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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침묵 속에서 들으시는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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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331

[레지오 영성] 침묵 속에서 들으시는 성모님!



콘스탄티노플의 성 제르마노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호흡이 몸이 죽지 않았다는 확실한 징후인 것처럼, 마리아에 대한 잦은 기억과 사랑스런 간구는 영혼이 죄로 죽지 않았다는 확실한 표징이다.”

우리가 성모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모님을 자주 생각하고 본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성모님의 덕행 중에 “들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들음의 모델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상황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나자렛에서의 감추어진 시기를 보내신 분이십니다. 이 시기 동안에 성모님은 하느님이신 분을 보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을 더욱더 깊이 배우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침묵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한 번은 여러 명의 기자들이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거절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기자들이 글을 잘 써주면 그만큼 많은 후원자들이 생길 것이고, 그들이 보내주는 후원금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아주 요긴하게 쓰일 텐데 이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30년 동안 조용히 쉬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시간 필요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안에서 푹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침묵 가운데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침묵 가운데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양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에 성모님을 초대하시고는 성모님의 삶에 나자렛 생활을 허락하십니다. 성령께서 세례 받으신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자렛에서의 삶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더 깊이 배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당신의 것으로 하는 것을 배우십니다.

성모님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에게도 성모님의 나자렛에서의 삶과 같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변합니다. 자신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데 그야말로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회심한 것이 34~35년이고, 첫 번째 전교 여행을 떠난 것은 AD 45~46년이라고 합니다. 회심 이후 첫 번째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의 이 10여 년간의 공백은 무엇인가?

이 기간은 바오로 사도에게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사도는 변했지만 초대교회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0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는 교회를 원망하고만 있었고, 이 기간은 바오로 사도에게 없었다면 좋았을 그런 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회심 이후에 바오로 사도가 했던 복음 선포의 주체는 바오로 사도 자신이었습니다. 10년간의 고독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깨닫습니다. ‘내 것은 모두 버려야 하는구나.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로구나.’ 이 10년의 침묵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철저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배우게 됩니다.


하루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의 침묵 시간 찾아야

이런 일이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일어나는가? 저는 아직도 무릎 꿇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처음에 무릎을 수술한 것은 부제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하고, 신학생 모임이 있어서 택시를 타러 목발을 짚고 가다가 동네에서 신자 아주머니 한분을 만났습니다. 저를 보고 “부제님 힘들어서 어떻게 해요!” 그러시더니 “그래도 다 하느님 뜻일 거예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그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 내 다리를 똑 부러뜨리셨다는 것인가?’

그런데 한참을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뜻하심이로구나. 내가 다리를 수술하지 않았다면 정말 얼마나 더 교만했을까?’ 그나마도 이 시간을 지내면서 다른 이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내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정말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한 번 미사를 오랫동안 못 지내고 사제관에 누워 있었습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더 많이 내려놓고 하느님을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어떤 기간에 이런 시간이 허락될 수도 있지만, 우리 하루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의 이 침묵의 시간을 찾고 그것을 지켜나가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 나자렛에서의 삶은 어찌 보면, ‘하느님의 계획이 계속 유효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그런 시기입니다. 너무도 평온하고, 너무도 평범한, 하느님의 위대함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미소함을 체험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한 응답이 흐지부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라날 수도 있는 시기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불명확한 시기에 성모님은 이런 인간적인 생각과 시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뒤로하고 믿음 안에서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듣고 배우고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하기 전에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배우고 하느님과 관계를 쌓아가는 시간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3월호,
최규화 요한 세례자(신부, 수원교구 본오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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