구리와 진잠 산막동에 살았는데 고산 저구리에는 윤지헌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고, 그 인근의 연산 지역에는 이보현과 황심이 이주해 와 살고 있었다. 김유산과 황심은 조선천주교회의 밀사로서 1798년과 1799년에 함께 북경을 왕래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90) 즉 고산 저구리와 진잠 산막동, 연산 지역 신자들이 1801년 박해 때까지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830~40년대에 진잠에 거주했던 손선지와 한재권은 젊은 나이에 공소회장으로 임명되고, 손선지의 경우는 이주한 곳[대성동 신리골]에서도 계속 회장으로 활동했었다. 또한 1848년 이전에 신자였던 정원지의 부모가 진잠에서 거주하면서 정원지를 출생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진잠과 그 주변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꽤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60년대에 진잠의 앞재와 바랑골 신자들은 인근 지역 신자들과 교류했으며,91) 혼인관계를 통해 신자들이 이주하기도 했다. 보통은 혼인을 하면서 여성이 시댁이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주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한 손선지가 그의 딸인 막달레나를 금산 개죽리 한씨 집안으로 시집보낸 것이 그 사례에 해당한다. 반대로 남자가 처가가 있는 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금산 개죽리 전씨(田氏) 집안 출신92)으로 보이는 전(田)자연이 진잠 앞재로 이주하여 처남인 강순지와 강 프란치스코와 한 마을에 살았던 것이다. 전자연을 포함한 금산 개죽리 전씨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진산, 고산, 진잠 지역 신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3)

 

1878년에 순교한 장정선[장희철]은 선교사[리델 주교·드게트 신부]와 관련하여 서울 포교에게 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갔는데, 진잠뿐 아니라 주변지역 신자들도 함께 체포되었다. 연산 배티94)에 살던 성 베드로95)와 박 알렉시오 4형제96), 연산 오작실97)에 살던 박공악98), 진산 가새벌99) 공소 회장인 김 요한100) 등이 그들이다. 혹독한 심문 끝에 나머지 형제들은 배교하고 풀려났지만 박 알레시오만이 매부 성 베드로와 같이 신앙을 끝까지 지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101) 박 알렉시오와 친척 관계로 보이는 박공악과 연산 출신으로 진산으로 이주했던 김 요한 회장102) 역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했다.103)

 

장정선과 동료 신자들의 체포 사실을 통해 볼 때 1866년 대박해 이후에도 진잠과 주변 지역의 신앙공동체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교회 재건에 나선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는 공소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진잠과 인근 지역 신앙공동체의 분포 상황

 

위에서는 기록을 통해 진잠 지역 신자들과 직간접적 관련성이 확인되는 다른 지역 신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790년대 이후 진잠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주변 지역 신자들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잠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에 존재했던 신앙공동체를 소개함으로써 조선 후기 진잠과 주변 지역 신앙공동체의 분포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다룰 주변 지역은 진잠과 신자간의 교류가 많았던 진산, 금산, 고산, 연산, 전주 소양면 지역으로 한정하겠다. 이후 진잠과 주변 지역 천주교 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진산 · 금산 지역

 

진산 지역에 천주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윤지충이 1784년 겨울에 서울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베끼고 나서 2~3년 후에 대세를 받은 뒤였다. 윤지충은 외사촌인 권상연, 동생 윤지헌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1791년(신해) 모친상을 당한 뒤에 당시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러한 ‘진산사건’을 계기로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때 윤지헌은 진산을 떠나 고산 저구리로 터전을 옮겨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신유) 박해 때 참수형을 당했다. 당시 윤지충과 관련하여 진산에 살던 신자들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1839년(기해)과 1866년(병인) 박해 때에도 진산 지역에서 잡혀 전주나 공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있었다.

