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성체성혈 대축일 강론

스크랩 인쇄

김기환 [kkh8638] 쪽지 캡슐

1999-06-01 ㅣ No.113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이다. 우리는 미사때마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모신다. 그리고 하얀 밀빵과 포도주가 미사중에 사제의 축성을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고 있다. 미사중에 변하는 예수님의 몸과 피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우리 신앙인들은 믿고 있다.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라 하면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 과학보다는 우리의 신앙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 강론에서는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가를 말씀드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몸과 피로 변해야 하는가. 또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 무슨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함께 묵상해보겠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이 들고 사랑이 싹트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끼리는 전화로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로 서로 통신을 주고 받는 것이 발달되어 있어서 컴퓨터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서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그러나 아무리 자주 서로 전화하고 편지하고 하더라도 직접 상대방과 함께 있는 달콤함에는 견주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의 힘은 몇 백통의 편지 교환이나 하루에도 몇시간 씩의 전화통화와도 비길 것이 아니다. 함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서로 아무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한다.

 

또 한가지 예를들면 어떤 학생이 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한다고 치자. 자기 반에서 대표로 농구선수로 뽑혔다. 이 학생은 아빠나 엄마가 와서 응원을 해주면 참 좋을텐데 두 분다 멀리 다른데로 비즈니스 관계로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오지를 못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학생들도 휴대폰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휴대폰을 통해서 두 부모는 시합 직전의 학생에게 "열심히 해라. 엄마 아빠가 기도할게. 사랑한다"라고 응원과 격려의 말을 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도 엄마나 아빠가 그 자리에 나와주는 것에 비길 수는 없다.

 

성체성사의 신비도 그와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진짜 몸과 피로 변함은 우리 인간들과 구체적으로 함께 계시고 싶어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의 사랑도 구체적으로 육체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추상적인 언어와 말장난 속에서만 표현된 사랑은 힘이 없고 공허하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도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빠가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라고 전화를 통해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농구시합에 직접 나와서 응원해주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끼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가까운 관계는 역시 "혈육(피와 살) 관계"이다. 피와 살을 나누는 관계는 생명을 나누는 관계로 가장 끈끈한 사랑의 관계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와 엄마의 관계이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와 엄마는 글자 그대로 피와 살을 나누는 "혈육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때 태아와 엄마는 자칫 잘못 떨어져 버리면 어느 한쪽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완벽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엄마는 아기를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하고 있고 아기에게 엄마는 이 세상의 전부이고 유일한 사랑의 원천이다. 아기와 엄마사이에 연결된 탯줄을 통해 아기는 엄마의 피와 살을 공급받는다. 이때 엄마와 아기 사이에 오가는 것은 단순한 피와 살이 아니라 지고한 엄마의 사랑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기 사이의 사랑의 대화요 나눔이다. 또한 엄마가 피와 살을 통해서 아기가 자랄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이다.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엄마는 자신의 피와 살을 아기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이 아기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우쭐해하지 않는다. 엄마의 피와 살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아기가 건강하고 예쁘게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실려 있다.

 

하느님이 성체와 성혈 즉 예수님의 "혈과 육"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미사중에 받아 모시는 우리 인간은 바로 엄마 뱃속에서 피와 살을 통해 생명을 키워나가는 아기처럼 하느님의 자궁 속에서 피와 살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우리들에게 공급되는 피와 살은 예수님의 몸과 피요, 탯줄은 바로 성령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보통 관계가 아니다. 바로 아기와 엄마처럼 "혈육 관계"로 맺어져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하느님과 혈육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체와 성혈의 신비의 내용이리라.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성체에 대해 지극한 공경을 표하는 것도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 구체적으로 거기에 현존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체와 성혈에 대한 공경은 성체를 모셔다 놓고 혹은 감실 앞에서 열심히 기도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또한 미사중에 성체받아 모실 준비를 잘 갖추고 성체를 열심히 받아 모시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지가 않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성체 앞에서 드리는 공경은 사실 성체 그 자체에 대한 공경과 사랑의 표현이기 보다는 내 자신의 필요성과 원의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대부분이다. 냉철하게 한번 반성해보라. 성체를 모셔두고 혹은 영성체를 한 후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성체에 현존해계시는 그리스도께 열심히 청하고만 있지 그것은 진정한 성체 공경이 아니다.

 

예를들어, 노부모를 모시다 보면 때로는 부모님이 마음 편하신대로 또는 부모님이 원하시는데로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부모 공경이 될 때가 있다. 자식들이 - 남들이 보기에는 - 아무리 잘 해드리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모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노부모에게는 그것이 귀찮은 간섭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부모님을 짜증스럽게 해드릴 수 있다.

 

그러면 진정한 성체공경이란 무엇일까? 성체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성체공경이 아닐까. 그러면 가장 훌륭하고 효성지극한 성체공경은 예수님이 자나깨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맨날 성체 앞에서 살다시피 성체조배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영성체를 한다하더라도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성체공경은 헛된 노력일 수 밖에 없으며 어떻게 보면 성체를 욕보이는 성체모독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맨날 성체 앞에서 자기 원하는 것만 비는 신앙인들의 성체공경은 알맹이 없는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그러한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 간청하고 계실거다. "제발 내가 원하는 것 좀 해주라. 나를 공경한다는 명분으로 쓸데없는 것들만 자꾸 하지 말고..."

 

우리는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맞아서 성체와 성혈이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참된 성체공경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안동교구  김 기 환 신부



1,3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