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03 주일-가해-1999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1-23 ㅣ No.20

연중 제 3 주일(가해)

 

        이사야 8,23b-9,3      1고린 1,10-13.17  마태 4,12-23

     1999. 1. 17.

     

주제 :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하느님-인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삽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하는 일들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주장하는 일들 가운데는 우리의 귀에 솔깃하여 마음에 드는 소리도 있는가 하면, 때로는 우리가 귀를 틀어막고 듣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곳 성당에 와서 듣는 소리도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차이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힘과 능력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렇게 차이나는 일들이 있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좋게 보십니까? 그렇지 않게 보십니까? 삶의 모순과 고난 덩어리로 보십니까? 아니면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곳이라고 보십니까?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원칙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낫게 보는 쪽이 세상을 살 만한 힘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생각하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동합니다.  엊그제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똑같이 웅덩이에 괸 물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새삼 기억하면서 우리가 갖는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은 잘 바뀝니다.  그래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은 귀중하게 쓰이는 것이 내일엔 어떤 운명을 맞을지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지속성이 없기 때문이고, 이익을 쫓아서 움직이는 자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뭔가 새로운 삶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첫 번째 독서와 복음에는 사람의 세상에서 그다지 귀중하게 언급되지 않던 두 지방이 나옵니다.  즈불룬과 납달리가 그곳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이들은 야곱 즉 이스라엘 성조(聖祖)의 아들들 이름입니다.  그리고 훗날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그들이 차지한 땅의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이사야 독서에서 하느님은 ’즈불룬과 납달리를 천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 이후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될 때에, 그 백성들이 하느님 야훼를 공경하던 장소인 ’예루살렘’을 멀리하고, ’단’에 만든 송아지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토비트서 1,4-5참조: 2경전 1 면> 하느님에게서 인간의 마음이 돌아섰는데, 그곳에 축복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다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납달리와 즈불룬이 포함된 이방인의 지역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에서 당신의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옛날에 하느님을 배반하였던 일을 기억이라도 하듯이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씀을 처음으로 선포한 장소로 마태오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멀리하여 떠나간 것을 시작한 것은 마음이고, 몸은 행동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에 해당하는 회개를 먼저 외치십니다. 마음이 다시 올바로 돌아서게 하고자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일을 계속해 나가시기 위하여 오늘 처음으로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특성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도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원죄를 지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앞을 가립니다(창세 1,7).  동생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없애버린 카인은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며 항의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봉헌하고, 하느님이 응답을 들어주셔서 병석에서 일어난 임금 히즈키야는 ’당신께서는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구해주셨고, 나의 죄악을 당신 등뒤로 던져 버리셔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다고 감사의 찬양을 올립니다’(이사 38,17)  같은 세상을 살아가도 인간은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대하는 모습을 달리 갖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기에 똑같이 하느님을 모태로 해서 태어난 우리가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 인간을 향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행동을 먼저 선언합니다.

세상을 지내며 우리는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가 상처를 준 것보다는 더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며,  난 남에게 상처라고는 준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나만 미워한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그렇게 느끼는 분이 있다면, 자기 삶의 모습과 행동하는 방식을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 왔는가?’를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애 씁니다.  정당한 노력이죠.  그러나 아무도 지금까지 이룬 변화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가져야 하고, 지금 행복한 것보다 더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족하는 즐거움을 모르고 지낼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을 우리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천대받을 일을 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했지만, 바로 그곳에서부터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의 사업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납달리와 즈불룬의 사람들이 새로운 변화를 위한 마음을 갖고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뒷날 이어진 삶을 통하여 그것을 알아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구조상 지식층에 속하지 않던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신앙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독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축복을 인간의 쓸데없는 감정과 이론의 고집으로 떨쳐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오로 사도가 분열의 양상을 보이고 있던 고린토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남기신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I.M.F 시대라 해서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많이 사라지긴 했습니다만,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으로 웃을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 우리가 웃는 연습을 해 놓지 않으면, 참으로 웃고 즐길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제대로 그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 제자들의 선택을 복음으로 읽게 한 것은 우리가 기쁨의 장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자세를 갖추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웃고 발걸음이 가볍게 움직이려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잠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58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