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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10: 성사적인 표징으로서 혼인동의와 부부행위의 에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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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795

[몸의 신학] 성사적인 표징으로서 혼인동의와 부부행위의 에토스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10)

 

 

시작하며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 최근 고위공직자로 지명된 분이 인용했다는 마오쩌둥의 어록이라는데,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여론이 안 좋아 ‘어쩔 수 없이’ 사퇴하면서 인용했답니다.

 

지난 8월 “손자 아무개(12세) 군을 친양자로 입양하라.”라는 창원지법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손자가 양아들이 되라는 것은 ‘친엄마가 누나가 되라.’는 판결이며, ‘친아들이 남동생이 되라.’는 것이지요.

 

사연인즉슨, 미성년 때 ‘싱글맘’이었던 그 아이의 친엄마는 새 남자를 만나 임신해 곧 세 번째 혼인을 앞두고 있었답니다. 그 아이를 키워온 조부모는 딸들만 두었는데 ‘자기 핏줄’의 아들이 뚝딱 생기고, 그리고 ‘갸륵하게’ 그 아이도 찬성했답니다.

 

혹시, 그 어린것의 마음에는, 자신의 ‘입양 동의’가 ‘혼인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친엄마를 향해 ‘혼인동의’의 참의미를 알려줄 ‘첫 번째 선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혹 같았을 자신에 대한 호적정리가 ‘제대로 된 혼인결합’에 목말랐을 친엄마에게 해드릴 ‘마지막 효도’라고 여긴 것은 아닐까요?

 

이번 호에서는, 회혼식의 “한몫”(에페 1,11)을 얻어 누릴 성사적인 표징으로서 혼인동의와 부부행위의 에토스에 대해 그리고 ‘몸의 언어’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주시는 가르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혼인의 성사적인 표징의 사례 세 가지

 

지난 호에 이어 에페 5,21-33의 말씀 속에서, 교황님께서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암시적인 의미로 교회의 성사들, 특히 세례와 성체에 대해 읽어내십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 그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에페 5,26-26)에서 세례성사를 읽어내시고,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에페 5,29-30)에서 성체성사를 읽어내십니다.

 

같은 방식으로,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 - 머리와 교회 - 몸의 필연적인 결합에 대한 ‘가시적인 표징’으로서 남편 - 머리와 아내 - 몸의 혼인결합 관계를 첫째 사례로 이끌어내십니다. 남편 - 아내의 결합은 그리스도 - 교회의 결합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표징’인 ‘성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결합된 교회 자체가 “큰 신비”이듯이 그런 관계를 닮은 혼인도 당연히 “큰 성사”인 것입니다.

 

둘째 사례로, 그리스도의 속량행위를 통해 “성령을 첫 선물”(로마 8,21)로 받은 남녀가 누리는 온전한 결합, 다시 말해, 창세기의 “처음” 속에서 “둘이 한 몸이 됨”(창세 2,24)에 대한 ‘가시적인 표징’으로서 부부의 그런 결합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렇게 속량된 몸들을 가진 부부로서의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로마 8,19) 다른 피조물의 희망을 언급하심으로써 그리스도 - 교회의 결합을 닮은 온전한 부부결합이 ‘우주적인 희망’도 된다고 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님을 따르면, 그 결합은 과거 창세기의 “처음”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쇄신된 처음’, ‘미래의 처음’, ‘종말론적인 처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원죄가 결백과 의로움을 빼앗아 갔지만,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의 닮음’의 본성이 파괴된 것은 결코 아니기에 그런 그리스도의 “속량” 행위는 유효하였고, 마침내 ‘새로운 창조’도 되는 것입니다.

 

셋째 사례로, “진리와 사랑으로” 결합된 ‘신성한 위격들의 친교’에 대한 ‘가시적인 표징’으로서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가 ‘진리와 사랑’으로 누리는 ‘인격들의 친교’를 제시해 주십니다. 혼인이 ‘원시적인 성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런 성사 속에서 하느님의 존엄성과 신성성을 닮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존엄성과 신성성을 읽어내시는 것 또한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구원력이 드러나는 효과적인 표징인 혼인성사

 

교황님에 따르면, ‘삼중적인 욕정’의 인간(1요한 2,16 참조)의 ‘마음’은 선과 악, 죄와 의로움, 그리고 욕정과 거룩함이 투쟁하는 내밀한 장소인데,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은”(1코린 7,7) 것이 혼인이라면 당연히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 나은”(1코린 7,9) 혼인 속에도 “은사”로서 구원의 힘이 그 마음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명백하게 강조해 주십니다.

