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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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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05 ㅣ No.628

[현대교회의 가르침] (48)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상)


“하느님 없이는 참된 희망 없다”

 

 

회칙의 발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첫 번째 회칙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 이어 두 번째 회칙인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를 2007년 11월 30일에 발표하였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Spe salvi facti sumus)라는 로마서 8장 24절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 회칙은 희망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탁월한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교황은 근대 이후 제기된 그리스도교 희망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에 대하여 반박하고 적절한 대답을 제시한다.

 


회칙의 전체 구성과 주제

 

총 50개 항목으로 된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는 짧은 서론(1항)과 8개 장의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인 ‘신앙은 희망이다’(2~3항)에서는 신앙과 희망의 관계를 다루고, 제2장인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4~9항)에서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제3장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10~12항)에서는 회칙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역사 안에서 진행된 희망에 관한 다양한 논란과 오해를 다루기 시작한다.

 

제4장인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13~15항)에서는 그리스도교 희망이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박한다. 그리고 제5장인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16~23항)에서는 근대 이후 제기된 그리스도교 희망에 대한 다양한 공격과 그 원인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마침내 제6장인 ‘그리스도교 희망의 참모습’(24~31항)에서는 근대 이후 제기된 논쟁의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희망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이론 부분과 실천 부분으로 크게 둘로 나눈다면, 희망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다루는 제1부는 제6장까지이다. 그리고 희망에 대한 실천적 권고를 소개하는 제2부는 제7장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32~48항)에 해당한다. 회칙은 실천적인 자리로 기도, 활동과 고통, 그리고 심판을 제시한다. 마지막 제8장은 ‘희망의 별이신 마리아’(49~50항)에 관한 부분이다.

 

이상의 전체 구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무엇인가?”이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전승에서 출발하여 근대 이후 다양한 논쟁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제시한다.

 

 

서론

 

서론에서는 전체 회칙에서 다룰 문제가 제시된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라는 성경 구절에서처럼, 그 희망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구원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 그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확신은 어떤 것인가?

 


신앙은 희망이다

 

제1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지는 희망의 특성을 다양한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제시한다.

 

특히 히브 10,22.23 1베드 3,15 에페 2,12 1테살 4,13 등의 구절이 근거로 제시된다. 신앙과 희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신앙은 희망의 토대이다. 히브리서 10장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22절)에 곧이어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23절)라고 권고한다.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현재를 살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단지 모르던 것을 알려 주는 역할뿐만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까지 한다. 그래서 희망의 메시지는 ‘정보 전달적’(informative)인 것만이 아니라 ‘실천적’(performative)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희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회칙은 에페 2,12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희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3항) 회칙은 이 희망의 증인으로 아프리카 출신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e Bakhita) 성녀의 삶을 소개한다.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

 

제2장은 초기 교회에서 신앙에 토대를 둔 희망이 단지 정보 전달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의 예들을 통해 소개한다.

 

특히 7~10항에서는 희망이 신앙에 기초한다는 것과 희망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히브리서를 상세하게 다룬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이 구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교황은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를 객관적인 의미인 “우리 안에 있는 실재”가 아닌 주관적 의미인 내적 태도의 표현으로 이해한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다.

 

“믿음은 단순히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개인적인 지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줍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에도 우리가 바라는 실제적인 어떤 것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실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의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미래를 현재로 이끕니다. 미래가 더 이상 단순한 ‘아직 아니’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현재를 바꿉니다. 미래의 실재가 현재와 접촉하여 미래의 것들이 현재 있는 것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현재 있는 것들이 미래의 것들에 쏟아져 들어갑니다.”(7항)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희망의 특성을 가지는데, 그 신앙은 단지 바라는 것들을 향한 내적 태도가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체(substantia), 즉 ‘알맹이’를 지니고 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온전하고 참된 생명이 최초의 상태로, 말하자면 ‘싹으로’, 따라서 ‘실체’(substantia)에 따라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올 것의 현존도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7항)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전혀 근거 없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에 이미 보여 주셨고, 현재에도 그분의 현존 안에서 보여 주시는 것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희망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희망은 “이미 주어진 현재의 관점에서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과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9항) 여기에서 현재와 미래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이러한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의 신앙과 희망에 대한 고찰은 이제 다음의 질문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을 변화시키고 삶을 지탱해 주는 희망입니까?”(10항)

 

* 송창현(미카엘) 신부는 1991년 대구대교구 사제로 서품됐으며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가톨릭사상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1일, 송창현 신부]

 

 

[현대교회의 가르침] (49)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하)


