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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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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294

기도란 무엇인가?

 

 

1. 기도란 무엇인가?

  

교부들과 성인들의 기도에 대한 짤막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기도에 대한 이해가 쉽게 다가온다. 먼저 성 아우구스띠노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하느님을 향한 애정 가득 찬 움직임이고,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라고 정의한다. 성 요한 다마스체노는 “하느님께 마음을 올리는 것”이 기도라고 표현했다. 또한 성 요한 금구는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하느님과의 친교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친한 친구로서의 친교이다” 라고 말한 아빌라의 데레사의 견해와 나싸의 성 그레고리오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레고리오는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라고 정의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고,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여 드높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용서를 청하고, 필요한 은총을 구하며 하느님께 사랑을 드린다. 우리의 생애 전체가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해서는 생활 자체는 물론이요,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기도로써 표현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도는 청원을 넘어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2-23) 그러기에 기도는 아버지와 일치하여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의 가장 큰 목표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를 이룬 만남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더 깊은 자아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아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다.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직면하는 것은 기도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파스카의 여정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심의 여정에 동반하는 고통스런 자아인식 또한 우리를 참된 기도로 인도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의 열매인 인내와 온유, 평화가 우리 몸에 배이게 되는 것이다. 

  

성녀 카타리나도 우리의 내면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참된 자신을 인식하는 방이요, 두 번째 방은 하느님 인식의 방이다. 첫째 방을 오롯하게 거쳐야만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 마치 책의 한 장 한 장을 넘겨야 내용을 다 알게 되듯 참된 자아인식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가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깊은 곳에 은밀하게 숨어 계시면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성령만이 참된 자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이시다.

  

이렇게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간 영혼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해 시선을 두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또 다른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인간은 기도함으로써 삶 전체를 하느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리게 된다. 그러기에 일상의 매 순간이 오롯이 하느님께 봉헌되도록 마음을 집중하고, 그것을 위해 내외적 환경을 단순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 만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2. 기도의 다양한 방법들과 실습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도의 첫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염경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도서에 나와 있는 주요 기도문이나 몇 가지 특수 기도를 외우는 가운데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 단계를 거쳐 좀 더 깊이 있게 예수님의 전 생애와 일치하고 싶은 마음이 자랄 때 묵상기도나 더 나아가서는 관상기도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반드시 염경기도(소리기도)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도의 각 단계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성경 읽는 법을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성경 읽기를 매일의 삶에서 수행해 나가는 방법에서 시작해서 염경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vina) 

  

거룩한 독서, 성독으로 통용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하고 정감적인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맛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관상적인 일치에로 나아가고자 하는 고대 수도승들로부터 이어온 수행 방법이다. 즉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단순하고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자신의 전 존재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읽고 들으며 그분의 현존 안에 깊이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의 전통은 유대 회당에서 랍비들과 그 제자들이 했던 성경 묵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MacGinty, 1986).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이며 마음을 순화하고, 선에 나아가려고 노력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 안에서 시공을 초월해 언제나 하느님 말씀에 대한 독서와 묵상을 자신들의 신앙적 삶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저희의 성읍에서 살고 있다가 칠월이 되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와서 선비 에즈라에게 청했다. …사제 에즈라는 특별히 만든 나뭇단 위에 올라가 섰고…에즈라는 백성들이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법전을 읽으며 풀이하여 주었다”(느헤 8, 1-8). 

  

12세기 카루투시오회의 원장이었던 귀고 2세(1174~1180)가 그의 저서 『The Ladder of Monks』에서 ‘Lectio(읽음), Meditation(묵상), Oratio(기도), Contemplatio(관상)’ 의 4단계를 제시하였으나 수행해 가는 동안 위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밟아가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성령의 감도하심에 따라 순서를 넘어설 수 있다. 

  

◇ 방법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1) 자세 

(2) 호흡

(3) 마음

 

2)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4) 성서 말씀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고 듣는다.

 

특히 주의할 점은 빨리 읽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과 전 존재로 읽는다는 점이다. 손으로는 성서를 들고 읽을 곳을 편다. 눈으로는 성서의 말씀을 보고, 입으로는 그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읽는다. 귀로는 그 말씀을 듣고, 기억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다.

 

5) 성서 말씀 중에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물고 마음에 닿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표시해 둔다. 그 구절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6)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읽어 내려간다.

