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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평신도 단체 활동의 새로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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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43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평신도 단체 활동의 새로운 시대

 

구즈만 M. 까리퀴리 레쿠르(교황청 평신도 평의회)

 

 

약 20년 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보편 교회 안에 “단체 활동들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가리키시며, “전통적인 단체의 형성과 더불어, 때로는 바로 그 전통의 뿌리에서부터 특별한 형태와 목적을 지닌 새로운 운동들과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조성하시는 자원은 극히 풍부하고도 다양하며, 우리 평신도들의 창의력과 헌신적인 역량 또한 위대한 것입니다.”(n.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섭리는, 수많은 카리스마들의 개화와 더불어 교회의 생명을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다양한 교육방식과, 공동체적 형태와, 선교적 열정에 따라 이런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들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미 예고했지만, 불행히도 만연한 세속화의 과정 때문에 한 켠에 밀려나 있던 교회의 첫 봄의 가장 의미심장한 열매들 중 하나”를 보셨습니다.(1998년 5월 28일) 그것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희망의 이유입니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또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이런 새로운 교회적 현실들을 “하느님의 섭리”로 곧, 이 역사적 시점을 위한 하느님 계획의 표지이며 결실들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 교황님께서 이런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을 받아주시고, 칭찬하시고, 인정하셨으며, 그들이 - 두 분께서 거듭 말씀하신 대로 - “역사의 오늘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그 긍정적 능력 전체를 여전히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안전한 새로움”임을 확신하셨습니다.(1984년 4월 30일, 2008년 5월 18일)

 

위대한 아시아 대륙의 주교님들은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가르침에 대한 친교 속에서 이 새로움을 잘 거두고 맞이할 줄 아셨습니다. 실제로, 1998년 14일에서 18일까지 바티칸에서 있었던 아시아 주교 시노드 특별 회의의 건의안을 받아들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노드 후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에서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희망의 확고한 근거는 더욱 잘 양성되고 열성적이며 성령으로 충만한 평신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특별한 성소에 대하여 점점 더 깊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평신도 교리교사들은 특별한 찬사와 감사를 받을 만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성령 운동과 사도적 활동들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과 가정 그리고 남녀 평신도들의 양성에서 새로운 힘과 활력을 줍니다.” “인간의 품위와 정의의 증진에 이바지하는 교회 단체들과 운동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로마 8,15-16참조)에 대한 복음 메시지의 보편성에 쉽게 접근하도록 해주며 확실하게 해 줍니다.”(n.9)

 

