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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끊임없는 기도: 예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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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88

끊임없는 기도 - 예수의 기도

 

 

1)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데살 5,17)

 

에바그리오는 말한다.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깨어 있고, 단식하라고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성은 기도하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기”때문이다. 증거자 막시모는 덧붙이기를 “성서는 불가능한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하다’와 ‘언제나’ 이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은 전혀 일의적(一意的)이지는 않았다.

 

메쌀리아니들은 다음 주장과 함께 바울로 사도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즉, ‘기도하다’는 ‘기도문들을 말하는 것’을 뜻하며, 또 ‘언제나’는 모든 이교적인 일, 무엇보다도 ‘손노동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체메띠(acemeti)은 공동체의 담장 안에서 기도가 결코 중단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공동체 안에서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여러 그룹의 수도승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성무일도 안에서 계속해서 항구한 기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원칙은 ‘영구적 성체 흠승’과 ‘영구적 로사리오’란 명칭 하에 최근 서방에서 확산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을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메띠’(acemeti)라고 불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 해결책은 오리게네스에게서 볼 수 있다. “기도를 필요한 일들에 결합시키고, 일들을 기도에 결합시키는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 오로지 그렇게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계명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간주할 수 있겠다.” 여기서 성인의 전 생애는 하나의 위대한 기도로 간주된다.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는 단지 그 한 부분이 된다.

 

희랍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주석가의 이 가르침은 라틴 계통에서 가장 탁월한 아우구스띠노와, 시리아인들 가운데 으뜸인 아프라테(Afraate)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기도와 일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남아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아체메띠’의 창설자 알렉산드로는 하루 24시간에 부응하는 24개의 일상 수행들을 제시한다. 후에 교회법적인 일곱 시간 규정이 발전되었지만, 모든 성인은 개인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기도시간을 다시 규정하였다.

 

이 모든 다양성의 동기는 무엇인가? 고전적 해결책은 ‘일’을 하나의 ‘기도’로 만들지만, 훌륭한 내적 자세로, 그리고 관상 안에서 즉, 기도 안에서 나고 양육되는 ‘디아테시스 아가테’(diathesis agathe)로 일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언제나 까시아노의 표현에 따른 ‘기도의 상태’(orationis status)를 살고자 하는 시도로 기도에 직접적으로 바쳐진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피곤함도 분심도 기도 행위의 외적인 지속을 방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기도의 삶은 하나의 상태, 하나의 정화(katastasis), 하나의 습관적 마음 자세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 이런 습관적 자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2) 짧은 기도의 수행

 

즉시 지속적인 기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구송기도에 충실하고 그것을 잘 암송함으로써 시작할 필요가 있다. 독수도승 테오파네(Teofane)는 ‘기도의 규칙’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적 사부와 함께 기도문을 정해야 하며, 그 다음 거기에 특별한 필요들이나 또는 마음의 영감에 의해서 제시된 다른 기도문들이 부가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투쟁에 대한 러시아 전통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교부들은 분심을 피하려고 반복해서 하는 짧은 기도들을 창안하였다. 까시아노도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까시아노에 의하면, 이 짧은 기도들은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나이, 팔레스티나, 시리아, 전 그리스도교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기도들의 일반적인 특성은 그 ‘간결성’과 ‘단순성’, ‘지속적인 되새김’(meletan, meditari)에 있다. 초기에는 상당히 다양한 양식들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금욕가들에게서 그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양식들이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시편 69,2 “오! 하느님, 저를 도우러 오소서, 주님, 저를 구하러 어서 오소서”와 같은 것이다. 그 후 ‘예수기도’의 유일한 이점으로 인해 자유로운 양식들을 배제하게 되었다.

 

 

3) 예수기도

 

‘예수기도’는 희랍어 ‘에우케 예수’(euche Iesou)와 동일한 러시아어 ‘몰리트바 지수소바’(molitva Jisusova)의 문학 전통이다. 수세기 전부터 다음의 형식으로 고정화되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러시아인들은 ‘저에게’에다가 ‘죄인’을 덧붙인다). 이 기도는 정교회의 심장이며, 비록 그 기원이 보다 고대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오늘날 동방 그리스도교 안에 매우 활발히 남아 있는 수행이다.

