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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898년 명동성당의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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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806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898년 명동성당의 건립

 

 

명례방 신앙 공동체

 

서울의 명동성당이 세워진 종현(鐘峴)지역은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상 ‘남부 명례방’에 속한다. 당시 서울에는 5부(동 · 서 · 남 · 북 · 중)가 있고, 부(部)아래 방(坊)이 있으며, 방의 하부에 리(里) · 동(洞) · 계(契)가 존재했다. 명례방은 오늘날 남대문로, 을지로, 명동, 충무로, 회현동, 장교동, 저동, 남산동에 걸쳐있는 지역이었다.

 

명례방이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은 1784년 한국교회가 설립된 직후였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 신앙 집회를 가졌는데, 김범우의 집이 바로 명례방에 있었다.

 

물론 명동성당 자리가 김범우의 집터는 아니다. 기록(「벽위편」)에 따르면, 그의 집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관청 앞에 있었고, 장악원 터는 지금의 을지로 2가에 있는 KEB하나은행 본점 자리이다. 그러므로 김범우의 집은 명동성당에서 500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하겠다.

 

김범우의 집에 형성된 ‘명례방 신앙 공동체’는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먼저 자발적으로 교회를 설립한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의례를 거행하려고 만든 공동체였다.

 

둘째, 1785년 봄, 집회에 참석한 신자들이 체포되는 명례방 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첫 번째 순교자(김범우)가 탄생했다. 셋째, 최초의 세례식은 이벽의 집(수표교 공동체)에서 거행되었지만, 수표교 공동체와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명례방 공동체도 한국교회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명례방 사건 이후 113년이 지난 1898년에 김범우의 집 인근에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성당 터를 마련한 블랑 주교가 김범우의 집을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동성당이 명례방에 건립된 것은 교회의 시작점에서 교회가 다시 출발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우연이든 의도된 것이든, 명동성당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의미를 되새겨봄직하다.

 

 

블랑 주교와 명동성당

 

명동성당의 부지를 마련하고 성당의 건축 계획을 수립한 사람은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블랑 주교였다. 그는 1876년에 입국하여 서울에 거주하다가, 1877년 리델 주교가 입국하면서 전라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5년 뒤인 1882년 4월 22일 서울로 올라왔다.

 

블랑 주교가 상경하여 머문 곳은 필동(서울 중구 필동)이었다. 블랑 주교는 필동에 거주하며 인성붓재(서울 중구 인현동 2가)에 마련된 집에 학교(인현서당)를 개설하였다. 이 학교는 몇 차례 위치를 옮긴 뒤 1883년 7월에 현재의 명동 가톨릭회관 근처로 이전하여 종현서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서당은 종현 지역에 자리 잡은 최초의 천주교 관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1886년 6월 4일 한불수호조약이 조인되고 전교의 자유가 묵인되었다. 그러자 블랑 주교는 윤정현의 옛집을 비롯하여 종현 지역의 가옥과 대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1886년 6월 15일부터 1889년 6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블랑 주교는 이 지역에 주교좌 성당과 주교관, 신학교, 일반 학교, 고아원, 인쇄소 등을 세워 교회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블랑 주교가 교회의 중심지로 종현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지역의 입지 조건이 성당을 건축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종교 건축의 전통이 지역의 중심지이고, 주변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짓는 것이라고 할 때, 종현 지역은 그러한 입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곧 서울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서울 시내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입지 조건과 함께 이 지역의 교세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1882-1883년도의 교세통계표를 보면, 명동공소의 신자수는 애오개(아현)공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그리고 1883-1884년도 이후에는 서울에서 신자 수가 가장 많은 공소가 되었다. 따라서 블랑 주교는 당시의 교세 상황을 고려하여 종현에 성당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명동성당의 건축

 

블랑 주교는 성당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성당 건축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887년 12월부터 성당 건축을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신자가 참여하여 성당 건축을 도왔다.

 

서울과 근교에 사는 남자 신자들은 무보수로 정지작업에 참여하였고, 여자와 직접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고용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적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각지에서 기부금이 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당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1888년 1월 외무독판 조병직은 공증을 위해 외무아문(外務衙門)에 보냈던 토지 소유권 관계 서류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땅은 국유지이고,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을 내려다보는 곳이므로, 여기에 성당을 지으면 산의 허리를 파괴하여 영희전의 수호신을 어지럽힌다며 공사 중지를 요구하였다.

 

양측이 대립하는 가운데, 블랑 주교는 1888년에 인쇄소 건물을 완공하여 경당과 임시 숙소로 사용하였고, 1890년에는 2층의 주교관 겸 경리부 건물(현 사도 회관)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890년 1월에는 토지의 소유권 서류도 돌려받았다.

 

2년에 걸친 토지 분쟁이 마무리되면서 성당 건축은 재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90년 2월 21일 블랑 주교가 선종하면서 건축작업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1891년 2월 조선에 도착한 뮈텔 주교는 1892년 5월 8일에 드디어 성당의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성당의 설계와 공사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고, 1896년 2월 이후에는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이어받아 성당을 완공했다. 성당의 총 공사비는 미화 6만 달러에 달했는데, 독지가들의 기부금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지원 등이 있었고, 국내 신자들의 애긍과 노력 봉사가 더해졌다.

 

성당이 착공된 지 6년이 지난 1898년 5월 29일 대성당의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이 봉헌식에는 3천여 명의 하객이 참석했는데, 그들 중에는 내부대신 박정양, 외부대신 조병직, 법부대신 이유인 등 조선 정부의 대신들도 있었다. 사대문 안에 성당이 세워지고, 대신들이 대거 참석하여 축하한 것은, 불과 10년 전 성당 건축을 방해했던 사실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신앙의 랜드마크(상징물)

 

종현 언덕에 성당을 짓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신자들은 조선 정부가 가톨릭교회를 인정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곧 성당 건축을 ‘신앙 자유의 상징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조선 정부는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묵인 아래 교회는 신앙의 자유 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고, 명동성당은 그러한 진전의 상징물과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명동성당이 완공된 1898년은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1898년도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젠 지방 순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는 길을 잃을 위험은 없어졌습니다. 지평선 사방을 멀리 굽어보는 우리 성당의 종탑이 우리에게 확실한 안내자의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진을 보더라도 종현 언덕에 세워진 성당은 사대문 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그런데 뮈텔 주교는 신부로서 4년, 주교로서 7년을 서울에서 생활한 분이다. 따라서 종탑을 보고 길을 찾아야 할 정도로 서울 지리에 어둡지 않았다. 그러므로 뮈텔 주교의 말은 단순히 길을 안내한다는 의미보다는, 삶의 올바른 길 곧 하느님께로 이끄는 이정표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1898년의 명동성당은 ‘신앙의 자유를 향한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신앙의 이정표이자 랜드마크’였다.

 

오늘날 서울에는 명동성당보다 높은 건물이 많고, 성당 주변에도 높은 빌딩이 많이 세워져 있다. 따라서 명동성당은 더 이상 1898년 ‘서울의 랜드마크’는 아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그러한 지위를 잃은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명동성당의 본질은 ‘신앙의 랜드마크’에 있다. 비록 시대적인 변화로 ‘서울의 랜드마크’의 지위는 잃었지만, 119년 동안 이어온 ‘신앙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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