 

조선후기 진산 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금산 지역도 1795년 이전부터 신자들이 이주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공주에 잡혀갔다가 배교하고 풀려 나온 이존창은 고향을 떠나 홍산을 거쳐 금산으로 이주하여 1795년까지 거주했다. 1801년 박해, 1827년(정해) 전라도 박해, 1839년(기해) 박해, 1866년 박해 때에도 금산 지역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1812년과 1868년에는 홍주와 여산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지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진산·금산 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복음은 계속 전파되었고,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유지해 나갔다. 1870년대까지 진산 지역에서 확인되는 신자 거주지는 진산면의 가새벌[지방리], 마근다미[막현리], 오항동·이랑동[오항리], 진산읍내[읍내리], 진밭들[두지리], 청림[행정리], 복수면의 문바우·앞재[신대리] 등이 있었고, 금산 지역의 신자 거주지는 남이면의 개죽리 · 암산이[건천리], 남일면의 솔티 · 홍동리[신정리], 부리면의 창들[창평리]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진산(금산)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는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고 일부 지역에 집중해 있었다. 즉 진산면과 복수면, 특히 대전 서구[예전 진잠 지역]나 논산 벌곡면 지역[예전 연산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산골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게 되었고, 금산 지역에서도 완주군[예전 고산 지역]이나 진안군에 가까운 남이면과 남일면 지역에 신자가 거주했었다.104)

 

 

 

 

 

 

2) 연산 지역

 

덕산 황모실(현재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출신 이보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해 연산의 산골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때 그에게 천주교를 전해준 황심도 같이 이주했다.105) 1795년 6월 주문모 신부가 지방으로 도피했을 때 연산 이보현의 집에서 수개월간 머물렀는데 이로 보아 이보현과 황심이 연산으로 이주한 것은 1795년 6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즉 1795년 이전부터 연산의 산간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106)

 

기록상 확인되는 연산 신앙공동체는 벌곡면의 동쪽 산골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지역은 진산(금산)의 서쪽에 바로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진산(금산) 지역 신앙공동체와 교류가 활발했고 신자들이 서로 이주하기도 했다.107)

 

연산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는 벌곡면 어곡리, 덕곡리, 검천리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는데, 어곡리에는 노골, 으실, 덕곡리에는 상사바위, 중보실, 검천리에는 축방이, 배티, 오작실이 있었다.

 

 

 

 

3) 고산 지역

 

진산사건 이후 윤지헌이 고산 저구리로 이주한 무렵부터 고산 지역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 이존창은 신부를 모실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1795년에 금산에서 고산으로 이사했고 그해 4월 이존창의 집에 주문모 신부가 방문하기도 했다. 보령 역촌 출생인 김유산은 이존창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이존창을 따라 고산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진잠 산막동으로 옮겼다.

 

이와 같이 고산 지역은 전주 지역과 함께 초창기부터 전라도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집중적인 박해를 받아야 했는데 1801년 박해는 물론 1827년, 1839년, 1866년 박해 때마다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특히 1866~1868년에는 고산 광암, 다리실, 세목동 지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여산을 끌려가 순교하기도 했다.

 

고산의 신앙공동체는 진잠, 진산 등의 인근 지역 신앙공동체와 활발히 교류했으며 신자들 간의 이동과 이주가 계속 이어졌다.108) 고산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 역시 산골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는데 진산, 연산과 경계를 이루는 운주면 지역, 운주면 남쪽의 경천면, 여산[현재 익산시 동쪽]과 경계를 이루는 비봉면 지역, 진안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동상면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경천면에 석장리[용복리], 동상면에 광암(너븐바위)[대아리], 비봉면에 다리실[내월리], 세목동(시목동) · 산수[대치리], 운주면에 저구리 · 전주노른이[산북리], 차돌박이 · 빼재(배재)[구제리], 장선이[장선리]가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로 확인된다.

 

 

 

4) 전주 소양면 지역

 

전주 소양면(현재 완주군 소양면)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40년대 후반이나 1850년대 초반에는 신자들이 거주했음을 손선지 가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866년 박해 때 소양면 지역의 7명 신자(조화서, 조윤호, 정문호, 이명서, 손선지, 한재권, 정원지)가 붙잡혀 전주로 갔다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12월 13일 6명은 참수형을 받고, 조윤호는 23일에 매를 맞아 순교했다.109)

 