 

비잔틴과 러시아 수도승들은 ‘암송’과 그것들을 동반하는 ‘머리 숙임’을 세도록 도와주는 로사리오의 방법에 예수기도를 결합한다.

 

11세기 중엽까지 이 기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14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널리 확산되었다. ‘필로칼리아’(Filocalia) 안에 선별된 저자들이나 그 외의 여러 저자들은 서로 경쟁하듯 이 예수기도의 탁월성을 찬양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은둔자 테오파네는 필로메노 아빠스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열렬히 주님을 불러라. 성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노동과 식사 중에, 그리고 너의 잠자리 위에서 중단 없이 이것을 하여라. 한마디로 눈을 떠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렇게 하여라. 정확히 햇볕에 어떤 것을 쪼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의 태양이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예수기도 안에서 3단계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에서처럼 예수기도에 있어서도 구송의 단계, 정신의 단계, 마음의 단계 이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구송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치를 지닌다. 자주 반복되는 짧은 기도수행의 경우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둔자 테오파네는 이 기도에 성사적인 능력을 돌리기를 원했던, 그리고 이 기도 안에서 일종의 부적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한다.

 

내용과 관련하여 14세기부터 많은 저자들이 그 양식의 우수성을 경쟁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하였고, 이 기도의 모든 효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첫 번째나 두 번째 요소에 강조점이 주어질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예수기도는 탄식(penthos)을 낳는 수도승적 환경 안에서 유행하던 수많은 기도들 중 하나이다. 반대로 보다 최근의 작가들은 오히려 첫 번째 요소, 즉 주님의 이름이 지닌 특별한 힘에 강조점을 두기를 좋아한다. 실제로 흠숭과 통회,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심연에 대한 환시, 그리고 모든 심연을 뛰어 넘는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분의 자비를 분리시키지 않는 것이 더 낳다.

 

세 번째는 마음의 단계이다. 은둔자 테오파네는 말하기를 “마음 안에서 다음과 같이 정신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라.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네가 이렇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이 기도를 통해 마음으로 들어가 갈망했던 목표에 도달할 때, 너의 무질서한 생각들이 멈추고 네 영혼의 움직임들을 이끌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 마음과 정신을 결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5) 정신적-물리적, 과학적 방법

 

이 기도의 목적은 어떤 마음 상태를 낳고 강화하는 것이다. 아토스 산의 헤시카스트들은 이 내적 융화의 과정을 수월하게 하려고 수도승 니체포로(Niceforo: 13세기 후반부)가 최초로 이론화한 정신적, 물리적 기법을 계발하였다. 이 기법은 어떤 윤리적 준비, 순수한 양심, 즉 ‘아메림니아’(amerimnia: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전제한다. 그러나 밀폐된 방,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에 앉는 자세, 온 정신으로 시선을 배 한가운데, 즉 배꼽 위에 두면서 가슴 위에 턱수염을 기대어 놓는 것 등과 같은 외적인 조건들 역시 필요로 한다.

 

이 수행 자체는 그 형식의 반복과 느려진 호흡의 박자 간에 하나의 동시화에 도달하게 될 호흡에 대한 규칙적인 늦춤을 포함하고, 마음의 장소에 대한 추구에 본능적인 자아에 대한 어떤 정신적인 탐구와 항구하게 예수를 부를 것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고 어둠으로 가득하지만, 기도의 열매인 정신의 통합은 곧 기쁨, 형언할 수 없는 환희, 적이 공격을 못하는 불가침, 하느님께 대한 보다 큰 사랑, 그리고 어떤 위대한 빛(후에 ‘타볼산의 빛’이라고 칭하게 될)을 낳는다.