 

“영을 따르는” 삶 속에서 성령의 말씀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성사적인 ‘동의’의 힘을 통해 두 부부의 ‘인격들의 친교’를 깨려는 ‘무질서한 욕정’, 혼인의 일치와 불가해소성을 거스르려는 그런 ‘무질서한 욕정’을 누를 확실한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성사 곧 그런 성사적인 부부행위와 그 동의는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온 것”(1요한 2,16)이기 때문이며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로마 8,23)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표징인 혼인성사의 에토스

 

교황님께서는 바오로식의 부부 묘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속량적인 차원과 혼인적인 차원을 읽어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에페 5,25), 그렇게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서로 순명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을 다시금 강조해 주십니다. 물론 혼인의 삶만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자’의 삶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큰 신비”라는 점을 잊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런 혼인적인 사랑이 동시에 하늘나라를 위한 금욕의 이상향을 가장 완전하게 “육화”시킨 것이라고, 은근히 그러나 호소력 있게, 단언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가시적인 표징을 의식하는 것이 곧 그런 표징의 내용이 되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라고 확고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내 아내(또는 남편)로 맞아들입니다.”라는 상호적인 혼인동의는, 명백하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호적인 결합동의를 드러내는 것인데, 교황님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부 상호간에 드러내도록 초대받는 것이며 동시에 스스로 사랑을 드러내기로 약속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상호적인 동의에 비추어, 교황님께서는 ‘마음으로 한 간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단지 ‘몸으로 한 간음’의 반대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부부 간에도 ‘마음으로 한 간음’의 가능성이 항상 있음을 언급해 준 것으로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부부간의 새로운 범죄, 부부간에 서로 선물하는 상호적인 성실성과 신의를 깨는 ‘마음으로 한 간음’의 죄를 읽어내십니다. 부부의 새로운 윤리, 속량된 몸들에게 적합한 혼인의 에토스,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임”의 그런 부부의 에토스를 향한 부르심을 읽어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신성한 위격들의 친교’를 드러내야 할 가시적 표징인 혼인성사는 ‘부부동의’로써 ‘시작’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선물”(사목헌장, 24항)하고 “결합”(창세 2,24)하여 ‘부부행위’로써 ‘완결’됩니다. 그리고 그 성사가 지속적으로 “한 몸”됨을 향해 ‘완성’되어 간다고 일러주십니다. 에로스와 에토스가 혼인행위 속에서 적합하게 만날 때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욕정의 인간”이며 ‘리비도의 인간’이지만, 리비도에 의해 기계적으로 지배되어 부부도 봉헌된 독신자도 스스로를 “의심”할 운명에만 떨어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건너갈 가능성을 지닌, 성령을 따라 죄에서 정결로 회개할 역량을 지닌 ‘에토스의 인간’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불린 ‘소명의 인간’이라고 역설해 주십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가도록” 혼인과 독신의 삶 속에서 욕정을 지배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게”(1요한 2,17)될 복된 미래 때문에 그렇습니다.

 

 

혼인성사를 완성해 줄 부부행위로서 ‘몸의 언어’

 

“나는 당신을 내 남편(아내)으로 맞아들입니다.” 이런 혼인동의로 시작하는 혼인은 “저마다의 고유한 은사”(1코린 7,7)로서 “내 일생 동안” 지속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으로 소통하는 부부 자신들의 고유하며 내밀한 언어인 ‘몸의 언어’를 서로 상호적으로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 - 법률적인 용어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종교 - 도덕적인 의미로도 표현해 낼 수 있습니다. 바로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을 말하는데, “신적 위격의 결합과 어떤 유사성을 지니고”(사목헌장, 24항) 있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 교회의 관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남편 - 아내의 행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을 드러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이런 계약관계는 예언서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에, 교황님께서는 몸이 지니는 예언자적인 성격으로서 “몸의 예언자성(prophetism)”을 읽어내십니다. ‘몸의 언어’가 몸이 지닌 ‘상호적인 인격적 선물’을 표현해 내면 ‘진리’를 말하는 ‘참예언자’이고, 반대로 ‘상호 소유와 욕정’을 몸으로 표현해 내면 ‘허위’를 말하는 ‘거짓 예언자’인 것입니다. 호세아, 에제키엘 등은 그런 몸의 언어가 ‘충실의 언어’ 곧 ‘사랑의 언어’로도, ‘불충실의 언어’ 곧 ‘간음의 언어’로도 말한다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손자를 양아들로 만드는 판결이 얼핏 할아버지라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 주도록 배려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보이지만, 사실, 여러 모로 불편한 아이를 간단히 ‘서류정리’하려는 어른들의 ‘공동 음모’인 셈입니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상처는 숨김이나 꾸밈의 기술로는 치유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의 아픈 상처를 스스로 ‘언어로’ 드러낼 때 치유가 가능합니다. 사회 근간이며 인간다움의 질서인 남녀의 혼인동의와 부모자녀의 관계는 몇몇 법률가들이 손쉽게 ‘마사지’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다음 호에서는 교황님께서 남녀가 몸으로 상호 소통하는 ‘몸의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주는 아가의 경이로움, 토비아와 사라의 혼인, 그리고 새로운 부부 기도로서 전례의 언어를 더 소개할까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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