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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교구 승격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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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503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교구 승격 50년


주일, 내가 듣고 있는 복음을 세상 저쪽 편의 내 친구도 듣고 있다는 사실은 늘 날 흐뭇하게 만든다. 세계적 조직과 소통이 가톨릭교회의 특징이다. 그래서 혹자는 가톨릭교회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군대와 같다고도 한다. 그 정돈된 체계와 일사분란 함에 대한 경이일 것이다. 또한 그 안에 소속되는 이들도 이 질서유지에 대해 극히 익숙하다. 그리하여 교회는 한 목소리를 내며 큰 일을 해 낸다.

교회 안에 있는 질서 중 하나가 교계제도이다. 1911년 4월 8일 탄생한 대구교구는 1962년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2012년 3월 10일은 대교구 승격으로부터 50년이 된다. 우리는 흔히 서정길(요한) 대주교가 1955년 주교로 서품되어 대구교구 7대 교구장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초기 서정길 신부는 ‘초마띠따누스(Chomatitanus)의 명의주교’로서 7대 대구대목구장이 되었다. 그는 1962년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자 그해 7월 5일 대주교로 서임되어 대구대교구장이 되었다. 이는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된 것만이 아니라 대구교구가 정식 교계제도 안에 편입된 것을 말한다. 즉 한국교회는 1962년 이전까지는 포교지를 분류하는 준교구로서 대목구 지역이었다. 대목구 단계의 대목구장은 ‘명의주교’인 대목이었으며, 정식 교계제도에 따른 교구의 주교와는 구분되는 존재였다.

한국교회에는 여러 번 교계 조직의 변화가 있었다. 한국교회사에서 교구에 해당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대목구, 감목대리구, 지목구 등과 같은 단어가 있다. 이러한 명칭들은 원래 각기 다른 별개의 용어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인의 이해를 위해 관행적으로 이러한 지역들을 ‘교구’로 통칭해 왔고, 이 지역의 책임자인 감목이나 대목구장 등을 구분하지 않고, ‘주교’ 또는 ‘교구장’으로 불러 왔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갑사(Capsa) 명의주교로 조선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감목)이 되었다. 베르뇌 주교도 갑사 명의주교였다. 대구대교구의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아드라스(Adras)의 명의주교로, 대구의 감목(Vicaire Apostolique de Tai-Kou)이 되었다. 서정길 주교는 앞서본 바와 같이 명의주교로서 대목구장을 하다가 대구대교구장이 되었다.

세계교회사를 볼 때 대목구 및 대목의 출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대목구의 사목책임자인 대목 혹은 대목구장은 명의주교로 주교품을 받았다. 명의주교의 기원은 니체아 공의회(325년)가 회개한 노바시아노파 주교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교구 대신에 주교의 칭호와 영예만을 존속시켜 준 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다가 사라센인들이 7~8세기 아프리카나 스페인 등을 차지하고, 13세기 소아시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여 교회가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지역에서 추방된 주교들은 서방교회의 주교들에게 피난 가서 보좌주교들이 되었다. 이들은 자기 교구의 통치권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보좌주교로 들어간 새 교구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지역의 교구장을 도우면서도 원래 자신이 사목하던 지역의 명칭만을 가진 ‘명의주교(Ep. Titularis)’가 되었다.

한편, 종교개혁과 대항해시대 이후 새롭게 발견된 선교지역들이 출현했다. 교황청에서는 이들 지역에 정식 교구를 설치하는 대신에 대목구를 설정했다. 그리고 이 대목구 제도와 명의주교 제도를 결합시켜, 대목구에 명의주교좌(sedes titularis)라는 일종의 준(準)교구체제를 두게 되었다. 명의주교의 명칭은 자신이 상주하고 있는 선교지의 지명 대신에 이미 상실된 아프리카 등지의 교구 명에서 따왔다. 대목구장인 명의주교는 정식교구의 상주주교와 비슷한 특전과 영예를 가졌다.

