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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파리! 다양한 색을 가진 도시! 그리고 진한 핏빛 커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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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다녀오다] “파리! 다양한 색을 가진 도시! 그리고 진한 핏빛 커피”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파리’라는 도시는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카페의 벽이든 관광 안내책자이든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파리’라는 단어는 전 세계인들에게 한껏 낭만적인 충동을 일게 한다. 비록 프랑스인들이 사랑하는 작가 중 하나인 모파상은 쳐다보는 것조차 거부했고 객관적으로도 다양한 파리의 색채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철골구조의 에펠탑이지만, 이제는 그 탑이 파리의 상징이 되었다. 그 아이러니도 파리의 색깔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파리는 작고 화려한 흰색 양산에 화려한 깃털을 달고 한껏 모양을 낸 높은 모자, 긴 드레스에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사뿐거리며 걷는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유리창 너머까지 향기를 뿜어내는 예쁜 색을 가진 향수로 마무리한 그녀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파리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아름다우며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매력을 수백 권의 책으로라도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파리는 우리 생각보다 더더욱 색다르다. 낭만만 가득해 보이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최첨단의 공업기술로 가장 뛰어난 비행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유럽사회의 목소리를 주도하는 정치적인 힘, 시민의 힘으로 왕을 단두대에 처형했던 콩코드 광장의 역사도 파리의 또다른 면이다. 깊고 차가운 이성의 힘과 폭풍같이 강렬한 감성이 가장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민족적 뿌리가 뒤엉켜있고 가장 가깝고도 긴 국경을 맞닿고 있는 독일이라는 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독일은 왠지 흑백이 어울리는 나라라는 생각이 주제넘은 확신이라 할지라도.
가톨릭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봤을 때는 파리는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파리라는 도시에서 프랑스라는 나라로 눈을 넓혀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프랑스는 “교회의 맏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교회 안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또다시 다양한 색채를 뿜어내는데,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성인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며 가장 많은 성모의 발현이 목격되고 인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교회가 가르쳐 왔던 사고가 사회 전반에서 폭 넓게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파리 그리고 프랑스를 순례하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종교적 사건과 거룩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소르본대학가에서 낭만에 취하더라도 그곳에서 배출한 알베르토, 토마스아퀴나스, 보나벤투라를 비롯한 너무도 위대한 성인 학자들의 깊고 진지한 호흡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걷던 퇴역 군인이 ‘부활의 롤랑’ 수사로 살아냈던 시간의 색깔을 목격하길 바란다. 그는 길거리에 구르는 낙엽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고 가르멜수도원에 들어가 묵묵히 청소와 샌들을 고치는 일을 하며 살았고, 오히려 그 하찮은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결국 ‘특별한 평범함’을 실현해 내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된 클뤼니 수도원 개혁적 움직임에 마음이 움직이면 좋겠다. 철저한 침묵으로 하느님을 찾는 카르투시안들의 역설적인 역동감을 체감했으면 한다. 노트르담 성당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곳 그 광장에서 세상과 종교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겪어야 했던 불필요하고 안타까운 성전기사단의 죽음도 기억해보자. 몽마르트 언덕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는 동시에 그 자리에서 세상을 움직일 7인의 예수회 서약식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지금은 수많은 순례자들로 화려하게 빛나는 루르드의 가장 큰 비밀이, 다름 아닌 베르나데트처럼 보잘것없는 이를 택해서 거룩함이 온 세상에 존재함을 드러내신 그분의 그지없는 사랑임을 알기를 원한다.
파리는 다양한 면모와 더욱 다양한 색채를 가진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별한 색깔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색이다. 그 색은 아주 짙은 진홍빛,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흐르는 ‘피’의 색깔이다.
2층 성당으로 오른다. 정면의 성모상과 함께 하느님과 침묵의 시간을 잠시 보내고 고개를 돌리면 놀랍게도 당시 조선으로 떠나는 네 신부님들의 파견예식이 그려진 그림을 한쪽 벽에서 볼 수 있는데, 그 그림은 근대 올림픽을 시작하는데 공헌했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의 부친의 그림인지라 어린 쿠베르탱 남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 어린이가 아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위앵 신부 그리고 도리 신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가진 이 신부님들이 이 그림의 주인공들이며, 그들이 조선으로 떠나기 전에 있었던 파견예식을 그리고 있다. 이들 모두 누런 조선 땅의 색을 진홍빛으로 바꾸게 되는데, 그들이 이곳 낯선 땅에 숨어 들어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시점이다.
지하 박물관에서는 더욱 진한 핏빛 색채를 보고 맛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의 유물들과 반가운 한글 이름들을 본다. 조선 뿐 아니라 캄보디아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유적과 그림들이 있지만, 박물관으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커다란 석조탁자에 새겨진 한글 이름들을 마주하면 그 이름들이 마치 이 박물관의 주인처럼 느껴진다. 비록 서로 이름과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색의 피를 가졌음을 세상에 알려주었다. 네 신부님들을 포함한 10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93명의 조선인들의 피는 150여 년 전에 조선의 땅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103위 성인들의 목록이다.
파리의 색, 아니 프랑스의 색은 마치 그들의 국기처럼 희고 파랗고 붉다. 파리외방전교회를 나서면 프랑스 국기에 칠해진 우정과 박애를 뜻하는 붉은 색이 왠지 나머지 색깔보다 좀 더 짙어보이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파리외방전교회를 뒤로하고 다시 커피향을 내뿜는 사거리를 지나면서, 조선 땅에서 순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었던 음식이 놀랍게도 커피 한잔이라고 말했다는 순교 성인 신부님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고는 그 향기에 마냥 취하지는 못한다.
핏빛 커피향을 코로 냄새 맡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곳! 그 작은 사거리는 파리가 가진 여러 가지 색깔 중에 으뜸가는 색을 볼 수 있고, 또 최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평신도, 2020년 여름(계간 68호), 김원창 미카엘(평화방송여행사)] 0 2,31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