순교자 7인은 모두 소양면 출신이 아니라 경기도 수원[조화서]이나 충청도 지역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산골 지역에 거주하다가 소양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다. 특히 손선지와 한재권, 정원지는 진잠 지역에 거주하다가 소양면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이다. 손선지 가족은 진잠을 떠나 고산 차돌박이를 거쳐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했고, 진잠 회장이었던 한재권도 손선지 가족을 따라 신리골로 이주했다. 정원지는 진잠 출생으로 현재의 논산과 김제 지역을 거쳐 소양면 성지동으로 이주했다. 한편 진잠에서 10년간 거주했던 김선양과 최 마리아 부부도 대략 1855년경에 소양면 약바위에 이주했다가 1858년에 체포된 뒤 풀려나와 공주로 이주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청도 (내포) 지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고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내륙 산골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계룡산 · 대둔산 일대에 속하는 진잠이나 고산, 전주 소양면 지역까지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대략 이동 경로는 내포에서 출발하여 진잠, 고산, 전주 소양면으로 남하하는 방향이었고, 산골짜기 길을 이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전주 소양면 지역은 현재는 완주군에 속하며 동쪽으로 진안군과 서쪽으로는 전주 시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성동 신리골[신원리]와 성지동 · 약바위[화심리]는 같은 생활영역이라 할 정도로 가까운 곳으로 1866년 박해 이전까지 신앙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었다.

 

 

 

 

Ⅴ. 맺음말

 

산지가 많은 진잠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전략 요충지였는데 고려 이후 공주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진잠현으로 독립했으나 영역이 좁고 생산력이 높지 않은데다 세 부담이 높아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이었다. 양반 사족 집안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상류계층에서는 유교문화가 정착해갔지만 일반 민들은 많은 조세 부담을 져야 했고 민란에 참여하여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천주교의 교리가 상류층이나 중심지역보다는 일반 민들과 산간 지역에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잠 지역은 계룡산과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서남 방면에 위치해 있고, 계룡산과 대둔산에서 발원한 갑천과 그 지류가 흐르는 분지 지역이다. 특히 진잠의 서남부 지역을 감싸 도는 산들은 대둔산에서 이어진 것으로 인근 지역과의 접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진잠현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경으로서 북쪽으로 충청도 공주[현재 대전시, 공주시], 동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현재 금산군 진산면 일대], 서남쪽으로는 충청도 연산[현재 논산시 벌곡면 일대]과 접하고 있었다. 진잠은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면서도 은신이 가능한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정부의 탄압 속에 전파될 때 진잠과 그 주변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1791년 진산사건을 계기로 진산, 금산, 고산, 연산 지역에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존창과 관계가 깊었던 김유산이 고산 저구리와 진잠 서남쪽 산골 마을인 산막동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했다. 따라서 늦어도 1790년대 후반에는 진잠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동안은 진잠에 거주했던 신자들이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늦어도 1836년 이전부터 진잠에 박영근·손선지 가족을 비롯한 신자들이 거주하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손선지와 함께 전주에서 순교한 한재권도 1840년대 후반~1850년대 전반 사이 진잠에 거주했을 뿐 아니라 공소 회장으로 활동했다.

 

1839년의 박해 때에 진잠 지역은 별다른 사건 없이 장안동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유지했고, 다른 지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진잠으로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866년(병인)에 일어난 대박해는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고 진잠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진잠 바랑골과 앞재에 살던 이 바오로, 강순지, 전자연, 김 스타니슬라오가 공주로 잡혀가 순교했고, 1878년에도 진잠 오리울에 살던 장정선[장희철]이 다른 지역 신자들고 함께 잡혀 서울에서 순교했다.

 

