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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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14 ㅣ No.655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30여 년의 군정이 종식되고 문민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이 땅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개혁과 변화의 깃발을 올린 현정부가 벌이는 일련의 사정 작업을 보면서 그 동안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온 교회는 무엇을 했는지 자책하게 됨은 물론,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2백여 년이 넘게 자라난 큰 교회이고, 기형적인 사회 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적응하느라 길들여진 교회를 어떻게 쇄신시켜야 할지 염려하다 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과거 우리 나라의 정치 구조와도 같이 획일화된 제도나 성직자 중심으로 이끌려 온 교회라면 의외로 쇄신 작업은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왜냐면 교회의 윗물에 속하는 주교나 신부가 변화되면 교회 전체의 변화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회의 쇄신이 절박한 이 시점에서 두 번째 방인 사제가 되신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애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 지방의 다래골에 사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꼬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사이에서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새터로 불리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신앙 때문에 자주 이사해야 했던 부모님을 따라 이곳저곳 옮겨 다녔고, 1836년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15세 때 마카오로 떠난다. 그곳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경리부와 요동, 몽고 땅 소팔가자 교우촌 등지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한다.

 

1844년 소정의 신학 공부를 마친 최양업과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에서 부제품까지 받지만, 교회법이 요구하는 만 24세가 되지 못해 사제품은 받지 못했다. 1846년 1월부터 네 차례나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와 1849년 4월 15일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후 육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요동으로 가지만 요동교구 부주교인 베르뇌 신부의 뜻을 따라 사목 활동을 하다가, 1849년 12월 혹독한 추위로 보초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변문을 통과하여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다. 실로 13년 만의 귀국이요, 수년 동안 다섯 번이나 육로와 해상으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이뤄진 결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더욱 험난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조선 팔도에 유일한 방인 사제로서 자신의 관할 구역을 사목하기 위해 해마다 5000리가 넘는 먼 길을 순회해야 했다. 130여 개에 달하는 교우촌을 순회하기 위해 피로와 궁핍은 물론 추위와 체포의 위험, 외교인의 습격 등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던 그는,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새재에서 겹친 과로로 순직하게 된다. 최양업 신부와 절친했던 페롱 신부의 서한 제8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방금 토마스 신부님의 복사가 내게 와서 신부님의 사인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신부님은 단지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사실 작년의 소란(경신 박해)으로 그분의 성사 집행이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루에 80리에서 100리나 다녔습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곤 했습니다. 나흘 밤 동안 계속해서 과중한 일을 하고 나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정도였습니다’”(1861년 7월 26일자 서한). 결국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과 교우들을 돌보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헌신하던 최양업 신부는 11년 6개월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친 것이다.

 

 

시대적 상황

 

최 신부가 환국하여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철종 치세(1850~1863년)와 맞물리는데, 이때 공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사적인 박해는 계속되었다. 당시의 사회는 양반과 상민의 신분 계급이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던 사회로서 계속되는 자연적 인위적 재난으로 인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관원과 지방 두목, 포졸, 양반들이 다 같이 약탈자뿐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일년 내내 일하고 노력하지만 정부 관리들의 탐욕을 겨우 충족시킬 뿐입니다”(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설상 가상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쫓기는 신세였고, 그만큼 더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 “교우 촌락을 두루 순회하며 빈민들의 불쌍하고 궁핍한 처지를 목격할 때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나를 원망합니다. 저들은 정부의 학정에 시달리고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무기력합니다. 동포들의 박해, 부모들의 박해, 부부간의 박해,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고 3년이고 간에 마음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사목 활동과 저술

 

최양업 신부는 입국하자 마차 6개월 동안 5000리를 순회 사목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비참한 교우들과 동고 동락하였다. 그가 담당해야 하는 지역은 경기 충청 전라 강원 경상도 등 5개도에 달하며, 해마다 10월경 순회를 시작하여 이듬해 6월경에 마치고 장마철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성교공과” 등의 번역이나 저술 활동을 하였다. 1851년 127개의 교우촌을 돌보았고, 1853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그들을 간호하면서도 전국 각처에 소재한 1만 2000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최 신부는 한 해 동안의 사목 활동을 매년 9~10월에 르그레주아, 리브와 신부 등 은사들에게 보고하였다.

 

박해 이전에는 예비자 증가가 절정에 이르러 그의 관할 구역에서만도 1000명에 달했고, 교우들의 신앙심도 출중하여 경문과 문답을 배우는 데도 아주 열심하였다. 그러나 대규모의 박해로 천주교에 대한 외인들의 인식은 물론이요, 예비자들의 마음까지 뒤흔드는 상황이 되었고, 콜레라나 기근 등으로 사회가 궁핍과 고통에 빠진 상황에서도 최 신부는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박해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교우들이 둘이나 셋밖에 없는 공소도 절대 거르지 않았으며, 또 교우 집이 다섯 집밖에 없는 공소를 찾아가기 위해 사흘 길을 걸었고, 다음 공소로 가기 위해 700리를 걸었다.

