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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진리의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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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05 ㅣ No.578

[현대교회의 가르침] (26) ‘진리의 광채’ (1)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따르는 윤리적 삶 천명

 

 

세상 속에서 비춰지는 교회의 모습들 가운데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미지는 윤리의 교사로서의 교회 이미지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윤리 문제들에 개입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일종의 윤리 교사의 역할을 해왔다. 윤리적 혼돈의 수위가 높아지고 도덕적 가치의 상대주의가 더 큰 목소리를 얻어가는 현대 세계에서 교회는 더욱 윤리 교사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는 것 같다. 때때로 교회가 고루한 도덕 선생의 이미지로 보일 수 있는 위험도 간혹 있지만, 도덕과 윤리의 원리와 원칙을 정초하기 어려운 현대 세계 안에서, 윤리와 도덕에 관한 교회의 입장 표명은 매우 중요하다. 

 

1993년 8월에 반포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열 번째 회칙인 「진리의 광채」는, 세속의 윤리적 혼란과 교회 안에서 마저도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회의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성경과 살아 있는 사도적 전승에 바탕을 둔 윤리적 가르침의 원리를 제시”(5항)하려는 교회의 노력이다. 

 

이 회칙의 현실 진단에 따르면,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 속에서 윤리와 가치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흐름이 현대 세계 안에서 윤리적 규범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 안에도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 관련하여 인간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심지어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수많은 의심과 반대가 팽배하고”(4항) 있는 현실이라고 회칙은 지적한다. 회칙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신앙과 윤리가 별개의 문제로 여겨지는 경향, 진리와 자유 사이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유대의 부정, “내적으로 악한 행위를 언제나 예외 없이 금지하는 윤리 계명의 보편성과 불변성”(115항)을 강조하는 자연법적 전통과 개념들을 거부하는 풍조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이 회칙의 기본 목적은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이 왜곡되고 부정되는 위기 속에서, 가톨릭 교리의 근본 진리를 상기시키기 위해,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 전체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는 것이다. 회칙은 결혼과 성 윤리, 이혼과 재혼의 문제, 낙태와 생명의 문제, 동성애 문제 등, 구체적 윤리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윤리 신학의 근본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학문적(disciplinary) 성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2장의 내용은 높은 차원의 윤리 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회칙 스스로가 무엇보다도 윤리 학자와 윤리 신학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회칙은 교회의 전통적인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표출하는 교회 안의 일부 윤리 신학자들을 암시하면서, 교회 안에서의 윤리 신학자의 직무와 봉사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109항-113항). 이처럼 회칙의 목적이 학문적 특성을 지니고 있고 회칙의 주 대상자가 윤리 신학자들이기 때문에 회칙의 내용을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좀 어렵다. 

 

회칙의 기본 얼개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마태오 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의 내용을 매개로 해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성서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2장은 현대 윤리 신학에 나타난 세속적 경향과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기본 원리들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3장은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사목적, 실천적 노력들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회칙들이 그러하듯이, 「진리의 광채」 역시 성서적, 신학적, 사목적(실천적) 논의 구조를 띠고 있다.

 

 

윤리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윤리 문제에 있어서 어떤 절대적 기준과 규범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 계몽주의 전통과 문화 인류학의 발전은 가치와 윤리에 있어서 다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거대 담론과 메타 담론의 상실을 주장하는 현대 세계 안에서 “진리”라는 용어는 매우 낯선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의 제목으로 “진리의 광채”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윤리 문제들에 있어서 절대적 진리임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오 19,16)라는 질문을 던진 부자 청년은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다가와 윤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모든 사람”(7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또한 그 질문의 내용은 “윤리적 선과 자신의 삶의 완성 사이의 연관성”(8항)을 포함하고 있다. 회칙은 분명하게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들으려면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한다”(8항)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기초임”(19항)을 표명한다. 

 

회칙은 비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선과 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윤리적 요구에 따라 살아간다면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천명한다(3항). 윤리적 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곧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뜻한다는 것이다(9항). 즉, 인간 안에 심어진 자연법을 따라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에 결정적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자세히 설명하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며, 새 생명을 위한 은총을 주는”(25항)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회칙은 윤리 문제들에 있어서 규범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진리는 추상적 관념의 진리가 아니라 인격적 진리임을 거듭 선언한다. 회칙은 진리의 문제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인격주의(personalism)적 접근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자유와 진리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윤리 신학의 기초 

 

회칙은 현대 윤리신학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교 윤리에 대한 왜곡과 부정의 경향들에 대한 교도권적 식별을 강조하면서 건강한 윤리적 가르침을 위한 윤리신학의 쇄신을 요청한다. 회칙은 “어떤 특정한 신학 체계나 철학 체계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29항)고 분명하게 밝힌다. 단지 식별을 위한 윤리 신학의 필수적 원칙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가르치고자 한다. 

