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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고문주의를 이겨낸 박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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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658

고문주의를 이겨낸 박취득

 

 

매 위에 장사(壯士) 없다고 한다. 범죄 수사에 흔히 고문이 횡행하는 것은 그런 심리를 헤아린 것이다. 더구나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된 사상범의 경우에는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신체에 직접 물어 보는 고문(拷問)을 비법으로 삼는다고 한다.

 

고문은 요새만 있는 일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고문주의자들의 밥이 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고통 속에 그 대상과 정이 깊어지듯이 순교자들은 고문을 받으며 믿음의 심지가 폐부와 뼈 속으로 깊이 뿌리 내렸다. 박해의 역사에는 18개월 동안 열대여섯 번의 신문을 받으며 집게로 살이 뜯기고 1400여 대의 모진 치도곤을 맞고도 죽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버텨 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였다.

 

그는 홍주목(洪州牧救 · 홍성) 사람으로 지홍(池洪[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영세했다고 한다. 지홍이라면 중인 계급 출신으로 한국 교회 창설 초기에 정약종, 홍낙민, 최필공 등과 함께 전교 활동에 심혈을 쏟았고 주문모 신부를 영입했다는 죄목으로 1795년에 순교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박취득이 영세한 것은 지홍이 전교 활동을 한창 전개할 때였을 것이다.

 

박취득이 박해의 불길에 목숨을 걸고 부탕 도화(赴湯蹈火)한 것은 1791년의 일이었다.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거부한 사건이 있은 후 정부는 천주교 금교령을 공식화하고 전국에 천주교도 수색령을 내렸다. 충청도가 무사할 리 만무했다. 1788년 유생 홍낙안은 충청도 서부 일대에 거의 집집마다 천주교 서적이 전파되어 읽히고 있는데 언문으로 번역하고 베껴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쳤다며 아우성을 쳤었다. 홍주목 면천군(沔川郡)에는 여러 달째 교우들이 갇혀 있었고 그 중에는 박취득의 형 일득(一得)도 있었다. 면천은 충청도 내포 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의 전교 활동으로 다른 지방보다 신도 수가 훨씬 많던 곳이었다.

 

수감된 신도들은 내포 지방 신앙 공동체의 특징이 농민 중심의 교회였음을 미루어 보아 내일의 시야가 불투명한 희망 없는 농민들이었고, 박취득 역시 농민이었음이 뻔하다. 그는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관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무죄한 백성을 고문하고 오랫 동안 투옥한 처사를 규탄했다. 목민관(收民官)은 천권(天權)을 대행하므로 옥사를 다루는 데 인명을 중시하고 신중하고 공평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했다. 박취득은 목민관의 부당한 형정(形政) 집행에 항의한 것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정약용은 고문주의를 지양하는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했다.

 

박취득의 항의는 고기가 가마솥에 뛰어든 꼴이 되었다. 그는 중죄인으로 옥에 갇히고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사건이 이렇게 되자 그의 덕망을 우러러 쫓던 면천 고을 민중들의 소요가 일어나 관장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관장은 이 사태가 농민 저항 운동으로 비화될 것이 두려워 형벌의 집행을 중단하고 박취득을 먼 고장으로 추방시켰다.

 

1797년 여름에 들어 충청감사 한용화의 천주교도 소탕령이 내렸고 홍주 고을에 박해가 일어나자 박취득을 지명 수배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하거나 영웅심에 방자하거나 자만심에 경박한 속물이 아니었다. 그는 하늬바람에도 부러지기 쉬운 갈대처럼 심약(心弱)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피신했었지만 아들이 대신 인질로 끌려가자 사세 부득하여 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하여 관아에 자수했다. 법정은 배교와 순교를 선택하는 신앙 고백소였고 그 결단에는 연옥이 있을 수 없었다.

 

관장의 심문은 정부 당국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따랐다. “너는 네 부모와 국왕과 관장들을 무시하고 남의 아내를 범하고 재산을 쓸데없는 데 낭비하며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데 어찌하여 인륜을 어기느냐?”는 것이다. 정부는 일찍이 천주교가 ‘무부 무군’(無父無君)을 주장하고 ‘통화 통색’(通貨通色), 곧 신앙을 돈으로 매수하고 남녀가 집단 혼음(混淫)하는 패륜아들의 집단으로 단정하였다.

 

가장(家長)인 아버지, 나라의 아버지인 임금, 백성의 아버지인 고을 관장보다 천주를 ‘우주의 대왕[大君], 인류의 아버지[大父]’인 절대권자로 내세우는 것을 권위주의 사회가 용납할 리 만무했다. 설사 십계명에서 부모와 어른과 임금과 관장을 공경하도록 가르쳤다 해도 첫째 계명이 아니라 네째 계명에 불과했으니 효와 충을 절대 가치로 강조하던 국가의 입장으로는 나라가 공중 분해되는 심경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통치자라야 한갓 피조물이며 “집과 같은 육신”을 다스리지만 천주는 “주인 같은 영혼”을 다스리는 분이시니 견줄 바가 못되었다. 그리고 ‘통화’를 어리석은 낭비라 하여 비난하지만 신도들이 서로 가진 바 재물을 함께 나누는 자선 행위는 천주의 사랑을 인간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현장이었다. 남녀가 하늘 땅처럼 유별하던 사회에서 남녀의 차별 없이 한자리에 섞여 집회를 갖는 것이 영락없는 ‘통색’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하고 복종하는 언어로 일생을 살아가던 여인들에게는 그곳이 신천지였다.