대목구는 주교의 명의로 통치권이 행사되던 교구와는 달리, 대목구장이 교황의 위임을 받아서 교황의 명의로 그 지역을 관할했다. 그리고 포교지 교회의 책임자라는 지역 및 직능의 특성을 감안하여 교황청의 포교성에서 관할했다. 이를 교황대리감목구(敎皇代理監牧區, 보통 대목구라 칭함)라 하고, 이러한 교구의 장은 교황대리감목구장(敎皇代理監牧區長, 대목 또는 대목구장이라 칭함)이다. 조선의 선교사들이 편지 말미에 ‘교황청 파견 선교사’라고 서명했던 이유는 조선교구가 바로 교황청 포교성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교구는 1831년 조선대목구로 시작되었고.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이어 원산대목구(1920), 연길대목구(1937), 평양대목구(1939), 함흥대목구(1940), 춘천대목구(1955), 부산·광주·전주대목구((1957)), 청주·대전 대목구(1958)와 인천대목구(1961) 등이 정식교계제도 이전에 시작, 즉 대목구로 출발했다. 물론 전주, 광주, 평양, 연길, 춘천 등은 지목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한편, 1971년에는 광주대교구로부터 제주교구가 지목구로 분할된 바 있는데, 이것은 교계제도의 설정 이후였으므로 포교지 교구제도로서가 아니라 준교구제도로서 적용된 것이다.

이 중 전주는 감목대리구로부터 시작되었다.(1931) 이 감목대리구(Vicariatus Foraneus)라는 용어는 오늘날 대구대교구 안에 있는 ‘대리구’와 같은 개념이었다. 감목대리구는 다시 지목구(praefectura Apostolica)로 발전될 수 있었다. 감목대리구장이나 지목구장은 주교가 아닌 성직자가 맡을 수 있었는데 주교급인 대목구장의 일정한 관여를 받았다. 드망즈 주교 당시 김양홍 신부가 전주지목구장이 된 것은 이같은 예이다. 지목구가 어느 정도 터전을 잡으면 대목구(Vicariatus Apostolicus)로 승격했다. 이 대목구 단계에 이르면 별도의 주교급 대목구장이 임명되어 교회의 독립된 행정단위가 된다. 그리고 교구로 발전해 나간다. 물론 교구는 여러개의 교구를 관할하는 대교구(관구)가 된다.

한국교회가 발전하면서 세계교회로부터 이해도 깊어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교구 명칭에서 그러한 일화를 찾을 수 있다. 원래 조선왕조에 교회가 창설되었던 1784년 당시 조선 선교지는 북경대목구에 속해 있었다. 조선 교회는 수없는 순교자를 내며 발전해 갔고, 박해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교구의 독립을 교황청에 청원했다. 이에 호응하여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북경대목구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 ‘조선대목구’를 설정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교구나 대목구의 명칭을 정할 때에는 나라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을 기준으로 삼는 원칙이 있었다. 이 관행은 서양의 역사 내지는 행정제도와도 관련된다. 고대와 중세시대 서양에서는 광대한 지역을 나타내는 국가라는 관념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개념이 더 우선시되어 왔다. 이 봉건적 행정제도와 관련하여 교회의 지역구분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구명칭을 정하는데 있어서 적용되고 있는 교회의 관행은 오늘날 올림픽경기의 공식명칭을 정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올림픽게임은 국가명이 아닌 도시명을 가지고 부른다. 예를 들면, 1988년 한국에서 개최된 올림픽을 ‘서울올림픽’이라고 부른다. 당시 올림픽의 개최는 국가적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국가명 대신에 서울이라는 도시명을 쓰고 있다. 이는 올림픽의 발상지인 서양의 봉건제적 지방 행정 관행의 잔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대목구가 설정될 당시 교황청에서는 조선이란 지명은 알았어도, ‘서울’이라는 명칭을 미처 몰랐는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1911년 대구대목구를 설정할 때에서야 비로소 조선대목구라는 명칭을 서울대목구로 바로잡았다.

정식 교계제도가 적용되어 ‘대교구’로 승격된다는 사실은 세계교회 내에서의 권한과 역할 비중이 커짐을 말한다. 그리하여 대구대교구 1백여 년의 역사는 대목구 51년과 대교구 50년의 시대로 나뉘고 있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이처럼 세계교회 일원으로서의 당당한 출발이며 미래 발전에 대한 예고이다.

현재 한국의 신자 수는 520여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교회의 신자 수는 12억 명에 가깝다. 신자들은 교계제도에 속해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한다. 가톨릭 신자로서 세례를 받음은 이 엄청난 조직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교우들과 연결되는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세례의 순간, 또 매순간 이 사실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커다란 세계를 품는 위로를 받으리라. (* 사진도움 : 관덕정 순교성지, 교구자료실, 류지헌)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3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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