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성가정축일-나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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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12-25 ㅣ No.170

성가정(聖家庭) 축일 (나해)

          집회 3,2-6.12-14    골로 3,12-21(**두 독서는 공통적인 것)    루가 2,22-40

     1999. 12. 26.

 

주제 : 가정의 중심은 사랑이고, 사랑은 표현돼야 한다

 

가는 천년을 보내기가 꽤나 어려운가 봅니다.

올해는 성탄과 주일이 연속돼 있어서, 여러분들이 성당에 자주 오게 하는 특이한 전례시기를 갖는 해입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성당에 와야 할 때 여러분이 하는 생각이 어떤 것일까?  잠시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당 주변에 머물고 있기에 성당이라고 하는 특정한 곳을 찾아가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기는 합니다만, 여러분이 성당에 나온다는 부담감을 갖는 것과는 달리 오늘은 무슨 말씀으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부담으로 가질 때는 있습니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으로 이루어진 가정,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았던 가정을 기억하고 그 가정의 본보기를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우리들 자신을 위한 주일입니다.

 

우리들은 가끔씩 신앙문제 때문에 양보도 많이 하고 싸움도 많이 합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신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도 그렇고, 천주교 신자들을 주된 포교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여호와 증인들과의 다툼도 그런 싸움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 천주교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열 걸음, 백 걸음을 양보하여 물러섭니다. 어찌 보면 이해심과 양보하는 마음이 많다고 칭찬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보다 실제적인 것은 내가 가진 신앙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주장하지 않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까짓 것 우리가 형님인데...... 무식한 동생들과 싸워서 뭘 얻겠다고 덤빌 것 있나?" 우리 신앙인들이 갖는 태도입니다. 아주 칭찬할 만한 것이겠죠?

 

위에 말씀드린 다툼과 더불어서 우리가 갖는 또 다른 문제는 ’한 가정 안에서 신앙이 달라 안타까울 때, 우리는 흔히 성가정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갖고자 하는 것은 ’가정이 편안해지고자하는 목적’보다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잘 깨닫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방법을 잘못 택한 일이 모두 나쁜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방법을 택하면 사람이 만성(慢性)이 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대충대충 하게 됩니다.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가족들이 같은 신앙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달리 신앙을 가졌다면 그것을 얼마나 조화있게 잘 꾸려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모범으로 생각하는 예수와 마리아, 요셉의 가정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본보기를 깨달아 우리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싹을 잉태하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맺었던 혼인을 파기할 생각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런 갈등과 고민을 가졌을까? 하는 것이 이해심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자신의 고집을 접어둡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의 귀에 ’아들이 미쳐서 돌아다닌다’(마르코3,21)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 때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들을 찾아 나서기는 합니다만, 마리아는 갖고 있던 마음을 쉽사리 전하지 못합니다. 그저 가슴에 묻고 마는 것이죠.  또 한가지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서 십자가에 비참한 모습으로 걸립니다.  그 모습을 바라 본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상을 갖고 살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가지 않을 길을 더 편하고 좋고 쉽고 부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보기로 생각하는 예수와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 항상 편하고 화기애애한 일만 생겼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갈등과 고민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결했고,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변화시켰는지를 깨닫는 것이 오늘 성가정 축일에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들은 복음도 성가정의 행복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므온 예언자의 말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소리를 들었을 마리아가 가졌던 생각은 보통의 우리가 갖는 자세와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독서 집회서의 말씀에는 자녀로서 부모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나옵니다.  우리가 당연히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알고는 있는 내용이지만 가장 실천하지 못하는 문제가 그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가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성가정을 본받고 싶다면, 우리 안에 간직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집에 가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한 소리죠.  내가 배우자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태산같이 높이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오해가 쌓이고 불신의 골짜기는 깊어집니다.  이 말은 빈말을 반복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삶을 통하여 부모를 귀중하게 여기고, 자녀를 사랑스럽게 여기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존경받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엄청난 보물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열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본받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일이고,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이 일은 세상의 그 어느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 일이며, 대신해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가정의 사랑과 행복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더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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