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2011-0123.....연중 3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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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1-23 ㅣ No.981

연중 3 주일 (가해)
이사야 8,23-9,3 1코린 1,10-13.17 마태 4,12-23
2011. 1. 23. 등촌3
주제 : 세상의 크고 작음과 하느님의 기준
지난 한 달 동안 동장군(冬將軍)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는데, 오늘 잠깐 괜찮았다가 내일부터는 다시 추워진다는 일기예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향해서 큰소리쳐봐야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고, 이 추위를 대하는 방법을 바르게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삶에서 작은 것보다 큰 것을 먼저 선택합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작은 것들만 있다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택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들이 다양하다면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택할 것이고, 멋있고 아름다운 것을 먼저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바람은 이런 것이 간절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일도 있습니다. ‘나는 왜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그게 싫다고 생각한다면, 대한민국보다 더 큰 나라로 이민을 가는 방법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선택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먼저 찾는 삶의 방식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사는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같은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신앙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삶을 마친 뒤, 하느님의 나라에 함께 할 행복은 세상에서 내가 드러낸 삶의 태도가 판단기준이 아니라, 몸은 비록 세상에 살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따랐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갈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실천한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 영광의 장소인 천국에 함께 하든지, 회개와 단련의 장소인 연옥에 함께 할 가능성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아주 고집 세게 인간의 기준에만 충실하게 살았기에 하느님께서 준비하는 영광이나 축복에서는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앞세우고 살아도 충분하고, 그것만이 내 삶을 요리할 기준이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고민스럽게 살아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있는 것 없는 것들 모두 다 내 마음대로 쓰고, 가족도 이웃도 생각할 필요 없이 나 혼자만 배부르고 행복하게 살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다양하게 세상의 기준도 생각할 수 있는 우리들이지만, 신앙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세상의 기준에만 충실하게 살았는지, 하느님의 기준도 알아들으려고 애썼고, 그 기준을 내 삶에 적용시키려고 살았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기준은 어디에서 배우겠습니까?
 
오늘 연중 3주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나서시는 시작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 삶에서도 강조되는 첫 마음이기는 합니다만, 그 시작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올바르게 살피는 것도 아주 크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세례자요한이 역사의 활동무대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요르단강 끝, 사해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세례를 주면 회개를 선포했던 요한이 정치꾼의 힘에 눌려 예루살렘으로 붙잡혀가고 난 다음, 예수님은 요르단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서,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의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고, 그곳을 복음 선포의 출발지로 삼으십니다.
 
음지를 피하고 양지를 택하는 사람, 내가 하는 일의 중요성이 남들이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으로 칭송되기를 바랄 사람들이 세상 삶에서 선택하는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즈불룬과 납탈리지방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합니다. 인간의 기준은 하느님의 기준보다 그 등급이나 가치가 낮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복음선포의 시작을 이 외딴 곳에서부터 시작하셨는지 우리가 함께 묵상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더라도 말입니다.
 
즈불룬과 납탈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유명하거나 큰 장소도 아니었고 중요하게 여길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작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큰일에 대한 자세도 달라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 작은 일보다는 큰일을 해야만 내 이름 몇 글자를 더 쉽게 알릴 수 있는 법이지만,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작은 일은 제쳐놓고, 큰일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기준이 다른 것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사용하는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으로서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하느냐의 차이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세상에 작은 것이라고 하여 무시하거나 천대받고 버림받은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주 큰일에서 정성을 담아 움직인 삶의 결과와 아주 작은 일에서도 같은 자세로 움직인 삶의 결과의 겉모양이 똑같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자세가 크거나 작은 일에 남기는 영향은 아주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는 아무래도 세상의 기준을 먼저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산 지혜로운 사람이 삶을 지내면서 삶의 폭을 그 이상으로 넓힐 줄 모른다면, 우리는 평생을 바오로 편이나 아폴로 편이든지, 케파 편이나 그리스도 편중의 하나라고 우기다가 삶을 끝내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삶을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면 우리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세상에서 살았다는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고, 그런 자세로 산 사람이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축복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우리 삶을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대로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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