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보은의 생을 바친 김대권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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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663

보은의 생을 바친 김대권 베드로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한 사건을 두고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성제인(子誠齊人)이라고 자기의 견해만 유일한 것으로 고집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 견해가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본말(本末)을 휘정거려 놓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곤란한 일이다.

 

예의 경우로 순교자의 행동을 들 수 있다. 혹자는 순교의 행동이 천국에 대한 열망과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물론 순교자들의 세계관이 그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과만 살핀 것이지 과정은 외면하고 하는 말이다. 껑충 뛰어 말한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경천 애인(敬天愛人)의 마지막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과 같은 예가 될 것이다. 순교는 역시 경천 애인의 결단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예의 노래를 들음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죽기까지 사랑한들 만에일을 사랑하소 / 사랑하나 영존(永存)하다 어서많이 사랑하소. / 사랑말씀 다못하나 성심갈력(誠心竭力) 사랑하소 / 진심견망(盡心見望) 열애하면 위주치명(爲主致命) 쉬우리라 / 미운이도 사랑하고 원수라도 사랑하소 / 예도가서 사랑하고 졔도가서 사랑하소 / 애주애인 없는나를 뉘가나를 사랑할고.”

 

이런 일념은 김대권(金大權, 베드로)에게서도 보였다. 그는 충남 청양군 사양면 수단 마음에서 태어났으며 보령군 청나면으로 이사하여 살았던 적이 있다.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믿었던 것인데 그의 가정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신봉했던가 밝힐 수는 없지만, 청양 땅에는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돈독한 신심을 가진 여러 인물들이 보이는 것으로 짐작해서 아마 그 무렵에 입교한 듯하다. 그의 신앙은 부모 손에 끌려서 믿었다고는 해도 어려서는 싹수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장성해서야 비로소 신앙에 눈이 뜨고, 신앙의 은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영혼의 눈을 크게 뜨게 된 것은 민담(民談) 같은 일이 있고서였다. 그는 생계의 일거리를 찾아 공주 땅의 어느 옹기점으로 이사했다. 김대권은 아내와 공방살(空房殺)이 끼었던가 늘 토닥토닥 싸우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뱀을 끌어안고 자는 게 났다 싶었던지 대권은 방에서 자고 아내는 부엌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대권이 막 눈을 붙이려는 참인데 비몽 사몽간에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니 집채만한 호랑이가 아내를 물고 달아나려는 참이었다. 그가 벽력갈이 소리를 지르자 호랑이는 아내를 놓아두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아내는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는 꿈에 하느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은 특별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우의 첫째 본분이 화목(和睦)인데 하물며 부부가 화목하지 못했으니 그냥 놔두실 리 만무했다. 호환(虎患)은 하느님께서 부부가 화목하라고 이르시는 호된 질책으로 깨달았다. 그는 아내에게 통회와 정개의 말을 하면서 호환에서 구출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호환의 교훈을 살과 뼈에 새겨 죽을 때까지 화목하게 살자고 맹서했다.

 

그는 신이 나서 전교에 힘쓰며 성화(聖化)에 몸을 갈았다. 성탄 시기가 되면 산으로 올라갔다. 산만큼 정신을 집중하며 하느님 마음속으로 헤집고 들어가기에 적당한 곳도 없었다. 그는 산에서 성경과 영적 독서로 밤을 새워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곧 삼켜 버릴듯 으르렁대었다. 그러나 바위처럼 앉아 기도를 드리다가 귀가하면 호랑이도 제 굴로 귀숙했다. 산신(山神)의 호랑이도 하느님의 사람을 어찌하지 못했다.

 

사순 시기에는 산에 올라가 기도와 묵상으로 밤을 하얗게 세웠고 끼니라야 밥 한 주먹을 냉수에 말아 소금으로 먹으며 고신 극기를 했다. 그러한 수련은 고통을 즐기거나 고행의 성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까지 하느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체질화하려는 노력이었다.

