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다섯 번째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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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1 ㅣ No.693

[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다섯 번째 서한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낙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프랑스 함선이 사진 속 고군산도 인근에서 좌초된 후, 최양업 신부와 일행은 이곳으로 피신해 한참을 머물렀다.

 

 

다섯 번째 서한에 대하여

 

다섯 번째 서한은 지난 번 서한에 이어 5개월 만에 쓴 편지다. 그가 서둘러 편지를 쓴 이유는 조선에 입국할 뻔했던 큰 사건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난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배가 마침내 마카오에 입항한 것이다. 배는 군함 두 척이었는데 그들은 1839년 조선정부가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사실에 대한 해명을 받아내고자 조선에 가려고 했다.

 

절호의 기회를 찾은 최양업과 매스트르 신부는 군함을 탔지만 전라도 연안 고군산도 부근에 이르러 강풍을 만나 완전히 난파했다. 최양업은 어떻게든 조선으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했지만 결국 영국 구조선을 따라 중국 상해로 떠나야만 했다.

 

이 편지는 그가 상해로 돌아온 지 한 달 후에 쓴 편지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군함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나룻배를 보냈지만 그 배 또한 고군산도에 이르기 전 바위에 부딪쳐 파선됐다고 한다.

 

 

상해에서, 1847년 9월 20일

 

“왕푸에서 7월에 출범한 우리는 다행히 조선 근해에서 첫 섬을 발견할 때까지 별탈없이 무사히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함선이 파도에 휩쓸려 모래 위에 좌초됐고 이내 파선됐습니다.(중략) 우리는 피신한 섬에서 한 달 이상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조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들어가려던 노력은 군함이 파선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가까운 고을의 관원들과 어떤 일에 대해 협상하며 최양업은 우연히 조선 신자 한 명을 만나기도 한다.

 

“저는 혹시 저의 본색이 탄로날까봐 조선말을 하지 않고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면서 대화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저에게 가까이 와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말고요! 나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 신자는 자신의 집안이 모두 신자이고 신자의 작은 배 한 척이 이리로 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최양업은 그때부터 희망과 조바심을 안고 기다렸으나 끝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고군산도에라도 남아있기를 원했지만 군함의 함장은 동의하지 않았다.

 

“저는 서원까지 하며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 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이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됐으므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19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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