‘나 혼자만 구원받겠다’는 생각 버리고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교 희망 찾아야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의 제3-6장은 서양 근대사상사의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교 희망에 관하여 고찰한다. 먼저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희망의 내용인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의 의미에 대하여 묻는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른바 유식한 무지(docta ignorantia)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무엇을 바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참 생명’(true life)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모르지만 이끌리는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항) “우리는 단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한시성을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고, 영원성이란 달력의 날짜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이 우리를 감싸고 우리가 전체성을 얼싸안는 충만한 절정의 순간으로 느끼도록 노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순간은 마치 이전과 이후가 없는, 무한한 사랑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12항) 영원한 생명의 의미는 회칙의 전체 구성 안에서, 특히 제6장의 27항에서 제시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

 

회칙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역사에로의 참여라고 강조한다. 먼저 교황은 희망의 개인주의적이고 사적(私的)인 유형을 비판한다. “이는 비참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배타적이고 개인적인 영원한 구원에서 피난처를 마련하는 방법인 순전한 개인주의(individualism)라고 무시당하게 된 것입니다.”(13항) 그러나 교황은 그리스도교 희망의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우리가 도달하려고 늘 애쓰는 이 참된 삶은 ‘백성들’과 실존적으로 일치하는 데 달려 있으며, 이 삶은 우리 안에서 각자에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가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보편적 자아에 열려야만 우리의 시선이 기쁨의 원천인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4항) 즉 “‘복된 삶’(blessed life)에 대한 이러한 공동체 지향적인 관점은 분명히 현세를 초월하여 나아가는 것이지만,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라 주어지거나 배제된 가능성에 따라서 현세를 건설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15항)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

 

“예수님의 메시지가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오로지 각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전체에 대한 책임 회피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추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습니까?”(16항)라고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교황은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사상적 배경을 근대에서 찾는다. 교황은 근대의 바탕을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게 하고, 마침내 ‘자연에 대한 기술의 승리’에 이르게 하는 실험과 방법의 새로운 상호 관계(16항)라고 밝힌다. 그래서 “신앙이 단순히 부인되었다기보다는 오로지 개인과 다른 세상에 관련된 차원의 문제가 되고, 또 어느 모로 이 세상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17항) 그리고 이성과 자유라는 두 범주가 진보(progress) 개념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성과 자유의 확대를 통한 진보에 대한 희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세상으로 이끌기는커녕 비참한 파괴만 남겼다. 여기서 교황은 칼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그의 오류는 더 깊은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망각하고, 인간의 자유를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유가 언제든 악을 위한 자유도 된다는 점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경제만 바로잡으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결정적 오류는 유물론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단지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바람직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을 통하여 외부적으로만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21항) 

 

그리고 교황은 참된 진보의 의미를 묻는다. “진보는 분명히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진보는 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전례 없는 가능성인 악을 위한 무시무시한 가능성도 열어 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보가 잘못 인도되면 어떻게 끔찍한 악의 진보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 목격하였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윤리 교육, 인간의 내적 성숙을 통한 진보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진보가 아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위협일 따름입니다.”(22항)

 

 

그리스도교 희망의 참모습

 

회칙의 제6장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그리스도교 희망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영원한 생명은 참되고 충만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은 우리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간직하고 있거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입니다. 온전한 생명은 그 원천이신 분과 맺는 관계입니다. 죽지 않으시고 생명 그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분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27항) 구원의 개인주의에 반대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희망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모든 이를 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를 통해서만 우리는 참으로 다른 이를 위한, 모든 이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28항)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

 

회칙의 제7장은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우리 안에서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과제를 다룬다. 첫째, 희망의 학교인 기도는 그릇된 희망을 정화한다. 희망은 기도의 열매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역사 현장을 벗어나 자기행복만 누리는 혼자만의 구석 자리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과 또 우리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을 여는 내적 정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33항) 

 

둘째, 희망을 배우는 자리는 활동과 고통이다. “내 삶과 역사 전체가 온갖 좌절에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굳건히 지탱되고 이로써 그 고유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는 굳은 희망, 오로지 이러한 희망만이 행동하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35항) “인간다움의 참된 척도는 고통과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중요하게 판가름됩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고통을 겪음’(com-passion)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안으로 견디도록 돕지 못하는 사회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38항) 

 

셋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는 심판이다. 심판은 공포가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이다. “하느님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느님만이 정의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줍니다. 최후의 심판은 근본적으로 두려운 장면이 아니라 희망의 장면입니다.”(44항)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개별 심판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현대신학의 논쟁을 언급하면서, 연옥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재확인한다. 즉 교황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최종 판결이 아직 선언되지 않은 중간 상태의 개념(44항)을 제시한다.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8일, 송창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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