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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프랑스 리지외: 작은 꽃, 소화 데레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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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4 ㅣ No.637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프랑스 리지외


리지외의 작은 꽃, 소화 데레사를 찾아

 

 

병인박해 140주년인 2006년 10월,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성지인 수원교구 손골성지의 교우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프랑스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 여정에서 머물렀던 리지외는 병인박해 순교자 도리 헨리코 성인을 비롯한 성 볼리외 신부, 성 드 브르트리에르 유스토 신부,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시대에 태어나 선교의 수호자로 명명된 소화 데레사(1873-1897년)의 고향이다.

 

프랑스 북부 바스 노르망디 칼바도스 데파르트망 시에 위치한 작은 도시 리지외는 노르망디 지방 최고의 고딕 건축물로 유명한 12-16세기의 성 피에르 성당과 1954년 축복한 생 테레즈 바실리카가 있어 각국의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성지로 유명하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지점에 있는 리지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개입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무대다. 노르망디의 집들은 1-2층의 낮은 구조에다 벽면에 나무 기둥을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하여 목가적 분위기를 내고 기하학적인 지붕과 벽 사이에 처마가 없어 독특한 멋을 풍긴다. 평지엔 사과나무가 가득하고 가지마다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풍경은 이곳 특산품인 ‘시드르’라는 사과로 만든 과실주의 명성을 말해준다.

 

현대인의 성녀, 신앙의 재발견자, 작은 길, 성모님의 작은 꽃(소화) 등으로 불리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보통 예쁜 소녀가 장미를 들고 기도하는 모습이나 낡은 흑백사진 속 십자가를 들고 있는 수녀의 이미지로 연상된다. 하지만 리지외를 방문하면서 소화 데레사 성녀의 영성이 현대 신앙의 코드가 됨을 알았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는 동안 유럽인들은 복종과 희생, 고행 등을 신앙의 본연으로 여겼고, 마을 공동체는 성당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유럽, 특히 프랑스나 동유럽 지역을 다녀보면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성당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 전반에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신앙도 현실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교회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옮아갔다. 이러한 종교적 성찰이 시작되는 변화의 기로에 불꽃을 피운 이가 바로 소화 데레사다.

 

 

성녀의 유년시절과 봉헌생활

 

리지외 시내 중심부에는 성녀가 15세의 나이로 입회한 맨발의 가르멜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원 마당의 성녀 조각상은 사진으로 많이 본 것이어서 마주 대하는 감동이 컸으나 길가에 인접한 수도원의 문은 굳게 잠겨서 외형을 확인하는 데 그쳐야 했다. 평소 이곳엔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당시 유해는 순회 중이어서 이곳에 있지 않다고 했다.

 

수도원에서 시내 중심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성녀의 생가가 있다. 작은 정원이 딸린 2층 저택은 19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거실에는 시계 제조업을 하던 아버지의 재력을 보여주듯 고풍스러운 탁자와 소파가 전시되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성녀가 언니와 함께 쓰던 방엔 흰색 레이스 커튼을 친 작은 창을 통해 맑은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또 다른 방엔 인형놀이 세트와 첫영성체 때 입었던 흰색 드레스 등이 전시되어, 짧지만 행복했던 시절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변화된 삶이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애처로워 보였다. 집 후원은 꽃밭과 벤치로 장식되었고, 창고로 쓰였을 작은 초막엔 성탄 구유가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던 유년시절,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데레사는 우주를 잃어버린 듯한 슬픔으로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말이 많고 상냥하던 소녀는 말수가 줄고 소심해졌으며 자주 아팠다고 한다.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를 보살피던 언니 마리와 폴린느가 수도원에 입회하자 성녀는 아버지에게 자신도 수도원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수녀원은 나이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15세에 입회하였다고 한다.

 

생가에서 나와 리지외 언덕 위에 있어 마을 어디서나 잘 보이는 소화 데레사 기념성당(생 테레즈 바실리크)으로 갔다. 그곳에서 건너다본 구릉지엔 작은 숲이 있었고, 넓은 초원에서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성녀는 로마를 순례한 것 외에는 고향인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성당 아래 소성전에는 성녀의 생애와 영성을 담은 비잔틴풍의 모자이크화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한 사람의 작은 사랑이 숭고한 가치로 예우받는 것을 보며 “작은 자라도 하늘나라에선 그보다 크다.”(마태 11,11)는 말씀이 떠올랐다. 미사를 마치고 올라가니 웅장한 대성전이 돌의 중압감과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압도해 왔다. 입체적인 아치엔 예수님과 성모님의 영접을 받는 성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며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제대를 비추고 있었다. 성전의 뒷모습도 대리석 건물답게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후원엔 성녀의 부모님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었다.

 

 

나를 내어드릴 뿐입니다

 

24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데레사는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는 사람들과 죄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확신하며 보속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더불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으며, 1944년 5월 3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녀 잔 다르크에 이어 그녀를 ‘프랑스의 제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데레사는 연륜이 오래된 수도자도 고위 성직자도 아니고, 목숨을 내어놓은 순교자도 아닌 병약하고 눈물 많은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사랑과 자비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아주 단순명료한 진리를 먼저 깨달았다. 작은 것이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작지가 않다는 사실을 성녀는 온몸으로, 전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다.

 

“내가 선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 또한 영혼들에게 나의 작은 길을 주는 것이 바로 나의 파견입니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은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날 사랑하시도록 내어드릴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주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소화 데레사 어록 중에서).

 

리지외를 떠나며 나는 신앙의 현주소를 발견한 기쁨과 자성의 소중한 시간들에 감사했다. 작은 꽃 소화 데레사가 남겨준 묵상의 향기를 음미하며, 신앙이란 기적이나 예언을 숭상하거나 영적 세계에만 몰입하여 현실적 삶을 도외시하거나 종교를 통하여 세상의 부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도전과 역경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사랑의 하느님을 절대 신뢰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여인교 엘리사벳 - 수원교구 죽전성당 신자. 덕성여대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패션 디자이너로 일했다. 2006년에 도리 헨리코 성인의 삶을 묵상하고 19세기 프랑스의 신앙유적지를 답사하며 사진 에세이를 썼다. 답사여행을 주관한 손골성지(cafe.daum.net/Sonkol)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의 순교자 신심강학 강의가 열린다.

 

[경향잡지, 2008년 10월호, 글 ? 사진 여인교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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