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5일 (토)
(녹)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22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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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8-29 ㅣ No.367

연중 제 22 주일 (가해)

         

          예레미야 20,7-9 로마 12,1-2 마태 16,21-27

     2002. 9. 1.

주제 : 하느님이 받으실 제물

안녕하십니까?

여름을 보내주기 싫은 듯 ‘루사’태풍도 불어오고 늦더위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9월 ‘순교자 성월’의 첫 날입니다. 입추(8/8)와 처서(8/23)가 지났는데도 자연은 사람이 생각하고 정한 절기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제대로 볼 줄 안다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하고 싶다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세상일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고 덤비기에 때로는 자연을 이겼다고 삶의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곤란을 겪지 않으려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한계를 올바로 깨닫고 행동하는 일이 되겠지만 그 일이 쉽지 않은 것이 또한 사람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자신 있게 응답한 베드로 사도의 지난주일 복음의 고백이 있은 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으뜸 제자 베드로 사도를 꾸중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말로 한번 소리치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말보다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의도를 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행복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조차 말을 앞세웠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를 꾸중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너는 사탄이고 내게는 장애물’이라는 충격적인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칭찬받을 소리를 한 베드로 사도라서 우리가 부럽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겉으로 보인 것과 전혀 다르게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부분적인 모습만 가지고 하느님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이고 나만큼 잘 생활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므로 그에 합당한 만큼 삶에 축복을 베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삶의 문제는 내가 받을 축복을 먼저 계산하는 데서 생기는 것인데도 진실을 알아내고 그 진실대로 삶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못된 생각과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워낙 많기에 그들과 같은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뭔가 손해인 듯한 잘못된 모습이 판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구약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비운(悲運)의 예언자로 알려진 분입니다.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반대의 모습으로 달음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선택하고 예언의 직무를 맡긴 일을 자신이 어수룩했기 때문에 빠진 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선포했지만, 세상의 모습은 그 하느님의 뜻에서 누가 빨리 멀어지려는지 내기라도 한 듯 악의 길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서글픈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올바로 이끌겠다고 하는 것이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지만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곤경에 빠진 힘이 약한 사람들을 물건인 듯 주워 파는 인신매매, 나만 즐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연을 소홀히 대하는 일,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입장만 앞세우고 중요하게 여기는 자만심, 내 배가 부르면 다른 사람의 배도 나처럼 부르겠거니 여기는 자세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서글픈 세상의 모습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활동하는 예언자를 찾는 일도 어렵지만, 그런 예언자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예언자를 어떻게 대할지 짐작하는 일도 어렵지는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신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로 만족하지는 않고 더 한 일을 할 거라는 서글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살기 힘겨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일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더러는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 그런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하느님께 올바른 제물을 바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은 욕심이 많은 분입니다. 이 욕심은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욕심과 차원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욕심은 모든 삶의 첫 자리에 당신을 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다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십계명도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라’는 계명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갖는 최고의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 참다운 예배”라고 말입니다.  전부가 아니라면 부분은 의미 없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9월에 기억하는 순교자 성월은 ‘자기 목숨이 중요하다는 생각의 앞자리에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살았던 신앙의 조상’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때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본보기는 우리들의 주보성인의 행적을 기억하면 되겠습니다만, 그런 기억과 더불어서 ‘모든 것의 첫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새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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