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2010-06-13.....연중 11 주일 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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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0-06-12 ㅣ No.937

연중 제 11 주일 (다해)

2사무엘 12,7ㄱㄷ-10.13              갈라디아 2,16.19-21                루카 7,36-8,3

2010. 6. 13. 등촌3동

주제 : 세상에 떳떳한 사람으로 나서기

세상이 악한지, 세상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악한지 구별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고 삽니다. 실제는 세상 삶의 결과로 죄를 만들고 죄와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죄라는 말 대신 잘못이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만, 그것들을 없애고, 그것들이 내 삶에 나쁜 영향을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은 연중 11주일입니다. 이제 교회공동체의 전례는 대림과 사순, 그리고 부활시기를 지내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연중시기를 지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에는 죄와 용서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두 가지 중에서 더 중요한 용서가 선언되는 자리에는 반드시 죄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이 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죄가 컸던 여인은 그 죄를 자기 삶에서 치우는 방법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한 사람보다, 세상의 지혜를 온전히 자기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보다는 확실히 나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통회와 눈물로 자기의 죄를 씻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그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굳이 다른 사람의 죄를 알아내는 뛰어난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현학적인 모습은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도 죄를 용서하는 고해성사 또는 화해성사가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더구나 우리가 복음에 등장한 바리사이처럼, 인간의 지식을 앞세워 ‘남을 죄인이라고 먼저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과정은 죄인으로 내몰렸던 여인이 한 것처럼, 자기 삶을 돌이키고, 눈물을 흘리고 그 곤경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낼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실천이 아니라, 그저 지식으로만 갖고 있다면 내 삶에 하느님의 용서는 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힘이 모자라서 오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에서 올바로 사는 길은,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내 삶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고 하느님은 어찌 판단하실까 찾는 일입니다. 50 데나리온의 빚이 탕감된 사람보다는 500 데나리온의 빚이 탕감된 사람이 훨씬 더 큰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법입니다.

  그 금액의 단위는 열배이지만, 그가 삶에서 드러내는 감사의 크기는 분량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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