자료에 나타난 진잠 지역 신자 거주지는 현재 서구 기성동에 속한 장안동과 오동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진산, 서쪽으로는 연산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산골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공식적으로 천주교가 금지되고 탄압을 받던 시기에 다른 군현으로 이주하기 쉽고 타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산골 경계지역이 신자들에게는 알맞은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진잠으로 이주해온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 충청도 지역[현재 보령, 부여, 공주, 금산]에 연고를 두고 있었는데, 내포 지역에서 박해를 피하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해 내륙 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반면 진잠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에는 고산이나 전주 소양면 등 현재 완주군 북부의 산골지역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산골에 터전을 잡은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도 산길을 따라 이동했고, 다른 신자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잠 지역 신자들과 다른 지역 신자들과의 관계를 보면, 1790년대 신앙공동체가 세워질 때부터 고산 저구리와 진잠 산막동, 연산 지역 신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830~40년대에 진잠에 거주했던 손선지와 한재권을 비롯한 신자들이 신앙생활과 전교활동에 열심히 나섰고, 이로 인해 진잠과 그 주변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꽤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860년대에도 진잠의 앞재와 바랑골 신자들이 진산, 고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 신자들과 교류했으며, 1870년대 후반 교회 재건이 시작된 시기에 진잠 오리울에서 신앙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로 천주교의 전파가 어느 정도 용인되면서 진잠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진잠과 인근 연산, 진산, 금산, 고산 지역 신자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발전시켰고, 개항기 이후 천주교가 이 지역에 뿌리내리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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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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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愚伏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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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업교회사연구소 엮음, 2009,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빅벨.

 

2. 논저

 

김진소, 1998, 《전주교구사》 1, 전주교구.

대전서구문화원, 2006, 《서구의 역사》(대전광역시 서구사 제1권), 대전서구문화원.

대전광역시, 2015, 《(한국지리지 대전광역시) 대전》, 대전광역시.

오갑수, 2002, 〈조선 시대 공주목 관할 지역 지방 관아와 읍세의 분석〉, 건양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석원, 2016, 〈조선후기 진산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 이동〉, 《교회사학》 13, 수원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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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관저1 · 관저2동) · 정림동(괴곡동) · 가수원동(도안동 · 가수원동 · 괴곡동) · 기성동(매로동 · 봉곡동 · 산직동 · 오동 · 용촌동 · 우명동 · 원정동 · 장안동 · 평촌동 · 흑석동)과 유성구 진잠동(계산동 · 교촌동 · 대정동 · 방동 · 성북동 · 세동 · 송정동 · 용계동 · 원내동 · 학하동),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 지역. 조선시대에는 진잠현이었는데 1895년 진잠군이 되었다가 1914년 대전군에 편입되었다. 진잠현의 읍치 위치는 현재 유성구 원내동 일대이다.

 

2) 공소(公所)는 본당 사제가 상주(常住)하지 않는 작은 교회[신앙공동체]를 말한다. 사제의 숫자가 부족한 선교 지역에서는 본당 신부가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자기 본당 구역 내 교우촌을 찾아가 교리를 가르치며 성사(聖事)를 거행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그때 신자들이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주로 회장이 살던 집]에 모이게 되는데 그 집을 ‘공소’라고 불렀다.

 

3) 김진소, 1998, 《전주교구사》 1, 전주교구, 327~336쪽. 이 책에서는 전라도와 연관된 타 지역 순교자들도 정리했는데 진잠, 진산 · 금산, 연산 지역 관련 순교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석원, 2016, 〈조선후기 진산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 이동〉, 《교회사학》 13, 88쪽. 이 글에서는 진산과 관련된 진잠 순교자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4) 진현성은 지금의 흑석동 산성으로 비정된다. 대전서구문화원, 2006, 《서구의 역사》(대전광역시 서구사 제1권), 36쪽.

 

5) 대전광역시, 2015, 《(한국지리지 대전광역시) 대전》, 대전광역시, 12쪽, 〈그림 1-1-4〉.

 

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8권 충청도(忠淸道) 진잠현(鎭岑縣).

 

7) 《호서읍지(湖西邑誌)》(奎 12176, 1871년) 진잠읍지 건치연혁(建置沿革) 항목. ‘萬曆戊戌以邑殘 合屬公山 己酉復縣’

 

8)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충청도 공주목(公州牧) 진잠현 항목에는 ‘그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다’(厥土肥少塉多)고 기록되어 있다.

 

9) 오갑수, 2002, 〈조선 시대 공주목 관할 지역 지방 관아와 읍세의 분석〉, 건양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2~14쪽, 49쪽.

 

10) 진잠 지역에 사대부들이 거주했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장이던 정경세(鄭經世)가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진잠 사대부들은 함께 재물을 내어 무기를 장만하고 각지의 의병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우복집(愚伏集)》 제14권 잡저(雜著) ‘진잠 고을에 주는 글’(與鎭岑一鄕文) 참조.

 

11)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즉위년(1724) 10월 22일 기사.