이에 대해 아시아 주교님들이 잘 깨닫고 계심을 볼 수 있는 최근의 표지는, “교회 운동들의 역할과 아시아에서 지니는 사명”에 관해 2010년 1월 24일에서 6일까지, 태국 파타야에서 열렸던 아시아 주교 연맹(FABC)의 세미나였습니다. 이 세미나의 “최종 선언문”에서 참가자들은, 이 운동들이 “교회와 현대 사회 속에 성령의 쏟아짐”이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주시는 선물들을 포함하지 않고는 우리 시대 교회의 생명을 상상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제안하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메시지를 되풀이하였습니다. 이 “최종 선언문”은 그런 운동들이 교회의 체험을 쇄신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기 있게 하고,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선교를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개인과 공동체의 생명에 많은 축복을 불러왔음을 인정합니다.”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신자들의 단체가 여러 다양한 형태들을 따라 이루어져 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n.29에서 읽을 수 있듯이 - 평신도 단체들은 어떤 의미로 지속적인 하나의 선을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여전히 활발한 “재속삼회”나 다른 형제적 연대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백 년 이상이나 여러분의 교회 안에서 레지오 마리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의 훌륭한 업적들이 알려져 있으며, 수십 년 이상 가톨릭액션도 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은 “평신도 사도직이 지닌 조직적 형태들의 중요성”을 “인류와 교회의 요구에 대한 효과적 대응”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전 세계적 차원으로 단체들의 발전을 권장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평신도 교령 18,19) “평신도 단체들의 새로운 시대”는 보편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의 발전을 증거 합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꾸르실료, 마리아 사업회 (포콜라레), 가톨릭 성령 쇄신운동 (다양한 공동체와, 봉사와 기도 모임의 형태로), CL (친교와 해방), 성 에디지오 공동체, 또한 네오까떼꾸메나도 공동체와 같은 교회 현실들,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현재 존재합니다. 이런 현실들 중 대다수가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태어났으며, 일부는 미국에서, 또 최근에는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국가에서 “그리스도의 부부들”과 “젊은 예수 운동”등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가톨릭적 현실들입니다. 곧 그 본질과 목적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여러 대륙과 문화와 상황 속에서 교회의 다양한 육화의 형태로 계속 자라나고 있습니다. 교회 운동과 새 공동체들을 탄생시킨 카리스마는 지역 교회에 한시적으로 머물지도 않고, 해당 문화의 테두리에 갇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탄생시키는 그리스도교 체험은 다양한 영토, 사회 문화 분야를 아울러 여러 지역교회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들의 진정함과 결실을 맺는 능력은, 다양한 배경과 연령과 기질과, 사회 문화적 환경과, 인종 국적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교 체험을 살도록 도와주는 능력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라칭거 추기경님께서 여러 기회를 빌어, 왜 이런 단체들이 언제나 보편적인 사도의 사명에 협력하고, 특별히 세상 끝나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고, 모든 나라에 세례를 주어야 할 사도적 의무(참조 마태 28,18) 속에서 베드로가 지닌 직무에 협력하는 새로운 선물인지를 설명하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2006년 6월 3일, 온 세상의 교회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을 위한 국제 대회 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문을 열어, 교황이 지닌 보편 사도 직무에, 더 많이, 더욱 더 많이 협력해주도록 당부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여러 교황님들로 하여금 “평신도 단체들의 새로운 시대”가 지닌 “하느님의 섭리”의 본질을 인정하게 했던 이유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아주 함축적으로 또 선명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자신이 받은 세례가 주는 신분과, 성소와, 또 교회와 세상 속에서의 사명에 대해 깨닫고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야할 필요는 너무나 큽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갈구도 아주 큽니다! 그리고 여기에 운동들과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 있습니다....여러분은 하느님이 섭리하신 대답입니다.”(1998년 5월 30일) 그들은 나름대로의 카리스마와 교육방식 덕분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기쁨,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남녀들의 새로운 세대를 낳아 키우는 ‘모태’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느님의 섭리는 솟아오르는 카리스마들로 우리 시대의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카리스마라는 것은, 함축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선물(gratia gratis data)로써(참조 1코린 12,4-11), 교회 건설에 유익하게 쓰일, 신앙의 유일무이한 체험을 시작하도록 특정한 시간에 일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카리스마에 대해서 만일 그들이 주님이신 예수를 선포하고(참조 1코린 12,3),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하는데 이바지하며(참조 1코린 12,7; 12,22-27),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선물을 간직한다면(참조 1코린 13,12; 2코린 6,6; 갈라 5,22)그들이 하나의 성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을 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들은 정신을 열고, 주님을 만나 그분의 제자가 되는 새로운 길을 향해 의지를 움직입니다. 