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이스라엘 베들레헴: 오, 다윗의 작은 고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4 ㅣ No.639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이스라엘 베들레헴


오, 다윗의 작은 고을!

 

 

1년 전 나는 안식년을 지내며 평소 꼭 해보고 싶었던 ‘엑체 호모(Ecce Homo)’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 사람을 보라.’로 번역되는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석 달 반 정도를 예루살렘에 머물며 성경을 중심으로 수업을 듣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전에는 한 번도 성지순례의 기회가 없었는데 ‘엑체 호모’ 기간을 앞두고 몹시 마음이 설레었다. 예수님 공생활의 주무대였던 갈릴래아, 머무신 기간은 길지 않지만 예수님 삶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 곧 수난과 부활의 무대가 되는 예루살렘, 그리고 강생의 신비가 이루어진 베들레헴 등을 볼 수 있다니! 안식년이 결정되고 나서는 눈만 감으면 이미 성경의 장면들 속에 자리하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 어린 시절부터 성극과 성가 등을 통해서 들판의 어린 양들과 목동들, 빛나는 별과 천사의 음성, 가난한 젊은 남편과 만삭의 어린 신부가 쉴 곳을 찾고, 갓 태어난 어린 아기는 구유에 뉘어지고, 동방의 세 현자가 예물을 들고 새로 탄생한 왕을 경배하러 찾아오는 아름다운 동화와 같은 이미지들을 전해주던 그곳은 이천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나를 희망과 설렘이 가득 찬 어린 순례자로 맞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방문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전해들은 베들레헴의 상황은 그 환상을 일찌감치 깨뜨려주었고, 세 차례 베들레헴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현실들은 하느님의 그 어떠한 사랑과 배려에도 도무지 변화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완고함을 가슴 아프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다윗 왕의 고을은 예루살렘의 지척에

 

베들레헴에 대해 첫 번째로 느낀 것은 이 마을이 예루살렘에서 놀랄 만큼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곳곳을 우리와 함께 다니며 그 역사와 현실에 대해 안내해 준 유다인 제라드 교수의 말에 따르면, 베들레헴의 아이들은 늘상 자전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놀러 다녔고, 베들레헴을 예루살렘과 별개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성경을 읽을 때, 또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으로 시작하는 성가를 부를 때마다, ‘다른 마을도 작은 곳이 많았을 텐데 왜 유독 베들레헴을 구태여 작은 마을이라고 불렀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있는 화려한 수도 예루살렘의 지척에 자리한 작은 마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예루살렘에 딸려있는 별책부록 같은 존재이지만 다윗 왕의 탄생지로서 빼앗길 수 없는 자존심은 지키고 있는 마을이 예수님 시대의 베들레헴이었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쫓겨 간 뒤, 또 그들이 돌아온 뒤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위인이자 구세주이신 분의 탄생지로 전 세계의 순례객들을 맞이하던 성지 베들레헴이지만, 이 마을의 대다수 주민들은 예루살렘에 일터를 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다인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고 테러가 심해지자 유다인들은 다른 지역들과 함께 베들레헴을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으로 봉쇄해 버렸다. 허가증을 가진 소수의 베들레헴 주민들은 예루살렘에 출퇴근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조금이라도 민감한 사건이 터지면 막혀버리고, 예루살렘에서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리면 암흑 속에 떨어야 한다. 불안한 정세로 순례객마저 끊긴 베들레헴은 그야말로 죽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작은’ 마을의 설움이다.

 

 

가장 작은 이에게 가장 큰 권능이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하느님의 길을 벗어나자 예언자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을 받아 새로운 왕을 찾아 나서는데, 바로 이 작은 마을에 사는 이사이의 아들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이, 양을 치던 막내 다윗을 하느님은 지목하신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1사무 16,7)라고 하느님께서는 설명하신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참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구약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거창하고 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작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어 겸손한 순종으로 십자가의 굴욕과 죽음을 받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의 신비로운 계획을 또한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도 그리 인정을 받는 동네는 아니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할 정도였지만, 베들레헴은 다윗 왕의 출생지임에도 ‘작은’ 마을로서, 예루살렘이 재채기를 하면 몸살을 앓아야 하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종교적, 민족적 갈등에 이리 저리 차이는 속절없는 신세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작고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그 존재와 삶으로 몸살하며 증언하고 있는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작은 마을에서 머리 둘 곳을, 아이를 낳고 누일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겨우 얻은 마구간, 목자들이 별빛 아래서 천사의 음성을 들은 벌판, 그들이 머물던 동굴, 성모님께서 헤로데 왕의 어린이 학살을 피해 숨으셨다는 바위,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젖을 물리셨다는 동굴, 확인할 길은 없지만 분명 성가정의 발자취가 묻어있을 곳곳에 한때는 화려한 성전이 가득 들어섰을 것이다. 이제는 그 조차도 모두 폐허가 되어버리고 새로 지어진 비교적 소박한 경당들과 유적들이 오히려 그 겸손의 역설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작아서 더 반짝이는 별처럼

 

평화를 모르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신(마태 23,37-39) 예수님께서 지금의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보시는 심정은 어떠실까? 그때보다 결코 더 평화롭지 못한 오늘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실 그분의 마음을 느끼며 내 가슴도 아려온다.

 

폭력에는 테러로, 테러에는 보복으로 서로를 상처 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가 가진 힘과 권력을 누리고 휘둘러서 서로 미워하고 아프게 하는 우리에게 작은 마을에 작은 이로 오셔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은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신 것일까?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내 힘과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낮추고 작은 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별은 태양처럼 밝지 않지만 어쩌면 작아서 더 아름답게 반짝이며 어두운 세상을 굽어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이 순간 이천 년 전의 별빛을 그대로 받고 있을 여전히 작고 어두운 마을 베들레헴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 조금이라도 주님을 닮아 작아지자고 다짐해 본다.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놀라운 별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친 줄 너 어찌 모르나?”(가톨릭 성가 108번)

 

[경향잡지, 2008년 12월호, 변승식 요한 보스코(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사무국장)]



56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