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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서울대교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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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1 ㅣ No.692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6)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서울대교구 ③


“한 분이신 주인 위해서라면 생명도…”

 

 

1880년대 감옥의 모습. 많은 이들이 신앙을 지키다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스러져갔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중 가장 많은 숫자인 38위가 순교한 현재 서울대교구 지역(예전 한양). 서울대교구 내 새남터, 서소문, 포도청을 제외하고도 우리 신앙선조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다.

 

조상들의 순교행적은 오래 전에 일어난, 우리에게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곳곳에서 신앙선조들은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참된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당고개 · 경기감영 순교자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순교한 ▲ 이성례(마리아)는 현재 124위와 함께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자 최경환 성인의 아내다.

 

1840년 그는 동료 신자 6명과 당고개로 끌려가 당시 그의 나이 39세 때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2009년 6월 21일자 참조)

 

조용삼(탁희성 작). 집안이 너무나 가난하여 남동생, 아버지와 함께 고향을 떠나 살다가 교리를 접하게 됐다.

 

 

‘경기감영’에서 순교한 ▲ 조용삼(베드로) 순교자도 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던 중 몸이 약해져 옥사하였으므로 경기감영에서 순교한 것으로 돼있다.

 

조용삼은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했고 외모 또한 보잘 것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했다.

 

하지만 정약종(아우구스티노)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달라졌다. 정약종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을 때도 그의 열심을 칭찬해주며 신앙의 길로 인도해나갔기 때문이다.

 

1800년 4월 15일 부활대축일, 그는 대축일 행사에 참석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예비신자였던 그가 떳떳하게 믿음을 증거하자 포졸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다가 가혹하게 매질하며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너의 아버지를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마침내 그는 굴복해 석방되고 말았다. 하지만 관청에서 나오다가 동료 이중배(마르티노)를 만나게 됐고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돌아가 신앙을 고백했다. 이후 그의 신앙은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박해자들은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그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고 경기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다.

 

조숙의 처 권 데레사(탁희성 작). 냉담했던 남편 조숙을 신앙으로 이끌고 함께 동정을 지킬 것을 설득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조용삼은 옥중에서 그 무렵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계속되는 혹독한 매질에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는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 경기감영에서 숨을 거뒀다. 형벌을 받은 그는 박해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님을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밖의 순교자들

 

한양으로 압송돼 순교했다는 것만 알려진 ▲ 조숙(베드로) ▲ 권 데레사 ▲ 송 베네딕토 ▲ 송 베드로 ▲ 이 안나 순교자들도 있다.

 

권 데레사의 남편 조숙(탁희성 작). 아내 권 데레사와 함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특히 이 가운데 ▲ 조숙과 권 데레사는 ‘동정부부’로 잘 알려져있다. 권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다.

 

친척들의 권유로 조숙과 혼인을 하게 된 그는 혼인 첫날밤, ‘동정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남편에게 건네줬다. 당시 냉담자였던 남편 조숙은 편지를 받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변해 아내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으며 신앙심도 살아났다.

 

그때부터 그들은 ‘남매’처럼 지내며 15년을 함께 살았다. 1817년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들은 형벌을 참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천주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 모두 부모를 배반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1819년 그들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고, 교우들은 그들이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시 교우들은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했다’고 증언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19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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