카리스마들을 통해서, 인간적 만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사람들에게 이르며,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과 심장과 지성과 자유를 건드립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마치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첫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다정하게 마음을 설득시키는 능력을 지닌 진정한 현존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단체들은, 그리스도 사건과 역사 속 그분의 신비인 ‘교회’가 움직이고, 교육하고, 설득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수단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운동들 안에서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주저하거나 어려워하며 망설이지 않고,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차분히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증거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제안이 지닌 본질과, 단순함과 신선함을 발견합니다. 카리스마들 덕분에, 교회의 친교 안에 머무는 단체와 운동들 속에서, 복음의 극단성, 신앙의 객관적 내용과 살아있는 전통의 흐름이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한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로써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든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놀랍고도 신선하며 매력적인 만남을 통해 시작되므로, 이것은 “섭리적”입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 쓰신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의 진정한 얼굴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그분을 배척하고 그리스도교의 증거를 볼모로 잡고 있는 세상의 환란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시도록 더욱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은 친교의 신비로 이해하고 체험한 교회에 소속된다는 의미를 교육하기 때문에 또한 섭리적 입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친교의 학교이며,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주님 제자들의 위대한 가족의 핵심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전달하신 진리와 사랑 안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여정을 함께하는 단체들이다.”라고 정의하셨습니다. (2006년 5월 22일) 그리고 이전에 조셉 라칭거 추기경으로서 쓰신 인터뷰 “땅의 소금”과 “살아있는 세포들” 안에서, “작은 하나의 현실 속에서, 교회의 위대하고도 생생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함께 하는 여정, 참된 삶의 학교를 지지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이런 새로운 현실들이, 교회가 자신에게 균등하게 본질적인 교계제도와, 성사와, 카리스마의 선물들을 통해 세워졌으며, 언제나 그들을 통해 쇄신된다는 사실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키워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은, 만민 선교 “missio ad gentes”에 대한 책임감과 의욕으로 활동하므로 “섭리적”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남아도는 부분이나, 판매전략 혹은 광신적인 강제 권면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의미와 방향과 새로운 맛과 약속의 완성을 주신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입니다. 그 속에서 체험하는 건 너무나 참되고, 아름다우며, 선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삶과 운명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모두의 자유 속에서 그것을 제안하도록 우리를 재촉하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신원을 단단히 뿌리 내리는 것이 자기 보호를 위해 자신을 닫음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흔치 않은 선물을 전달해주는 사람들로서, 생활의 모든 분야와 여건들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계산하지도 않으며, 명백히 존재하고 눈에 드러나게 하는 상황이며, 나날이 새로워지는 의욕입니다. 그 때문에, 긍정적인 대응은 모든 만남을 증가시키고 깊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운동들은 복음화의 주체이며, 다른 교파와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면서, 우정과 기도를 체험하는 그들의 넓은 활동범위 속에서, 위대한 유일신의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과 다른 종교 전통을 지닌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 존재하는 종교적 의미를 귀하게 여기며, 마찬가지로 모든 문화를 향해 열린 대화를 유지하며, 우상숭배나 비뚤어진 근본주의를 배격할 줄 아는 교회일치운동의 촉진제가 됩니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은 선과 진리의 모든 흔적과, 위대한 신비의 모든 개념과,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과 소망을, 곧 계시의 완성이시며, 단 한분이신 하느님, 유일한 중재자, 유일한 우리 주님, 유일한 구세주의 참된 얼굴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귀하게 여깁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개인과 공동체와 교회 제도가 지닌 참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곧 “아시아의 문을 그리스도께로 여는” 그들의 “ad gentes” 선교열정으로서, 그것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며 가장 고귀한 섬김입니다.