 

12) 대전서구문화원, 2006, 《서구의 역사》(대전광역시 서구사 제1권), 43~44쪽.

 

13) 《목민심서(牧民心書)》 율기(律己) 6조 제5조 절용(節用). 정약용은 “수령이 처첩(妻妾)을 거느리지 않고 자제들의 임지 왕래를 허락하지 않으며 권문 귀척(權門貴戚)을 섬기지 않고 금공(金工)· 목공(木工)을 불러들이지 않으며 금주보패(金珠寶貝)를 취하지 않는다면 비록 연기(燕岐) · 진잠 같은 (열악한) 고을이라도 재정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연기와 진잠을 잔읍(殘邑)으로 이해했다.

 

14)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진잠현 방리(坊里) 항목에 ‘기묘년(영조 35) 장적을 따랐다’(以己卯帳籍爲率)고 나온다. 김우철 역주, 2009, 《여지도서 13 충청도 Ⅵ》, 흐름, 181쪽.

 

15) 《호서읍지(湖西邑誌)》(奎 12176) 진잠읍지 방리 항목.

 

16)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작성된 읍지 기록에서도 진잠현의 호수와 인구수는 4~5천명 수준에 머물렀다. 《[호서]읍지([湖西]邑誌)》(奎 10767, 1895년)에는 1,321호 인구 4,829명으로, 《[충청남도]읍지([忠淸南道]邑誌)》(奎 10768, 1899년)에는 1,555호 인구 5,674명으로, 《충청남도읍지(忠淸南道邑誌)》(奎 10769, 1906년)와 《충청남도읍지(忠淸南道邑誌)》(奎 15235, 1906년)에는 1,411호 4,147명으로 나온다.

 

17)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철종 13년(1862) 5월 19일 기사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같은 날 기사.

 

18) 《경세유표(經世遺表)》 제3권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

 

19) 《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 卷二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 지방제(地方制) 제4

 

20)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공주 지역 일부(현재 대전 중구와 동구 남부, 유성구 북부)가 회덕군에 통합되었다.

 

21) 갑천은 대둔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벌곡천(한삼천)과 계룡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두계천이 용촌동에서 합류하여 거의 대전 서구의 중앙부를 남서쪽에서 북서쪽을 향하여 관통하고 있다. 대전서구문화원, 2006, 《서구의 역사》(대전광역시 서구사 제1권), 241쪽.

 

22)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山水)

 

23) 《택리지》 팔도총론(八道總論) 충청도(忠淸道)

 

24) 인조 때인 1631년 권대진(權大進) 등이 정한(鄭澣)을 추대하려던 역모사건이 발각되었는데, 당시 역모 주동자들은 거사가 성공하면 도읍을 진잠(鎭岑)이나 (계룡산 아래) 신도(新都)로 옮기려고 했다. 《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9년(1631) 2월 2일 기사 참조. 조선후기에는 변란 주동자들이 도참설에 근거하여 계룡산 일대를 새로운 도읍지로 언급하기도 했는데 위의 사건을 통해 ‘진잠=계룡산’이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5) 대전서구문화원, 2006, 《서구의 역사》(대전광역시 서구사 제1권), 241쪽. 248~249쪽. 안평산 안쪽 장안동에는 장태산(186m), 형제산이 있으며 서구의 오동 오리울과 논산시 벌곡면 어곡리 의실 사이에 장군봉이 위치하고 있다.

 

26) 《여지도서》 충청도 진잠현 도로(道路) 항목. 김우철 역주, 2009, 《여지도서 13 충청도 Ⅵ》, 흐름, 181쪽. ; 《호서읍지》(奎 12176, 1871년) 도로 항목.

 

27) 충남의 가야산(伽倻山, 678m)을 중심으로 한 아산만 일대와 서해안 지역, 곧 아산시, 당진시, 서산시, 태안군, 예산군, 홍성군, 청양군, 보령시, 서천군 지역을 말한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서 수로를 따라 포구가 발달된 지역’을 뜻한다. 해로를 통한 교역과 교류가 활발하고 천민과 평민들이 다수 거주하던 곳으로 내륙지역에 비해 유교문화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강한 곳이었다. 이존창의 전교 이래 평민 중심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28) 현재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속한 저구리

 

29) 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 f.164

 

30)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신유년(1801) 2월 15일 이존창 공초

 

31) 《사학징의(邪學懲義)》 권2 이환송질(移還送秩), 관검, 233~234쪽. 윤지헌도 이때 이존창의 집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사학징의》 권2 이환송질, 지헌, 239쪽.

