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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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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공주의 순교자, 이국승 바오로와 김원중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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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9 ㅣ No.684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공주의 순교자, 이국승 바오로와 김원중 스테파노

 

 

공주는 조선시대 1602년(선조35년)에 충청감영의 소재지로 관찰사가 상주하면서 호서지방 4개 목 35개 현을 관할하는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박해시대에는 충청도 각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공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불쌍한 이들은 당신들이오

 

이국승 바오로(?-1801년)는 충청도 음성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천주교에 관한 말을 듣고 양근에 있는 권철신을 찾아가 배웠고 배운 바를 실천하였으며, 1790년에 최인길에게서 교회서적을 빌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그는 강한 믿음으로 활기가 넘쳤지만, 많은 행동에서 가벼움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1795년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혹독한 형벌로 말미암아 배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님을 황사영의 집에서 여러 차례 만나 가르침을 받았고, 뒤에 서울로 이주하여 선행을 널리 실천하였습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배교한 고광성을 단단히 야단쳐서 스스로 옥에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고향인 황해도 평산에서 5월 28일(음) 참수형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형벌을 당할 때에 배교하는 말을 하였으나, 형벌이 그치자 곧 “풀려나가면 또다시 실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청에서 “10년 동안 고혹되어 이미 고질병이 되었으니 지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끝내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는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정도로 돌아오겠다는 뜻을 진술하고 석방되었지만, 이는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강하게 닻을 내리고 있던 신앙은 그를 온전히 붙들고 있었기에, 경솔함을 보이면서도 가장 숭고하고 가장 근엄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벽위편”에 보면, 그는 “옥 안에서도 밤중이면 갇힌 몸이면서도 입으로 사서를 외웠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형장인 공주로 가면서 그는 “당신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은데 불쌍한 이들은 당신들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약 30세의 나이로 그해 5월 26일 또는 27일(음)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은 조카들이 공주에 매장하였습니다.

 

 

위주(爲主)하여 살다가 천당 가게 하여라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원중 스테파노는 청주에서 1866년 10월 15일(음)에 순교한 김선화 베드로의 사촌입니다. 진천에 살던 스테파노는 성품이 온화하고 진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관리가 “천주교를 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책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자, 다른 신자들은 그대로 따랐지만, 스테파노는 홀로 “내가 성교(聖敎)하거늘 어찌 배교되는 일을 하리오.” 하면서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배교한 신자들과 외인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1866년 10월 4일 “관가로 다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그는 “이제는 다 죽을 터이니 동네 사람이 다 갈 것이 아니라 신덕자(信德者)만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포졸이 와서 10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관리가 “일전에 들인 책이 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테파노는 자신의 책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제 책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신성수 회장과 그의 형 신성순, 그리고 새로 영세한 이성유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테파노는 이들과 함께 25일 감옥에 갇혔습니다.

 

10월 그믐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때 스테파노는 동생에게 “나는 위주치명(爲主致命)하겠으니 너도 아무쪼록 위주하여 살다가 천당 가게 하여라.” 하고 전하고, 또 부인에게 “우리는 주님께서 내신 것이니 자녀를 데리고 사나 죽으나 주님의 명을 순종하다가 죽은 후에 천당 가서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 사람은 11월 10일(음)에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공주감옥은 둥그런 형태의 감옥인데, 지름이 30m, 외벽두께 3척, 높이는 한 길 정도로, 남녀로 구분된 원옥이 2개가 있고, 수용자들이 거주하던 5칸 정도의 방이 있었으며, 그 둘레에 담이 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형장은 황새바위였는데, 이곳에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13.8m의 순교탑이있고, 공주 순교자 248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공주감옥에 갇혀있으면 서 오로지 순교를 갈망했던 김 스테파노와 또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이 바오로의 삶과 신앙을 묵상하였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08년 6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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