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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성독지남: 기억에 새기는 말씀, 마음에 모시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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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7-31 ㅣ No.322

[聖讀指南] 기억에 새기는 말씀, 마음에 모시는 말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라!”(Learn the heart of God in the words of God)라고 강조하셨다. 사랑 지극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이 누구시며 어떠한 마음을 지니셨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이 남기신 말씀에 다가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분을 온전히 알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을 철저히 따라간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독(Lectio Divina)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인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실 수도 전통 안에서 내려온 렉시오 디비나는 유대 전통으로부터 기인한다. 초대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경건하게 읽고 묵상하던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더욱이 초대 교회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은 특별히 강조되었다. 그래서 전례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읽혀졌으며, 그 다음 사제가 말씀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해 줌으로써 신자들은 말씀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의 문헌들을 보면, 실제적으로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책”(sacra pagina)인 성경과 동등한 의미를 가졌다. 성경에 대한 접근으로서 렉시오 디비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맛들이고 기도하며 실천하는 삶의 전 과정이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제대로 직시치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에 일상 안에서 말씀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말씀과 일상의 삶이 분리되어 있기에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교부들 역시 한결같이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과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하였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하느님께서 로고스(말씀)을 통해 인류의 역사 안에 인격적으로 현존한다고 보았다(허성석, 수도승 영성사, 들숨날숨, 30-34 참조). 그러므로 그는 성경에 대한 독서나 묵상은 단순히 신심 행위 차원을 넘어 우리 존재의 근원에 닿게 하는 중요한 수행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성경독서의 수행을 설명하면서 ‘프로세케인prosechei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 때문이었다. 이 용어는 자기 마음을 돌리다, 주의를 집중하다, 헌신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성경독서란 자기 마음을 말씀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서 돌려,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고 헌신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독서를 충실히 해 나가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세상의 걱정거리들로부터 조금씩 자유롭게 된다고 그는 보았다.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치프리아누스는 성경독서를 “주님의 독서”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는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렉시오 디비나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렉시오 디비나를 자기 정화의 수단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부들의 시대까지 강조되었던 말씀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가 그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으로부터 차츰 멀어지게 되었지만, 반면에 수도생활이 움트면서 수도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여 더훌륭히 꽃피우게 되었다.

 

수도 생활의 원천 혹은 뿌리는 이집트이다. 물론 그 전에 기도에 전념하며 교회공동체에 헌신적으로 살았던 동정녀들이나 과부들 혹은 금욕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정확히 수도생활이 태동한 곳은 황량한 이집트 사막이었다. “왜 하필 이집트인가?”라고 질문해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두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첫째는 생활성서사에서 나온 본인의 책 『사막에서 길을 묻다』이고, 둘째는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이다. 아마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성령의 또 다른 역사하심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집트 사막에는 두 가지 삶의 양식이 뚜렷하게 대조되어 나타났다. 홀로 은수 생활을 하는 삶의양식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삶의 양식이었다. 은수생활에 대한 방대한 정보는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이나 고대의 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특별히 은수생활의 대표적인 수도승은 성 안토니우스이다. 물론 그는 은수생활의 창시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이미 은수자들이 있었기에 창시자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단지 그를 은수자들의 사부 혹은 스승이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다.

 

이제 고대 수도승 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중요한 3가지 키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기억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마을 변두리로 물러나서 거기에서 수도생활의 알파벳부터 하나씩 직접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묵상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의 기억력이 성경 전체를 대신할 정도였다고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우스의 전기에서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고대 수도 전통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의 첫 번째 중요한 포인트인 말씀을 기억함이다. 둘째는 반복이다. 어떤 사막 교부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해 주었다. “만약 당신이 성경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계속하여 반복하십시오. 그렇게 계속 말씀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중요한 포인트인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함이다. 셋째는 마음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던 힐라리온 압바는 제자들에게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만나게 되는 세 번째 중요한 포인트는 하느님의 말씀에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감이다.

 

이렇게 초기 은수자들은 독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나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가, 기억된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는 암송 수행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통해 그들은 황폐하고 삭막한 사막에 영성의 불꽃을 활짝 꽃피울 수 있었다.

 

[분도, 2011년 여름호,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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