 

32) 《추안급국안》 신유년(1801) 3월 15일 주문모 신부 공초

 

33) 다블뤼 주교,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f.138

 

34) 《사학징의》 권2 이환송질, 지헌, 240쪽.

 

35)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65~66쪽, 82~84쪽.

 

36) 《사학징의》, 김유산 공초, 242쪽에는 충청도 금정 청연역(金井 淸延驛)으로 기록되었다. 현재 보령시 주포면 관산리 지역에 청연역이 있었다.

 

39) 김진소, 1998, 앞의 책, 161~163쪽.

 

40)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에 있는 마을.

 

41)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85회차(1900.3.24) 박영근의 1차 증언, 6권 1069쪽.

 

42)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76회차(1900.3.9) 손순화의 1차 증언, 5권 941쪽.

 

43)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44) 손순화는 손선지가 16세 때에 회장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77회차(1900.3.10) 손순화의 2차 증언, 5권 963~964쪽. 그런데 손선지가 16세였을 때는 1835년이며, 샤스탕 신부가 입국한 해는 1837년 1월이었으므로 사실과 맞지 않는다. 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된 것이 맞다면 1837년부터 1839년(신부가 순교한 해) 사이일 것이다.

 

45) 전북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있는 마을.

 

46) 《병인치명사적》 17권 45~52쪽. 손 막달레나는 7세였던 1847년에 다블뤼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처음 받았고, 17세인 1857년에 금산 개죽리(현재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에 사는 한 요한과 혼인하여 시댁에 살았다.

 

47)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2차) 30회차(1922.4.4.) 손 데레사의 1차 증언.

 

48)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속한 대승리[대성리]에 있는 마을.

 

49)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2차) 29회차(1922.4.4.) 손 토마스의 1차 증언.

 

50)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교회 역사자료 편찬부 편, 1983, 《103위 시복시성자료》 Ⅲ,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Tabella Testium’ 236쪽. ‘Tabella Testium’은 증인별로 시복 재판 기록을 편집한 자료인데 70번째 증인인 안영화(곤자가)는 1900년 증언 당시 62세였고, 정원지가 진잠(Tjin-tjam)에서 천주교 신자로 태어났다[태중교우]고 증언했다. 안영화의 증언은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현대문 편(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87), 49쪽, (표1) ‘병인박해 순교자 교구 재판 증언표(1899~1900)’에 의하면,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100회차(7권) 증언에 해당되며 서면으로 제출되었다고 한다.

 

51)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78회차(1900.3.11) 손순화의 3차 증언, 5권 980쪽.

 

52) 대둔산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전주부[1896년 군이 됨] 양량소면에 속했는데 1914년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53) 현재 전북 김제시 금구면, 봉남면, 화안면, 금산면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금구현이었는데 1895년 군이 되었다가 1914년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54) 위의 손순화의 3차 증언, 5권 979~980쪽.

 

55) 《병인치명사적》 24권 126~133쪽. 오순보의 증언

 

56) 정기서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부모이자 정원지의 형과 형수는 정 바오로와 박 수산나였다. 박 수산나는 정원지가 체포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125회차(1900.8.24.) 정기서 증언, 9권 1775쪽, 1779쪽.

 

57) 위의 손순화의 3차 증언, 5권 980쪽.

 

58)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2차) 67회차(1922.10.11.) 안 필립보 증언.

 

59) 한재권 요셉이다. 1901년 교황청에 시복 청원서를 제출할 때 그의 자(字)를 ‘원여’가 아닌 ‘원서’로 잘못 보고한 이래 그의 이름이 ‘한원서’로 알려졌었다. 그 후 1992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총회를 통해 오류를 시정하고 《족보》와 후손의 증언 기록에 따라 공식 이름을 ‘한재권 요셉’으로 고쳐서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60)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 78회차(1900.3.11) 손순화의 3차 증언, 5권 973쪽.

