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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회사 공개대학10: 103위 성인 유해 발굴과 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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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31 ㅣ No.644

한국교회사연구소 상반기 공개대학 특강 지상중계 (10) 103위 성인 유해의 발굴과 분배

 

 

서울대교구가 2001년 7월 11일 발표한 '성인 유해에 대한 경배와 개인 보관 유해의 보존ㆍ처리 지침'에 따르면 넒은 의미의 성인 유해는 하느님의 종에 관련된 모든 사물을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복자나 성인의 몸, 머리, 팔, 손, 다리, 심장, 또는 치명상을 입은 몸의 일부'다. 103위 성인 중에서 유해가 전해지는 것은 27위 뿐이다.<표 참조>

 

 

1. 103위 성인의 유해발굴

 

1) 박해시기 순교 성인과 유해 상황

 

▲ 김대건 안드레아 : 새남터→와서(용산 우체국 뒤편)→미리내

▲ 김성우 안토니오 : 형조 옥(서울)→구산

▲ 남종삼 요한ㆍ최형 베드로 : 서소문→와서 

▲ 다블뤼 주교ㆍ오메트르 신부ㆍ위앵 신부ㆍ장주기 요셉 : 갈매못→서들골(서재골, 충남 홍산 남포)→나가사키→용산 신학교

▲ 황석두 루카 : 갈매못→연풍

▲ 앵베르 주교ㆍ모방 신부ㆍ샤스탕 신부 : 새남터→노고산(서강대 뒷산)→삼성산(서울 관악구 신림동)

▲ 도리 신부ㆍ베르뇌 주교ㆍ볼리외 신부ㆍ브르트니에르 신부ㆍ우세영 알렉시오 : 새남터→와서

▲ 손선지 베드로 : 전주 숲정이→범바위(전주 진북동)→다리실(전북 완주)

▲ 정문호 바르톨로메오ㆍ한재권 요셉 : 전주 숲정이→범바위→시목동→다리실

▲ 이명서 베드로 : 전주 숲정이→범바위→막고개(전북 완주)→모시골(전북 진안)

▲ 이윤일 요한 : 대구 관덕정→아미산→날뫼 원고개(대구 비산동)

▲ 이호영 베드로 : 형조 옥→노고산

▲ 최경환 프란치스코 : 포도청→노고산→수리산

▲ 허계임 막달레나ㆍ이정희 바르바라ㆍ이영희 막달레나 : 서소문→봉천리→언구비(서울 논현동)

 

2) 일제시기 이전의 유해 발굴 및 이전

 

순교자 공경은 1835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해 순교 행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점차 시복 추진과 순교자 현양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시복 추진에 따른 재판이 진행되면서 유해 발굴 작업이 본격화됐다.

 

당시 유해 발굴 작업을 「뮈텔주교일기」를 통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크게 5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① 1899년 10월 30일 용산 왜고개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우세영 등 유해 7구가 발굴돼 용산 신학교로 이전됨.

 

② 1900년 9월 4일 용산 신학교에 있던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의 유해를 명동본당 지하 성당으로 옮김 (①의 유해들도 이때 함께 옮겨짐).

 

③ 1901년 10월 21일 삼성산으로 이장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유해가 발굴돼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고 같은 해 11월 2일에 명동 지하성당으로 이전됨.

 

④ 1909년 5월 28일 왜고개에 매장돼 있던 남종삼과 최형 유해가 발굴돼 명동 주교관으로 옮겨졌다가 6월 17일 지하성당에 안치됨.

 

⑤ 김대건 신부의 경우 1901년 5월 20일 뮈텔 주교 명을 받은 드망즈 신부가 미리내 무덤을 발굴해 유골을 전부 추려 모아 미리내본당 강도영 신부 방에 일단 안치했다. 5월 23일 용산 신학교로 옮겨 이듬해인 1902년 6월 23일 용산 신학교 성당에 정식으로 제대 밑에 안치했다.

 

이상의 상황을 정리하면 일제시기 이전까지 순교자 유해 상황은 명동 지하묘소에 총 16위의 순교자 유해가, 용산 신학교 성당에 1위의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었으며 나머지 순교자들 유해는 교회 측에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일제시기 유해 발굴과 이전

 

▲ 브르트니에르 신부 유해 이전 : 명동→프랑스

   명동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던 브르트니에르 신부 유해는 가족들 요청으로 1911년 8월 31일 프랑스로 보내져 11월 9일 가족묘에 안치.

▲ 앵베르 주교ㆍ모방 신부ㆍ샤스탕 신부 유해 확인 : 명동 

▲ 김대건 신부 유해 확인 : 용산 

▲ 김성우 유해 발굴 : 구산→용산→명동

   1927년 5월 30일 구산에 안장돼 있던 김성우 유해를 발굴해 용산 신학교로 옮겼고 이곳에서 유해의 골격을 재구성한 후 명동 지하묘소에 안치.

▲ 최경환 유해 발굴 : 수리산→명동

   1930년 5월 29일 최경환 유해가 발굴됐고 같은 날 명동성당 주교관으로 옮겨 보관되다가 9월 29일에 명동 지하묘소에 안치.

▲ 이명서 : 전주 숲정이→범바위→막고개→모시골

   1920년 3월 진안 어은동에 살던 손자 이준명이 막고개에 매장돼 있던 유해를 진안 어은동 모시골로 이장.

▲ 허계임ㆍ이정희ㆍ이영희 : 서소문→봉천리→언구비

   1938년 9월 27일 봉천리에 있던 묘를 언구비(서울 논현동) 교회 묘역으로 이장.

 

4) 해방 후 유해 이전

 

한국교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해 보관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절두산 일원에 기념관 건립을 결정하고 1967년 10월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기념관을 완공했다.

 

 

2. 한국 천주교의 유해 분배

 

1) 103위 한국 성인 탄생 이전의 분배

 

1970년대 절두산 순교기념관은 전국적으로 순교자 유품 수집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전국에 순교자 유해를 분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순교자 유해를 분배해 유해를 중심으로 신앙인들이 모일 수 있고 순교 신앙을 깊이 숙고하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2) 103위 한국 성인 탄생 이후의 분배

 

1970년대 중반까지 진행되다 중단됐던 순교자 유해 분배 작업은 1984년 5월 103위 한국 순교자가 탄생한 이후 재개됐다. 103위 한국성인 탄생 이후 절두산 순교기념관에서 안치된 성인 유해는 각지로 분배됐다.

 

3) 김대건 신부 유해 분배 현황

 

김대건 신부 유해는 현재 1901년 미리내에서 발굴될 당시대로 모두 갖춰져 있지 않다. 신학교에서 보관해 온 유해가 1969년 10월부터 1996년까지 개인이나 본당, 여러 단체 등 200여 곳에 분배됐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1925년 김대건 신부가 복자품에 오른 뒤부터 이미 유해 분배가 시작됐다고 주장하지만 1925~1969년 사이의 분배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다.

 

[평화신문, 2009년 5월 31일, 백병근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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