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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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2013-0601...성체와성혈대축일...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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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6-01 ㅣ No.1357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해)

창세기 14,18-20              1코린토 11,23-26            루카 9,11-17

2013. 6. 1. 등촌3

주제 :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이 드러낼 자세(!)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음식과 음료로 오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는 성체와 성혈을 공경하는 날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 하루만 기억하고 내일부터는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된 지식과 올바른 자세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결실을 맺는다면, 그 자세는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내일과 모레, 올해와 내년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삶을 마칠 때까지 좋은 영향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가 아닌 경우라면, 미사에 참여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혈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신앙에서는 미사를 통하여 성체와 성혈중에서 하나만 영해도, 둘 모두를 영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색다르게 여기고, 성혈을 만날 기회를 얻으려고 하겠지만, 신앙에서는 그 일만큼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성체와 성혈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1517년 그리스도교의 분열 후, 개신교의 골격이 어느 정도 형성된 뒤에, ‘종교분열가, 마르틴 루터가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선 다음에 생각해보니, 그 옛날 그리스도교의 신앙본류와 투쟁할 때, 미사인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갖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말을 마르틴루터가 실제로 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에 인간의 생각이 가미되어 있던 모습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떨어내려고 쇄신과 분열을 저지르고 나니, 가장 중요한 것이 미사인 성체성사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하는 고해성사였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중요한 이 두가지에 얼마나 올바른 태도를 갖고 대하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체에 관한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성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오천명의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기적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전에 나오는 기적(奇蹟)이라는 낱말의 뜻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아주 기이한 일로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힘이 세상에 드러난 경우를 가리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기적에 대한 인간의 설명은 사전에 나오는 설명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먹을 것도 챙기지 않고 나서는 사람이 요즘에도 있는지는 참 신기한 일이지만, 그렇게 모여들었던 오천 명쯤의 장정들, 1만 명쯤의 어른들, 1만 명이 훨씬 더 넘었을 어린이를 합친 사람들에게 빵5개와 물고기2마리를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기적은 일어나는 법입니다. 5개와 물고기2마리로 5천명이나 1만명 혹은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나 음식이 남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놀라운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렇게 질문합니다만, 우리가 이해하거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하느님께서 사람의 세상에 당신의 업적을 드러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이 담긴 음식은 우리의 위장이 헛배 부르게 하는 묘한 술책을 써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혹시라도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적을 체험할 수 없는 사람이거나, 우리 앞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그 사람은 하느님의 힘을 절대로 체험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몇백 명의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싸우러나갔다가, 조카를 구해오는 길에 갑작스레 만난 멜케체덱 임금이 건네주는 빵을 받고 그가 말하는 몇 마디 축복의 소리에 자기의 전리품(戰利品,=전쟁에서 적군에게서 빼앗은 물품)에서 십일조를 내놓았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삶을 통하여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축복에도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누구나 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의 겉모습에 무슨 특징이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진 자세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리를 듣게 되면 어떤 조건의 차이를 생각하겠습니까?

 

구약성경,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이 축복을 받게 된 것을 부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 관해 다른 곳에서 적는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런 축복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 중의 한가지 본보기가 오늘 들은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본받아서,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행동으로 드러낸다면, 우리 역시도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실 축복의 잔칫상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삶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드러내보였는지에 따라,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그저 바라볼 수만 있고 축복에는 참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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