 

61) 한 토마스(1872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 부모는 한 바오로와 강 마리아이고, 한재권은 큰아버지이며 할아버지는 한 도미니코이다.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2차) 31회차(1922.4.4.) 한 토마스의 1차 증언과 《병인치명사적》 16권 10~11쪽 참조.

 

62)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2차) 31회차(1922.4.4.) 한 토마스의 1차 증언.

 

63) 금정역은 충남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인 금정도(金井道)의 핵심 역이었다.

 

64) 《병인치명사적》 8권 6~7쪽.

 

65)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속한 봉정동에 있는 마을.

 

66) 원문의 ‘고산 동면 시어동’은 ‘여산 청동면 시어동[시어목]’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여산 시어동은 현재 전북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에 있는 마을이다.

 

67)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 있는 마을

 

68) 《병인치명사적》 22권 150쪽. 창평 죽림동 거주 김 요한의 증언.

 

69) 《병인치명사적》 21권 157~161쪽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17번.

 

70)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59쪽, 66쪽.

 

71) 윤태익은 1864년 7월 23일에 진잠 현감에 임명되어 재직하고 있었다. 《일성록(日省錄)》 고종 1년(1864) 1864년 6월 20일 기사 참조.

 

72) 《승정원일기》, 고종 3년(1866) 3월 4일 기사.

 

73) 《병인치명사적》 21권 6쪽. 고산 광암 거주 강 프란치스코의 증언. 원문의 ‘진산 바랑골’은 ‘진잠 바랑골’의 오기이다.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4번 참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 같다. 진잠 바랑골은 현재 대전 서구 기성동에 속한 장안동에 있는 마을이다.

 

74) 《병인치명사적》 21권 123~124쪽. 증언자 원 베드로는 이 바오로가 1866년 3월 15일에 공주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했다.

 

75) 원문의 ‘젼쥬노롤리’는 ‘젼쥬노로니(노론이)’의 오기이다.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4번 참조. 전주노론이는 현재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있는 마을이다.

 

76) 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리에 있는 마을.

 

77) 《병인치명사적》 21권 122쪽. 진안 한식골 거주 이 그레고리오의 증언.

 

78) 양업교회사연구소 엮음, 2009,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빅벨, 133~136쪽. 최양업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진밭들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를 준비하는 중이었으며 그중 어른 15명이 신부에게 곧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세례성사를 집전하는 중에 배교자들과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고 최 신부는 겨우 피신할 수 있었다. 결국 5명의 신자가 관가에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이 바오로 회장이다.

 

79)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62~63쪽.

 

80) 대전 서구 기성동에 속한 장안동 용암 마을과 금산군 복수면 신대리 맨산이 마을에 걸쳐 있는 고개.

 

81) 《병인치명사적》 21권 34~35쪽. 은진 쇠목 거주 김 베네딕토의 증언.

 

82) 《병인치명사적》 6권 30~31쪽, 21권 7쪽. 고산 광암 거주 강 프란치스코의 증언.

 

83) 《병인치명사적》 21권 34~35쪽. 은진 쇠목 거주 김 베네딕토의 증언.

 

84) 대전 서구 기성동에 속한 오동.

 

85) 《병인치명사적》 21권 6~7쪽. 고산 광암 거주 강 프란치스코의 증언.

 

86) 《병인치명사적》 21권 26~27쪽. 은진 뒤강이 거주 박 안드레아의 증언.

 

87)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謄錄)》, 무인년(1878), 3월 8일 「張希哲 年四十 邪號 요습」

 

88) 충남 금산군 진산면 오항리에 있는 일양리.

 

89) 이러한 흐름은 진산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74~75쪽.

 

90) 김진소, 1998, 앞의 책, 162쪽.

 

91) 1922년 시복재판의 증인으로 나왔던 김 마티아 회장(1857년생)은 자신의 출생지가 진산 앞재라고 밝혔다. 앞재는 진산 북면 신대리(현재 금산군 복수면)에서 진잠 용암(현재 대전 서구 장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진산과 진잠에 걸쳐 있는 곳이다. 따라서 진잠 앞재와 진산 앞재는 고개를 넘어 마주하고 있는 마을로 1850년대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2차) 27회차(1922.3.30.) 김 마티아 회장의 1차 증언.