 

회칙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자유만을 강조해서 진리와 자유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까지 격상시켜, 모든 가치의 원천이 되게 해서”(31항) 진리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32항). 이러한 경향은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즉, 현대의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의 풍조 안에서 자유와 양심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고 “성실성과 진실성 그리고 ‘편한 마음’(sincerity, authenticity, and ‘being at peace with oneself’)”이라는 기준에 정초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회칙은 지적한다. 따라서 회칙은 자유와 양심은 언제나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진리에 순응해야 함을 강조한다. 참된 자유는 오직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참된 윤리 신학은 “자유가 지닌 진리에 대한 의존성을”(34항)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이런 관점에서 회칙은 2장에서 자유와 법(35-53항), 양심과 진리(54-65항), 근본적 선택(65-70항)이라는 윤리 신학의 필수 주제들을 다루면서 윤리적 행위의 본질(71-83항)에 대해 설명한다.

 

 

윤리적 선은 교회의 쇄신과 사회의 변화를 지향 

 

회칙은 진리를 행하는 것이 윤리적 선임을 천명한다(84항). 윤리적 선을 실천하는 것은 교회 생활의 쇄신과 사회생활의 쇄신을 뜻한다. 회칙은 거듭 진리와 자유, 신앙과 윤리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한다. 회칙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 객관적 윤리 규범들이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의 기초임을 거듭 천명한다. “복음화는 윤리의 선포와 제시까지도 포함한다”(107항). 왜냐하면 복음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 선과 악에 대한 진리의 목소리”(117항)를 반영해야하기 때문이다.

 

* 정희완 신부는 안동교구 소속으로 199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4년 8월 3일, 정희완 신부]

 

 

[현대교회의 가르침] (27) ‘진리의 광채’ (2)


‘실천’으로 열매 맺는 윤리적 가르침 선포

 

 

I. 회칙의 의의와 공헌 


전통에 대한 강조 

 

회칙 「진리의 광채」는 현대 윤리신학 안에서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는 비례주의(proportionalism)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경향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학술적 문헌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회칙은 학문적 특성을 넘어 여러 측면에서 고유한 위치를 갖는다. 무엇보다 회칙은 다른 어떤 회칙들보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다. 회칙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복구와 활성화를 통해 현대의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표방한다. 따라서 회칙은 한 해 전에 반포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새롭게 집대성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의 연계를 강조한다. 회칙의 관점에 따르면, 현대 윤리신학과 많은 윤리 신학자들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통일체적 특성을 포기함으로써 윤리적 규범의 합의점과 권위를 스스로 상실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연법의 보편성과 불변성에 대한 옹호 

 

회칙의 전통에 대한 강조는 윤리신학에 있어서 자연법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자연법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성의 빛에 비추어 간파할 수 있는 윤리적 지침이다. 회칙은 자연법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복구를 통해 현대의 윤리적 상대주의를 뛰어넘고자 한다. 회칙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 윤리신학의 “물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반대는 자연법의 전통적 개념을 반대하는 차원에까지”(47항) 이르렀기 때문이다. 

 

회칙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법은 하느님의 영원한 법의 인간적 표현”(43항)이다. 즉, 자연법은 영원한 신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법은 참여적 신율(theonomy)이기 때문에 자율(autonomy)과 타율(heteronomy)이라는 두 극단적 방식을 피한다. 

 

회칙은 자연법의 두 가지 특성인 보편성(universality)과 불변성(immutability)을 강조한다. 자연법의 이 두 특성을 옹호하기 위해 회칙은 인간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단일적 인격체로 존재한다. “육체를 포함하는 전 인격체는 인간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으며, 인간이 그 윤리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안에서다”(48항). “자연법은 인간의 고유하고도 원초적인 본성, 곧 ‘인격체의 본성’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자연법은 자유와 본성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다”(50항). 