 

최 신부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선교사들에게 지역 특성에 맞는 사목을 해줄 것을 당부했고, 페레올 주교의 그릇된 처신과 선교사들의 우월주의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의 악화된 건강이 자신의 부덕에 기인함을 고백하는 겸손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주요 저술로는 그가 은사 르그레주아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9통의 서한이 있고, 아직 친저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러 편의 “천주 가사”(“경향잡지” 1991년 5월호 참조)가 있다. 그의 서간은 당시의 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영성과 사목 방향에도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것이다. 이 밖에도 최 신부는 이미 1847년 부제 시절 홍콩에 머무르는 동안 치명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1860년 사본 문답을 준비했고, “천주성교공과”도 번역하여 신자들의 기도 생활을 도왔다.

 

 

사상과 영성

 

최양업 신부의 서간들 속에서 쉽게 발견되고 자주 눈에 띄는 사상과 영성은 인간 평등 사상과 겸손을 토대로 하는 애주 애인, 그리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길 바라는 순교 정신을 들 수 있다.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된 초창기에는 주로 남인 계통의 선비들이 앞장서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계속되는 박해로 점차 신자 계층이 당시 사회 속에서 피지배 계층에 속하는 중인, 상민, 부녀자들로 바뀌게 된다. 최 신부는 누누이 양반 제도의 폐습을 거론했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되므로 배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 나라의 백성의 제도가 좋다고 합니다. 즉 양반의 모든 권리를 인정할 것이요, 상민은 양반에게 복종할 것이며 자기 처지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 하에서는 우애와 애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간 존엄성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천덕꾸러기로 억눌리게 마련입니다. 인권 유린은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의 편을 드신 반면 교만한 사람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을 엄히 다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양반 제도는 인도의 브라만 계급과 같은 고질적 제도라고는 할 수 없고, 가르치고 계몽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신분이나 권좌에 사람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이나 성분을 고려하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보고 채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1857년 9월 15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는 이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가 양반 출신 교우들을 가까이해서 교우들의 원망을 사고 있음을 통탄하고 있다. 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신부께서 우리 나라 실정과 풍속을 미리 파악하셨다가 조선으로 파견되는 신부들에게 이런 지식을 넣어 주어, 조선에 온 후에 민중의 감정을 해침으로 전교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상동).

 

겸손에 대한 그의 영성은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된 그의 숨은 생애와 순교자적 죽음 속에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는 신학생과 부제 때에 자신이 겪는 고난과 역경이 조국의 동포들이 당하는 박해와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좀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언제나 나도 신부님들과 내 동포 형제들이 겪는 고난과 수고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을 기워, 구속 공부를 완성할 수 있을까요”(1844년 5월 19일자 서한).

 

그는 늘 무엇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가를 분별하여 오직 주님을 위해 일하며 주님의 섭리대로 이루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영성은 장상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4차 입국 실패 후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오 거룩한 운명으로 내가 붙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나는 나의 전교 지방에 가 있거나 또는 우리의 아버지(성부)를 따라 다른 세계(천국의 빨마가지 위)에 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않고 다만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행하려 합니다”(1849년 5월 12일자 서한). 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순종은 하지 않고 참된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페레올 주교의 잘못된 사목 방향과 양반층과 결탁된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해 직언한 일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타고난 심성이 차분하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최양업 신부가 그토록 놀라운 사목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토록 깊은 영성과 탁월한 지성을 밑바탕으로 하여 올바른 판단과 이를 실천하여 민족의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뜨거운 열망과 확고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신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상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모범적인 사제의 삶을 보여 주고 있고, 2000년대를 향하는 한국 교회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시대의 아픔과 혼란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에 의탁하며 선구자적 길을 걸으신 최양업 신부는 난공 불락과도 같은 당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하여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봉건 제도와 만민 평등을 저해하는 양반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그릇된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 전력했다. 또한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배우기 어려운 교리와 기도를 쉽게 생활 속에서 익히도록 “천주가사” 등을 만들어 토착화에 앞장섰으며, 한 마리 양도 잃지 않기 위해 몇 십리 길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겸손된 열정으로 사셨으니 우리에게 이런 사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십 평생의 짧은 생애지만 누구보다 큰일을 하신 최양업 산부를 장상인 베르뇌 장 주교는 그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서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그렇게도 소중한 유일한 본방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은 성사 집행 후, 내게 자기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2년 간 거룩한 사제의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월주의 사고 방식에 젖어 그릇된 태도를 지닌 서양 선교사들에게 어렵지만 우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최 신부가, 오늘의 교회를 책임진 후배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실지 함께 생각해 보길 바라며, 그분의 영성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되살아 나길 간절히 바란다.

 

[경향잡지, 1993년 7월호,  배은하 타대오(성지 배론 순교자들의 집 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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