 

92) 금산 개죽리 전씨 집안 출신으로 전성백(야고보)[1867년 공주에서 순교], 전춘서(안드레아)[1867년 서울에서 순교], 전 데레사(또는 마리아)[1868년 여산에서 순교]가 확인되며 전 마리아[1868년 홍주에서 순교]와 전 루치아[1867년 여산에서 순교] 자매도 전씨 집안일 가능성이 있다.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68~69쪽.

 

93)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79쪽.

 

94) 충남 논산시 벌곡면 검천리에 있는 마을. ‘주티’, ‘주치리(舟峙里)’, ‘밧배티’라고도 한다.

 

95) 관변 측 자료에 나오는 성경순(成敬純) 베드로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우포도청등록》, 무인년(1878) 3월 8일, 「成敬純 버드루 年三十九」 참조. 성경순은 연산 동이면 주치리 사람으로, 1878년 드게트 신부가 체포될 때 같이 붙잡혔다. 함께 체포된 박공좌(朴公左)가 그의 처남(妻男)이었다.

 

96) 관변 측 자료에 의하면, 무인년(1878)에 성경순과 함께 연산에서 체포된 사람으로는 박공좌(朴公左, 44세), 박공칠(朴公七, 34세), 박공엽(朴公燁, 32세), 박순옥(朴純玉, 24세) 4형제가 나온다. 당시 박 알렉시오가 36세였다는 동생 박 안드레아의 증언에 따르면, 박공칠이 박 알렉시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우포도청등록》, 무인년(1878) 3월 8일, 「朴公七 年三十四」 ; 《병인치명사적》 21권 25~26쪽.

 

97) 충남 논산시 벌곡면 검천리에 있는 마을. ‘오작곡(五作谷)’, ‘오작골’이라고도 한다.

 

98) 관변 측 자료에 나오는 박공악(朴公岳)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우포도청등록》, 기묘년(1879) 4월 1일, 「李秉敎 年六十七」 참조. 1878년 드게트 신부가 용인 지방에서 전교를 하기 위해, 이병교(李秉敎)가 용인 공수동(空藪洞)에 집을 얻고, 그 사실을 최지혁(崔智爀)에게 알렸더니, 그 때 박공악(朴公岳)과 신치욱(申致旭)이 드게트 신부와 함께 와서 4개월을 동거하였다고 한다.

 

99)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100) 관변 측 자료에 나오는 김춘삼(金春三) 요한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우포도청등록》, 무인년(1878) 3월 8일, 「金春三 年三十六 邪號 요안」 참조. 1878년 1월 리델 주교가 체포된 후 관련된 신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김춘삼도 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101) 《병인치명사적》 21권 24쪽, 고산 석장리 거주 성 아우구스티노[성 베드로의 아들]의 증언 ; 《병인치명사적》 21권 25~26쪽, 은진 뒤강이 거주 박 안드레아[박 알렉시오의 동생]의 증언

 

102) 《병인치명사적》 22권 60쪽, 대흥 우러내 거주 김 토마스[김 요한의 조카] 증언. 김(춘삼) 회장의 중형(仲兄)이 연산 논골(현재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어곡리에 있는 마을인 느락골로 추정)에서 살다가 잡혀 공주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병인치명사적》 21권 123쪽]으로 보아 김춘삼 형제의 고향이 논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03) 《병인치명사적》 21권 122~123쪽, 진안 한실골 거주 이 그레고리오의 증언.

 

104) 이석원, 2015, 앞의 논문. 56~70쪽.

 

105) 다블뤼 주교,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37쪽.

 

106) 이보현은 연산에서 붙잡혀 해미로 끌려가 1800년 1월 9일에 매질로 죽음을 당했고, 황심은 황사영 백서 사건과 연루되어 1801년 11월 28일 서울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107)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86~87쪽.

 

108) 이석원, 2016, 앞의 논문, 82~84쪽.

 

109) 김진소, 1998, 앞의 책, 289~307쪽.

 

* 본 논문은 2017년 7월 7일 ‘장안동지역의 천주교회사’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22357&Page=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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