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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항기 선교사들의 선교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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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역사 여행] 개항기 선교사들의 선교환경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해외선교지역에서 활동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변수들로는 피선교지 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상황, 선교사들의 사회적 배경, 신앙의 수용계층,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나타나게 되는 선교전략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먼저 개항기 한국천주교회가 처했던 대외적 또는 사회적 환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條約, 1882년) 이후에 대원군의 척화비가 철거되고 조독수호통상조약(朝獨條約, 1883년)을 통해서는 개항장에서 서구인만을 위한 종교의례의 거행이 인정되었고, 또한 외국인이 내륙을 출입할 수 있는 상황으로까지 변하였다. 프랑스도 조불조약으로 내륙의 여행권과 교회활동권을 확보함으로써 외교적으로 선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이에 따 선교사들은 선교자유의 약정에 따라 전국 각지로 여행하며 공공연히 전교생활을 시작했고, 교회를 짓기 위해 토지나 가옥을 매입하면서 지방 관료들이나 일반인들과의 사이에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것을 ‘교안(敎案)’이라고 하는데, 동양전통사회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박해정책이 자유정책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신앙생활과의 연관에서 비롯되는 분쟁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외교적 절충을 아울러 표현하는 역사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886년부터 1906년까지 약 20년 동안 교안이 계속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를 없애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899년 교민조약(敎民約條), 1901년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 1904년 선교조약(宣敎條約) 등이 차례로 맺어지기도 하였다. 이 교안들 가운데는 동학과의 관계 악화로 발생한 것들도 있었다. 전라북도의 경우에는 전동성당이 약탈당하였고, 여러 교우촌들의 신자들은 또 다시 피신 및 도망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에 대해 전라도 선교를 담당했던 보두네 신부는 1894년에 전라도와 충청도는 동학군들이 진압군에게 패하자 교우들에게 앙갚음하는 것 같다고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박해를 맞아 당시의 선교상황을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선교사업을 ‘정복(la conquete),’ 또는 ‘싸움터(la campagne)’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만큼 개항기의 선교환경은 불안정하고 도전적이어야만 하였다. “우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고 나아가 이를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정복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선교사들은 교우들한테 성사를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에 겨워 직접 선교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p.91 인용) “이렇듯 위안되는 결실을 얻게 된 주요 원인은 다섯 명의 새 조선인 신부들이 싸움터에 뛰어 들었다는 것입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p.123 인용) 위의 인용문에서 찾아지는 용어들 외에도 ‘침투’ 또는 ‘공격’이라는 수사학적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비록 ‘은유적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선교전략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반증해주는 단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 자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성만 신부는 금산읍에 침투하고 싶어 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좋은 성과를 기대하였던 것같습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p.184 인용) [2010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6-7면, 최진성(미카엘 솔내성당)] 0 4,42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