 

 

6) 러시아의 순례자

 

자신의 영적 사부에게 했던 한 순례자의 진실된 이야기들, 이미 여러 언어로 출판된 이 이야기들은 서방 독자들 가운데 예수기도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단순한 농부인 순례자는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전통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영적 사부(starez)가 그에게 단순화된 한 방법을 권고한다. 점차 3.000번에서 6.000번으로, 마침내는 12.000번으로 매일 그 횟수를 늘리면서 예수를 반복해서 부르는 방법이 언급된다. 그런 다음 순례자는 더 이상 회수를 셀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입술은 이제 잠자는 중에도 저절로 움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 움직임은 입술에서 혀로 옮겨 간다. 그 다음 기도는 혀에서 심장(마음)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순례자는 마치 심장 자체가 매 박동마다 한 단어를 암송하듯이 자기 기도가 심장 박동의 리듬에 일체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따르면, 기도를 자기 심장 박동에 일치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를 멈출 수 없다. 기도는 사실상 존재 자체의 활발한 작용이 된다. 이것이 완전한 기도인가? 순례자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길에 있음을 믿는다.

 

 

7) 예수기도에 관한 숙고들

 

최근의 비평가들은 예수기도를 동반하지만, 단지 ‘보조적인 수단’으로 머물러 있는 정신적, 물리적 기법에서 참되고 고유한 기도를 조심스레 구분한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교적 의식의 느린 각성과 연결된다. 우리는 5세기부터 18세기 러시아 영성가들에 이르기까지 동방 전통을 따를 수 있다. 이 신심을 향한 수많은 움직임들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에시키오(Esichio)에게 있어 예수호칭은 ‘넵시스’(nepsis)에 연결되며, 결과적으로 모든 악마를 거스른 효과적인 방어수단이다.

 

14세기부터 저술가들은 그것을 자주 그리스도교 신앙의 짧은 요약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예수 이름에 대한 공경의 극단적 형태는 ‘오노몰라트리’(onomolatri)라고 부르는 몇몇 러시아 수도승들을 1912년과 1913년에 러시아 교회를 분쟁으로 몰아넣었던 교리에로 이끌었다. 불가코브(S. Bulgakov)는 예수 이름을 예수의 인격과 동일시하지 않고 나름대로 하느님 이름의 성사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에 관한 이론을 계발하였다. 콜로그리보프(I. Kologrivof)는 동방 전통의 윤곽 안에서 입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베네딕도회의 한 이콘 안에 나타나는 주님의 현존에서 확인한다.

 

그러나 종교심리학의 관점에서 다양한 측면과 구성요소를 지닌 정신적, 물리적 방법을 제시하는 그 관심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의 의사들은 이미 신체조직의 구성요소들과 혼합된 호흡의 입김으로 요구하였다. 교부들에게 있어 호흡 안에는 영(pneuma)과 피, 영혼, 목소리 간에 하나의 만남이 있다. 오늘날 헤시카스트들의 호흡법은 가끔 의식을 모아 묵상을 준비하는 힌두교의 요가 호흡법 ‘프라나이아마’(pranayama)와 비교된다. 그러나 료욜라의 이냐시오의「기도의 세 번째 방법」에도 비교된다.

 

「예수기도에 관한 대화들」과「러시아 순례자」의 저자들은 이 방법의 건조한 수행에 따라오는 위로의 열기와 감정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또한 자연적인 효과를 성령의 은총과 혼돈하지 말도록 권고하며, 이런 실수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단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물질적이고 고유한 의미로 이해된)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겨난 모든 효과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구심운동을 도와주는 마음의 영역에서 오는 모든 일련의 예민한 감정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저자들은 성적인 감정들 역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리석고 우둔한 것’으로 정의하면서 배꼽 위에 집중하는 것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 대신 ‘약간 왼쪽’ 가슴 위에 주의를 집중할 것을 권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요한 환경, 어두운 장소, 앉아 있는 자세, 근육의 긴장, 이 모든 것은 기도 안에서 영혼의 주의가 마치 한 건물의 기초와도 같은 몸의 자세에도 달려있다는 일반적인 경험이 된다.

 

한편 진정한 영성가들은 모두 이 방법이 ‘신속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수행의 정상적 수단들을 거치지 않고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로 간주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게다가 그것이 전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지는 않으며, 개인적인 안내자 없이 자주 위험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Thomas ?pidlik, La spiritualita dell’Oriente Cristiano, San Paolo: Milano 1995, 288-295).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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