 

1816년, 그의 아우 야고보(화준)는 대구에서 치명했다. 야고보는 대권과 다른 점이 많았다. 야고보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많았으며 사주 구령에 힘쓰고 수계 생활을 착실히 해왔었다. 그는 청송 땅에서 살다가 체포되어 안동 진영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 참수되었다. 김대권은 아우가 참수될 때 사용한 목침을 처형장에서 가져다가 밤이면 가끔 목침 위에 턱을 고여 보며 죽음을 묵상했다. 그렇게 서서히 순교를 준비했었다.

 

김대권은 어찌어찌해서 전라도 고산(高山) 고을로 이사해 살았다. 1827년이었다. 박해가 남쪽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른 교우들에게는 피신토록 권고하고는 자기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미루적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100명이 넘는 포졸들과 포졸 끄나풀들이 마을을 급습했다. 김대권은 끼니 때 기다리던 밥상을 받듯이 포졸들을 태연하게 맞아 순순히 끌려 고산 아문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전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장은 문초하면서 배교를 종용하다가 견디기 어려운 흥정을 걸어왔다. 배교하면 아들을 풀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처형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을 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내 삶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 있고, 뼈를 부수면 뼈 한 조각 한 조각에 그 생각이 그대로남아 있을 것입니다. 배교하라니 천만 부당한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살과 뼈에 사무쳐 있었다. 순교는 신앙의 도리와 의무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가슴에 사무친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대권이라 해서 어찌 맹수가 무섭지 않고 자기를 죽이려고 광란하는 관원들 앞에서 떨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응당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그는 고신 극기의 수련 생활을 통해서 순교를 서서히 준비해 왔었다. 김대권의 태도에 흥분한 관장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토록 해서 전신을 갈기갈기 터쳐 놓았고 그의 전신에선 피가 봇물처럼 흘렀다. 그러나 줄곧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희색이 만연했다.

 

관장은 천주교를 절멸시키려면 천주교 서적을 모조리 압수해 들이고 신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일망 타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대권이 실토하도록 몹시 닥달했다. 고산 고을에서 끌려 온 신도 수가 240명이 넘게 전주 옥에 갇히자 이 기회에 천주교도들을 발본 색원하려고 신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함구하자 만신 창이가 되도록 고문하여 실신시킨 뒤 하옥시켰다. 김대권은 정신이 들어 참담하게 된 몸을 돌아보며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처참한 처지를 슬퍼하는 통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우리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죄를 끊겠다는 통회의 눈물이요, 그 사랑에 감읍하는 눈물이었다.

 

사람은 혈육의 정 앞에 가장 약했다. 관장은 그런 약점을 이용하려고 대권의 아들을 그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배교하지 않으면 아들의 목을 찌르겠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목숨을 구걸하며 비굴하게 사는 삶을 아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가 배교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하자 아들은 귀양보내고 몇 차례 주뢰를 틀고는 전라 감사에게 넘겼다. 전라 감사는 염라졸 같은 나졸 80명을 거느리고 문초를 시작했다. 그러나 선불 맞은 호랑이 뛰듯 하는 감사 앞에서도 예수님과 단 둘이서만 있는 사람 같았다. 예수님은 그의 삶의 전부였다. 예수님의 삶을 안다는 사실은 바로 구원이었다. 그에게는 예수께 받은 은혜에 대한 보은 외에 다른 일이 없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은혜를 털끝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며, 보은의 길은 순교뿐이라는 사실에 점을 찍었다. 그의 개심은 일찍이 틀린 사람이었다.

 

전라 감사 이광문은 이런 신도들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무한정 옥에 방치해 두고는 굶주리다 제풀로 죽도록 했다. 김대권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13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되어 죽을 날을 기다렸다. 1839년(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에게 사형이 통보되었다. 이제 비참한 육신의 조건에서 벗어나게 되는 마지막 해방의 소식이었다. 옥중의 신도들은 기뻐 용약하며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렸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은 마침 서문 밖 장날이었다. 장꾼들의 눈총을 받으며 숲정이 형장으로 다른 네 동료와 함께 끌려갔다. 그리고 승천의 은혜를 입었다. 하느님께 최후의 보은을 한 것이다.

 

[경향잡지, 1989년 8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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