 

거기다,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의 선교적 모멘텀은 본당들로 하여금, 특별하고 에피소드적인 활동이 아니라 “보통 사목 활동”의 지속적인 태도를 지니고, 선교적이 되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일상의 리듬에 파묻혀 지지 않고, 계속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또 인류의 생명과 운명을 위한 그분의 수난으로 일깨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종탑의 편안한 그늘을 떠나 여러분에게 맡겨진 구역과 사람들의 몫 가운에서 선교의 공적이고, 눈에 보이는 능동적 표지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웃들의 거리에 살며, 그들의 요구를 듣고, 가난한 이와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우선적 사랑으로 그들을 환영하며, 학교와 병원과, 일터와 놀이터에서 사목적 보살핌을 펼치라는 부르심입니다. “본당은 본당 밖에서 자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말씀하셨으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성전과 제의실의 벽 속에 갇혀버리는 현실에 대한 해독제로써 본당의 “자기 초월”을 말씀하십니다. 선교의 열정은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테두리를 벗어나, 멀리 있는 사람들, 여전히 길 잃은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 진짜 “missio ad gentes”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증진하기 위해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본당과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 간의 멋진 협력을 위한 기회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평신도 단체들의 새로운 시대 - 여러분의 모든 단체와 운동과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 를 가리키시며,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n.71)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두 가지 자세를 요구하셨습니다. 곧 겸손하게 존재하는 자세와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이 겸손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 교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단체, 모든 운동, 모든 새로운 공동체에 해당됩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자신들이 육화하기에 너무나 넓고 다양한 상황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건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진정한 얼굴을 만나기 위한 예고편으로 저마다의 고대 종교와 문화적 전통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깨닫도록 요구합니다. 나아가, 그것은 때로는 영웅적이기까지 했던 자신들의 증언 위에 씨 뿌리고, 자라고, 거두고, 세워진 성덕과, 이 교회들의 선교와 전통에 대한 귀한 평가를 요구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교와 친교를 이루고, 그분들의 지적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곧, 여러분의 카리스마적이고, 교육적이며, 선교적인 풍요로움을 지역교회와 나누려는 열린 태도와, 능동적이고 활발하게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 공동체들의 공동체인 본당 안의 현존을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목자들은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요청받습니다. 그것은 단체결성의 자유와 또 보편교회를 위한 성령의 선물이라고 성좌가 인정한 그들의 카리스마에 대한 존경을 의미합니다. 따뜻한 환대는 자기 양떼의 여러 다른 구성원을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을, 또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들이 편히 지내도록 온유함과 보살핌으로 그들을 환영하는 방법을 배우는 착한 목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랑으로 운동단체들에 접근하기”라는 말로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독일 주교단을 격려하셨습니다. 운동단체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이 성령의 선물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며, 양성의 방법이거나 여정이고, 선교의 주체라면, 그들이 지역 교회에 가져오는, 가톨릭정신의 살아있는 혈류 속에 흐르는 그리스도교의 체험으로 풍요로워진 값진 기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느낌이 존재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지역교회와 보편교회 사이의, 본당과 작은 공동체들과 운동들 사이의 대립은 피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공동의 집을 함께 지으려면, 적개심이나 반목의 정신은 어느 것이라도 치워져야 하고, 대신 사람들은 성숙한 애정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참조 로마 12,10) 존경과 협력의 의지를 보이기에 서로 앞 다투어야 하고, 인내와 멀리 보는 시각으로, 때로 요구되는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송가에서 요청되는 것을 언제나 허락하면서 말입니다. (1코린 13,1-13) 본당들, 운동들, 새로운 공동체들 그리고 신자단체, 수도공동체, 유적지 성당들, 사제관, 공소, 사도직 센터들....은 하나의 교회가 실현되는 형태의 자유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친교의 신비는 일치와 다양성의 살아있는 요약으로써 실현됩니다. 이것은 요한 바오로 2세로 하여금 교황 서간 새 천년기를 쓰시게 했습니다. “실천 계획을 수립하기 앞서, 우리는 친교의 영성을 조장할 필요가 있으며, 개인과 그리스도인이 양성되는 곳, 제대에서 직무를 행하는 곳, 수도자들과 사목의 일꾼들이 훈련되는 곳, 가정들과 공동체들이 세워지는 곳 그 어디서나 그것을 교육의 주요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n.43) 2006년 6월3일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운동들과 새로운 공동체들에게,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다양성을 원하시며, 여러분이 성 베드로의 후계자와 함께, 또 사도들의 후계자와 함께 교회의 - 힘줄인 - 지속적인 질서와 더불어 일치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배우려는 우리의 노력을 깎아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한 몸이라는 시각으로 또 한 몸의 일치 속에서 활동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일치가 힘과 아름다움을 얻는 정확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한 몸을 건설하는 데에 참여하십시오! 목자들은 성령을 꺼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고(참조 1테살 5,19)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물을 온 공동체에 가져다주기를 그치지 마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뜻은 일치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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