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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의 동정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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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의 동정녀들 이러한 사회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천주교는 들어오면서 바로 동정생활을 실천했고, 동정녀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결혼하지 않는 일이 극도로 억압되었던 사회풍습 때문에 신자들은 스스로 기혼자처럼 머리를 얹고 동정생활을 했다. 그들은 초기교회에서 순교자의 후손이었고, 교회 일을 돌봤으며, 순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수녀원이 세워지자 그들 중 일부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동정녀들 집안에서는 수도자나 성직자가 배출되었다. 우리 대구 지역에도 일찍부터 동정을 동경한 사람들이 있었다. 1816년에 순교한 이시임 안나는 동정녀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다 변을 당했다. 그래도 그는 교우촌으로 가서 신자들과 살다가 결국 관덕당 형장에서 순교했다. 대구에 본당이 자리잡게 될 무렵에는 이미 동정녀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의 중심인물은 서 마리아였다. 서 마리아는 서상돈의 작은 아버지인 서태순 베드로와 김 데레사의 딸이다. 서태순은 대구에서 1860년 전후로 일어난 경신박해로 옥에 갇혔다. 이때 부인 김 데레사도 함께 갇혔는데, 해산달이 가까워 풀려났다. 부인은 친정이 있는 풍기로 가는 길에 딸 마리아를 낳았다. 경신박해가 가라 앉으면서 서태순도 풀려났다. 서태순 가정은 1866년 병인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자 문경 한실로 피난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옥에 갇혔고, 그해 12월경에 순교했다. 서태순이 순교하자 부인은 일곱 살 된 마리아를 데리고 서상돈이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 이 어린이는 자라서 동정녀로 살았다. 그는 1886년 영남지방의 첫 본당이며 대구본당의 전신인 신나무골에 로베르 신부가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 일에 봉사했다. 서 마리아는 권아기(權兒女), 서희, 김선이 등을 데리고 있었으며 신앙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박금성 도로테아를 받아 들였다. 한편 동정녀의 활동은 자선부의 사업을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자선부원은 그 결속과 질서가 엄격했다. 자선부의 입회금은 10원 이상으로, 당시로는 고액의 이 입회비는 일종의 복지보험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자선부원들은 동료들끼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비록 가세가 넉넉하고 부모형제가 잘 산다고 해도 독립해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그들 상호간의 상부상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 중 누가 세상을 떠나면 공동체로서 연도와 위령미사를 봉헌했고 상복을 입어 자매로서의 정의를 표했다. 입회비는 여기에 드는 비용으로 적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동정녀들은 교회로부터 허락을 받았고, 주문모 신부는 동정을 원하는 이순이 누갈다와 유중철 요한을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부부처럼 위장해서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최양업 신부 때에는 주교가 조선사회에서는 동정으로 살기가 위험하다며 발바라라는 여성에게 동정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던 예도 있었다. 해방 이후 동정녀들은 성물이나 옷감 등을 들고 지방에 나가 그것을 팔아 생활하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례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또 동정녀들은 미사 때 기도를 맡기도 했다. 당시 전례, 독서, 기도 등은 특별히 허락된 사람에게만 부여되었던 사도직의 일부였다. 그들은 교회 내 갑자기 닥친 크고 작은 일들도 도왔다. 지방에서 대첨례를 지내러 올라 온 사람들이 행사가 끝나고 통행금지에 걸리거나 차편이 끊겼을 때 이들을 재워 주기도 했다. 교구에서는 6·25전쟁 때 신자들이 성모당에 모여 ‘평화신공’을 바치던 자발적 기도모임이 있었다. 이때 홍정옥 마리아(1892~1979) 등 동정녀들이 크게 기여했고, 교회 구성원들도 그들을 존경하며 따르고 돌보았다. 태진당 한의원 등에서는 동정녀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 주었다고 한다. 동정과 모성을 함께 지닌 여성이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만이 지닌 속성이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동정과 모성을 함께 지닌 성모 마리아를 닮고 싶어했다. 또한 이들은 함께 모여 그 힘든 과정을 헤쳐 나가고 싶어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둘만 모여도 나는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둘이라면 개인적인 이기(利己)를 고집할 수가 없다. 즉 예수님은 공동의 선, 공동의 목표를 원하신 것이다. 동정녀는 이러한 말씀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독신이 늘어나는데, 독신생활을 사회는 물론 자신도 임시적 상태처럼 생각하고 평생을 보내지는 않는지? 신앙을 가진 독신자가 굳센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는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정녀들의 삶을 찾아내 그 의미를 음미하는 일은 또 다른 가치가 있다. 우리 교회사의 한 축인 그들의 믿음과 삶을 밝혀주는 증언이나 자료가 기다려진다.(도움 : 『빛』(1984.4), 홍명연 가족, 관덕정 발바라회)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5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0 2,70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