 

세속의 학자들은 현대 세계 안에서 문화적 변화를 강조하고 자연법의 보편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규범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종의 역사의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회칙은 현대의 이러한 역사의식에 반대한다. 인간은 다른 문화들 속에 존재하지만 인간의 어떤 특성 또는 인간 본성은 문화를 초월하며 문화의 척도가 된다고 회칙은 주장한다. 즉,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 본성이 자연법의 보편성과 불변성의 기초라고 회칙은 말한다(53항). 물론 이러한 자연법의 보편성 주장이 인간 존재의 개성과 각 개인의 절대적 고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 행위는 참된 선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51항). 

 

자연법의 보편성과 불변성에 대한 강조는 결국 인간 윤리 행위는 어떤 분명한 규범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을 감안하면서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윤리 규범에 대해 가장 알맞은 정식을 추구하고 발견할 필요성을 갖는다.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윤리 규범의 올바른 정식화와 권위 있는 해석은 교도권이 역사적 상황들에 비추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며, 동시에 신자들의 신앙 감각과 신학자들의 신학적 성찰 작업들과 협력의 과정을 요구한다(53항). 

 

하느님, 구원, 윤리의 상관성 

 

이 회칙이 반포된 후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의미이든 또는 긍정적 의미든, 회칙의 대담함에 놀람을 표현했다. 왜냐하면 회칙이 현대화된 세상에서 대담하게 전통적인 윤리를 재강조하고, 탈권위화 되어가는 현대 세속 사회 안에서 교계적 권위주의의 경향을 드러내며, 교회의 가르침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억압적인 교조주의의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칙의 대담함은 무엇보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점점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복음주의적 색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중심에 놓은데 있다. 윤리적 문제들은 인간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즉, 윤리적인 문제들은 하느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신학적 탐구의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단순히 인간의 영성적 대상이거나 인간 존재의 깊이를 명료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적 삶에 관한 탐구의 대상이다. 하느님에 대한 질문과 탐구는 결국 인간의 윤리적 문제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래서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II. 논쟁과 한계 


진리와 자비 

 

회칙이 주장하는 진리가 추상적 관념의 진리가 아니라 인격적 진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진리라는 관념은 자칫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진리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이 세 표현 모두 다 올바른 고백이며 올바른 서술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저는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신자들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은 이탈되어 있는 초월적인 것, 모든 관계를 벗어나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다.” 

 

교도권과 신학(또는 신학자) 

 

회칙의 반포 후 많은 윤리 신학자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회칙 안에는 윤리 신학자들이 도덕적 상대주의를 가르치고 있다는 잠재적 비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칙은 이 시대의 윤리 신학이 상대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화의 맥락 안에서 신중한 식별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12항). 그리고 무엇보다 “윤리 신학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 직책 수행을 통하여 교의와 윤리 분야의 교도권 가르침에 대한 충직한 동의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111항)고 강조한다. 

 

교회의 가르침의 직(the Church’s teaching office)은 단순히 교도권 그 이상을 포함한다.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는 신자들의 신앙감각, 신학자들의 공동체, 교도권이라는 세 개로 분류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이 셋은 수직적 상하의 질서관계를 뜻했지만, 공의회 이후에는 일종의 삼각형적 협력관계로 이해된다. 신앙감각, 신학, 교도권이라는 세 권위는 교회의 가르침의 직에 각자의 역할이 있다. 어떤 하나의 권위가 다른 두 권위들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할 수는 없다. 즉, 교도권 역시 신자들의 신앙감각에 늘 귀 기울이고, 신학자들의 성찰들에 언제나 열린 태도로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의 권위에 대한 이해는 예전과 다르다. 권위는 소유가 아니다. 권위는 관계의 질이다. 권위는 어떤 개인들에게나 어떤 객체적 대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권위는 두 실재들(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그 권위를 증명하는 것)의 관계 사이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선포와 수행(실천)의 간격 

 

회칙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윤리적 진리의 분명하고도 확고한 제시는 결코 그 깊고 성실한 준수와 분리될 수 없다”(95항). 교회는 “선포된 말씀의 선물뿐 아니라 생활로 실천된 말씀의 선물을 통하여”(107항) 복음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 윤리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선포는 교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살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제로 수행할 때 그 실제적 효과를 나타낸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이 참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교회 자신이 먼저 그 가르침을 수행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와 교회의 쇄신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4년 8월 10일, 정희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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