 

7)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끝마친다. 일어나기 전에 고요히 감사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마음에 닿았던 성서 구절들 중 하나를 택하여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한다. 그 구절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선택한 성서 구절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되뇐다.

 

 

염경 기도(소리기도)

  

염경기도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속의 감정을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소리를 내어서 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형식 즉, 교회가 정한 기도문을 마음속으로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거나, 외어 바치는 기도를 말한다. 기도서의 모든 기도문, 미사경문, 로사리오기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염경기도는 개인적으로,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다.

  

어느 여성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찾아가 자기는 관상을 할 줄 모른다고 걱정하며 말했다. 성녀는 그녀에게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공경하기 위해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번씩 외우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 기도도 바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성녀는 기도를 바치는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당신은 벌써 관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계속하십시오.” 

  

염경기도(念經祈禱)를 하는 동안에도 묵상 기도를 하고 싶은 심정이 생기면 그 심정이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묵상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혹은 그냥 염경기도를 계속하면서 내면에서 묵상 기도를 할 수도 있다.

 


묵상 기도

  

우리가 염경기도만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젖어들기란 매우 어렵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을 사랑하며 신앙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묵상기도(?想祈禱)가 필요하다. 

  

묵상기도는 마음의 기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사랑에 찬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몰두하여 하느님의 현존(現存) 속에서 하느님과 관계된 모든 일에 관해 생각에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묵상은 ‘생각만으로 드리는 기도’, ‘정신의 기도’ 라고 할 수 있으며, 지적(知的)인 행위와 의지가 결합되어 있다. 

  

묵상의 주제로는 신앙의 신비들, 신앙의 진리, 예수님의 일생, 교회의 가르침, 성경의 내용, 성인(聖人)들의 생애 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신앙을 보다 깊이 통찰하게 되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바를 깨닫게 되어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묵상에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르려는 열망과 의지, 결심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묵상은 아직 신앙의 초보단계에 있는 신자들도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진보하는 영혼은 기도의 높은 수준에까지 도달하여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의 내적 기쁨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된다. 

  

그러나 묵상은 관상(觀想)과는 구별된다. 현대의 많은 영성대가(靈性大家)들이 주창한 많은 묵상법들 가운데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de Loyola)가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에서 설명한 방법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묵상은 우리 신앙생활에 다음과 같은 이로움을 준다.

 

○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하심,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인류의 구원계획, 섭리와 같은 진리를 깨닫게 한다. 

○ 명예, 재산, 쾌락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찾게 한다. 

○ 자신의 나약함, 결점을 알고 이를 교정할 힘을 얻게 한다. 

○ 내적 생활[영성생활]을 들어 높이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욱 굳혀 준다. 

○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바칠 의욕을 북돋아 준다. 

  

따라서 덕에 진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묵상이 꼭 필요하다.

 

 

관상 기도

  

관상은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하느님께 대한 본질적인 것의 터득에서 오는 것이므로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일치로 발전한 나머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을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목적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으며, 현대의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 역시 “신학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몸소 보여 주셨고, 그 길을 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즉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우리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우리도 서로 하나가 되라고 부르신다(요한 17장).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관상은 우리의 사고, 의식, 상상을 초월하여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또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탄식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리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신다.

 

하느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행위.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시고 있다. 그 친교의 온전한 형태는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직관능력의 씨앗을 받게 된다. 관상은 그 씨앗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싹트게 하여 꽃피우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교회 내 많은 성인들이 영성생활의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를 실천하였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친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 등에 매개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진다.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우기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목적이라기보다는 삶의 주제요 내용이며 생명의 원리가 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에 도달하는 양식에 따라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몰입하는 불교의 선(禪)은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비그리스도교 선언문 2).

 

한편 후자 즉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과연 인간의 노력으로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의문스럽게 여기는 견해도 있어서 학설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관상은 완덕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완덕 자체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완덕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은 일반 신자들의 일상생활이나 활동수도회의 활동생활 가운데 관상의 경지에 도달하게 도와주시기도 하고 교회 내 관상기도 한다. 관상은 본직적인 것과 ‘한 가지의 필요한 것’(루가 10:41) 즉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나오는 관상 및 관상기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그 무엇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으로 모두를 얻느니라. 

님을 모시는 이 아쉬울 것 없나니 

님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니라.

                         - 아빌라의 데레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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