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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배티와 인근 교우촌 출신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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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686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배티와 인근 교우촌 출신 순교자


송 베네딕토와 아들 송 베드로, 손자며느리 이 안나, 그리고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충북 진천은 예로부터 김유신 등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수려한 자연환경에 수리시설이 잘 되어있어 용수가 풍부하고 풍수해가 적으며,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서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티성지가 있는 진천군 백곡면은 서쪽으로 충남 천안시, 남쪽으로 진천읍, 북쪽으로 경기도 안성시가 있습니다. 서북에 차령산맥이 달리고 있어 면 전체가 이 구릉지에 속하며 만뢰산(612m), 서운산(547m), 무제봉(574m), 장군산(436m) 등의 산릉이 연봉을 이루며, 평균 고도 200∼400m의 구릉지가 발달하여 있습니다. 이 지역에 병인박해 전까지 배티를 비롯하여, 삼박골, 은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동골, 지구머리, 발래기, 퉁점과 조금 떨어진 지장골, 원동, 굴티, 새울, 방축골 등 15개의 교우촌이 있었습니다.

 

송 베네딕토(1798-1867년)는 충주 지역의 서촌(西村, 현재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성면, 대소면, 맹동면, 감곡면, 생극면 일대) 출신입니다.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자식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열심한 가정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아들 송 베드로(1821-1867년)와 손녀, 인천 재궁골에 살다가 시집온 손자며느리 이 안나(1841-1867년)와 더불어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배티)로 이주하였습니다. 배티라는 마을 이름은 동네 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란 말이 생겨났고,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로 불렸다고 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 이 교우촌에 포졸들이 찾아와 베네딕토와 베드로, 베드로의 딸(18세)과 며느리 안나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다시 죽산 관아로, 마지막으로 서울로 압송하였고, 결국 서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박 프란치스코(1835-1868년)는 청주 출신으로 부모님께 가정교육을 잘 받아 농사를 지으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오 마르가리타(?-1868년)와 결혼하여 아들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4형제를 낳았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절골)로 이주하여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1868년 7월 19일 죽산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이에 가족과 함께 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때 포졸들은 어린 자식을 업고 산속에 숨어있던 오 마르가리타를 발견하고 체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마침 동정을 살펴보려고 산에서 내려와 동네 외인인 신털숙의 집에 갔습니다. 그는 “내 집에서 자고 동정을 아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인의 말을 듣고 그날 밤 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뒤로 포졸에게 고발하여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죽산 관아로 압송되어 갔습니다. 이때 그는 동생 필립보와 큰아들 안토니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에 “우리는 위주(爲主)하여 죽을 터이니, 혹 너희가 또 잡혀 죽지 아니하거든 아무쪼록 네 조카들을 위로하여 잘 지내고, 부모께 효양하여 본분을 다하고 살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갇힌 지 한 달 뒤 죽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는 1868년 8월 14일(음)이었습니다.

 

이 순교자들이 갇히고 순교한 죽산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으로 이러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죽산성지는 몽고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진(夷陳)터, 또한 “거기에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해서 잊은터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치명일기” 등의 교회기록을 살펴보면, 이곳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이 25명이나 됩니다.

 

죽산에 갇혔다가 서울에서 순교한 송 베네딕토는 아들과 손자며느리와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이는 가정공동체의 열심한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아버지의 신앙이 그대로 자식들에게 옮겨졌고, 시집와서 보고 들은 손자며느리에게 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신앙은 죽음까지도 이겨내었습니다.

 

또한 죽산에서 소중한 자식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순교한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자의 신앙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그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시켰고, 집안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우리 집안은 순교자 집안인만큼 꼭 훌륭한 신부가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주교구 박성운 신부님(베네딕토, 1944년 12월 수품, 2003년 11월 선종)이 바로 그 순교자 집안의 증손자입니다.

 

중부고속도로에서 일죽 나들목을 나와 우회전한 뒤 첫 신호 등에서 좌회전하면 죽산성지가 나옵니다. 잘 가꾸어진 이 성지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순교한 송 베네딕토 가족들과 박 프란치스코 부부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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