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5일 (토)
(녹)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13 주일-가해-1999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6-18 ㅣ No.126

연 중  제  13  주 일 ( 가해 )

(교황주일)

          2열왕기 4,8-11.14-16ㄱ    로마 6,3-4.8-11 마태 10, 37-42

       1999. 6. 27.

주제 : 선행의 대가(代價)

 

지난 피정 때였습니다. 본당에서와 비슷하게 산에 몇 번 올라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의정부 수련장에 지난해에 비가 억수로 와서 몇 억 짜리의 공사를 한창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부터 있어왔던 등산로가 변했거나 없어졌습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제가 산에 오르는 걸 몇 번 보시더니, 하루는 "오늘도 산에 갈꺼야?" "가야죠" "그럼 낫 가져가서 길이라도 다듬지"  그렇게 해서 낫 하나를 받아들고 1시간이면 도는 ’호명산 420미터’를 2시간을 걸려 돌았습니다.  그때에 다른 신부님에게서 들은 소리, ’역시 다르구만’- 낫질하는 것을 보고 착한 일한다고 칭찬하는 소리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괜스레 기분도 좋았습니다. 짧은 말 몇 마디에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보니, 아직도 보통 사람인가 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주일에는 YMCA수련장에서 본당 야외미사를 했고, 일주일 밖에 안됐는데도 무척이나 오랜만에 본당에서 미사 하는 듯한 생각이 드는 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루에 몇 가지나 하십니까?   서두에 제가 칭찬 받은 이야기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일에 대해서 칭찬의 말 한마디에 우리 삶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달라지는 느낌도 ’칭찬 받아야겠다’는 목적을 갖고 하는 행동이 이룬 결과라면 그 감동은 훨씬 덜 할 것입니다.  당연히 내가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생각이 앞서기에 그럴 것입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수넴 여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 수넴 여인이 지혜의 눈을 갖게 되었는지,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그 여인의 재치 있는 행동으로 그 가정에는 행복이 찾아들게 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행의 대가였습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는 가족들에게 새로운 생명이란 참으로 큰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도 축복으로 늙은 나이에도 아들 이사악을 얻게 되었고, 신약의 세례자 요한도 나이 많은 요아킴과 안나의 가정에 뒤늦게 태어나 가정의 기쁨이 된 자녀였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축복이 특별한 목적 없이 행했던 사람의 가정에 도착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에 잘못된 생각을 갖고 칭찬 받을 일을 꾸며서 두어번 했다가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물론 바라던 칭찬이라는 선물은 받지 못한 채 말입니다.  어릴 때는 다른 사람이 칭찬 받는 일이 부러웠던가 봅니다. 칭찬의 결과는 사람을 크게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오늘 들은 첫째 독서를 통해서 새겨야 할 일은 어리석은 맘으로 칭찬 받으려고 억지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내세우신 조건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보이는 모습을 가리켜 아무 것이나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가끔씩 욕심도 사랑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꾸고 등장하기에 잘 구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그런 것이 있는지, 내가 하는 행동에 그런 것이 담겨있지는 않은지 구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 천주교 신자들 특히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은 그래도 선하신 분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만큼은 적어도 개인을 위한 시간을 내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수넴 여인에 비교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를 집에 모셔놓고 남편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틀림없이 우리 집에 들르시는 이 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선행으로 심안(心眼)을 받았던가 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거룩함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心眼]을 하느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눈을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적당한 때에 맞춰서 말입니다. 그 눈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고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이 세상의 생명을 마친 다음에 다시 부활할지, 아니면 그대로 죽은 상태로 있어야 할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씨앗은 죽어야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자살하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죽음은 아닙니다.  내 몸을 거름으로 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특별히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행동이라도 그 일을 칭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사람은 미래를 모릅니다. 그러나 미래를 준비하면서 삽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축복이 부러운 것도 있지만, 그 축복만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답답한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고, 우리가 올바른 사람이 받을 상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에 따라오는 결과물이지, 어리석은 마음이 섞여 원하는 대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현실의 자기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며, 우리가 사람의 가치를 올바로 본다면, 그 올바른 사람이 걷는 길의 값과 같은 특혜를 우리가 받을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6월 예수 성심 성월의 마지막 주일일고, 성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앞두고, 교황님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황님을 위하여 기도할테니 ’우리라도 쉬자’고 하는 것은 우스갯소리일 것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자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성 가득한 마음과 자세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현실에서부터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68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