 

잡초처럼 짓밟히며 살아가던 민초들에게 종말은 슬픔도 절망도 아니었다. 새로운 삶의 출발이요 희망이었다. “세상이 끝날 때 모든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는 양반과 서민, 임금과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모든 연령층의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주 성자 앞에 모일 것이고, 그 분은 과거와 당시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주 예수와 그의 성인들과 함께 천당에 올라가서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즐거움보다 천만 배나 더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악한 사람들은 발밑의 땅이 꺼지며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잠겨 이 세상의 괴로움보다 천만 배나 더 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신념이 곤장에 풀죽이 되었지만 그의 말에 힘이 있게 했다.

 

조상 제사의 금령을 좇는 것은 교회의 권위에 맹종함이 아니었다. 그는 금령의 타당성을 분명하게 배웠다. “죽은 부모의 제사하기를 정성으로 하게 하니 그 뜻인즉 사사 추원지의(追遠之意)로 예(禮)를 생각하고 먼 데를 미루어 죽은 부모 섬김을 산 부모같이 함이나 진실로 무형 무상(無形無相)과 유형 유상의 적당함을 모르고 유형한 음식으로 무형한 부모에게 축문하여 권하니 욕됨이 심하고 또한 범죄하는 줄이야……”(三悳略說).

 

무서운 고문이 막(幕)처럼 바뀔 때마다 무대 저편에서 접속곡으로 이런 노래가 진양조로 들리는 듯했으리라. “상주(上主)사랑 어찌하노 군부(君父)같이 사랑하세, 효자문에 충신나니 부모같이 임군공경, 이도또한 하려니와 대군대부 먼저충효, 상주계명 준행하고 상주성의(聖意) 승순(承順)하여, 갈력지효(竭力之孝) 효자되고 진명지충(眞命之忠) 충신일세”(충효가). 천주의 효자만이 순교할 수 있고 그 나라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노래는 이어졌다. “너희마음 돌아보라 무엇으로 효양(孝養)하뇨, 선덕(善德)으로 효양하냐, 의식(衣食)으로 효양하냐, 견마(犬馬)들께 이르러도 기를줄을 다알거든, 양구체(養口體)만 다만알고 효경지도(孝敬之道) 아니하니, 육축(六畜)에서 다른것이 무삼것이 특별하냐, 생시효도 아니하고 죽은후에 제(祭)만하면 그만하면 효라하며 그만하면 예(禮)라하랴”(사향가). 옳거니 이 노래를 자식에게 전수(傳受)시켜야겠다. 그 노래에는 내 불효의 자성(自省)이 있고 자식에게는 내 전철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막아 줄 각성이 있었다.

 

배교를 재촉하는 관장에게 자기의 결의를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고향에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까.” 사람이 일생 동안 빈궁 재화를 겪는다 한들 몇 해까지 근심하며 부귀 영화를 얻는다 해도 도대체 몇 해까지나 즐기겠는가. “세월은 부시로 치는 돌에서 튀어나오는 불똥같이 길지 못한 세월이 아닌가.” 이승이 전부인 줄 알고 현세에 포박되어 안달복달하는 꼴이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스운가. 뜨거운 국물도 목구멍에 넘어가면 잊혀지는 것, 고문이 지독해도 참고 견디자, 관장과 포졸들은 그의 기개를 꺾을 요량으로 잔인한 형벌의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쌌다. 그러나 “열심사주(事主) 예비하여 엄형고초 달게받소, 예수고상 성교도리 많이많이 생각하소, 죽기까지 맞더라도 오천사백 다못맞네, 전능천주 대부모를 한사(限死)하고 공경하소.” 이런 노래가 갈대같이 흔들리는 의지를 버텨 주었다.

 

박취득은 마지막 그 때가 왔음을 예감했다. 그는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마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의 옥중 편지를 읽는 듯한 감회를 주고 있다. 거기서 순교의 결의는 십자가의 추종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핏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흐리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하는 좌표요 희망의 보증이었다. 그는 1799년 2월 29일 새끼줄에 목이 졸려 30여 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대의 사람은 그의 순교를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의 육체가 그렇게 오랫 동안 형벌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와 자비에 알맞는 동기로 어떤 위대한 본보기를 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고통은 우리 모두가 살며 견뎌 내야 하는 맥박이요 상식이다.

 

[경향잡지, 1989년 3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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