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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믿음살이: 교회는 고도(孤島)가 아니며, 신앙은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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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1-07 ㅣ No.395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교회는 고도(孤島)가 아니며, 신앙은 생활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경향잡지를 통해 독자들과 만난 지도 2년이 되었다. 지난해에는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해설하는 글 ‘나는 믿나이다’ 난을 통해서, 그리고 올해에는 일선 사목현장에서 체험하는 우리의 신앙태도를 성찰하는 글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라는 이 난을 통해서이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2년 동안 독자들과 만나면서 필자 나름대로 성찰한 것을 몇 가지 정리하며 독자와의 만남을 마치려고한다. 이 글을 독자들께 건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필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쓴소리쯤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단호하고 결연한 태도로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그 사목목적을 첫째, 끊임없이 쇄신하고(교회의 내적 쇄신), 둘째, 세상 곳곳에 복음의 가치를 스며들게 하고(온 세상의 복음전파), 셋째, 세상과 대화할 것(현대 세계와 대화)이라 고백하였다(사제생활 교령, 12항 참조). 이는 공의회가 현대의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과 보편사명을 하느님 백성에게 명백하게 선언하고자 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교회헌장, 1항 참조). 어느 목적 하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적으로 쇄신하려면 스스로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이때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부끄러운 구석, 감추고 싶은 모습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복음적 가치에 투철해야 한다. 복음의 가치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빛과 어둠, 미움과 사랑, 불의와 정의, 그리고 죽음과 생명, 그 사이에서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기에 그 역시 용기가 필요하다. 현대세계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채워놓은 것을 하나하나 객관의 자세로 따져보아야 한다. 대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가난할 정도로 덜어내야 하고, 필요하다면 무력할 정도로 박해를 각오해야 하기에 용기가 필요하다. 창립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러셨기 때문이다.

 

이 사목목적을 성취하고자 보편교회, 지역교회, 교구, 본당,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전력투구하고 있는지 성찰해야겠다. 혹시 쇄신이란 말을 꺼내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 온갖 현실의 불가피한(?) 이유를 들어 복음의 가치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천상의 교회만을 바라보며 현대 세계와 대화하기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가?

 

민주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자본이 사람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도, 그 무엇의 소유가 되는 것도 단호하게 거부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만을 인정하고 또 고백하는 사람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다. 어느 신학자는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얼굴’이라 했다.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자. 그곳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가? 그리스도의 얼굴은 복음을 읽어보면 가늠할 수 있다. 그분이 군중을 가르치실 때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땠을까? 아픈 사람,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에게 내민 손길은 어땠을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실 때의 목소리는 어땠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와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선물로 건넬 때의 얼굴은 어땠을까?

 

보편 교회, 한국 교회, 교구와 본당은,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 그리스도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보고, “분명치는 않지만 저는 당신을 보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짐작할 수 있겠군요.” 하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광야에서의 유혹) 마지막까지(십자가 죽음) 당신 이름 대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당신의 뜻 대신에 아버지의 뜻을, 당신 권력 대신에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그 그리스도의 얼굴을 성형하거나 가려서는 곤란하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 백성의 지도자, 의회의 원로들도 당대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독설로 이들을 꾸짖으셨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로 단죄하였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聖都]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을 못 박은 십자가를 세운 도시이기도 하다. 존경받는 신앙인으로 자처한 이들이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는 이 같은 역설, 거룩하다고 뽐내는 도시가 십자가를 세운 도시가 되는 이 같은 역설은 우리가 깨어있지 않는다면 오늘도 또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영광된 이름 그리스도인,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로마 8,31-38) 하느님께서 당신 편으로 삼으신 이들,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들, 그리스도의 사랑에 결합한 이들, 그리스도께서 간구해 주시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을 대적할 이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단죄할 이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것도 없다. 이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영광된 이름인가! 그 영광에 걸맞으려면 만복이 충만해야 마땅할 것이다.

 

재물의 복, 승진의 복, 합격의 복, 건강의 복, 결혼의 복, 그야말로 “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하는, 음식점 벽에 걸린 성경구절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되어야 마땅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만복을 약속하기는커녕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진다고 고백한다.

 

혹시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영광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모욕과 수치의 이름인 것을,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생애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과 조롱을 당하셨다는 것을, 십자고상을 곳곳에 걸어두고 있는 참뜻을….

 

오히려 우리는 신앙을 부귀영화의 부적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보아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꺼이 살해되며 도살될 양의 처지에 놓여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겠다. 고단한 삶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이 고달픔이야말로 운명이며 영광이다. 공동체와 세상을 외면한 개인주의의 신앙, 밀알이 되기보다는 만복을 꿈꾸는 기복의 신앙, 불의와 미움과 어둠의 세력에 초연(?)하려는 현실도피 또는 마음의 위로쯤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왜곡하는 태도일 수 있다.

 

필자가 이처럼 교회의 사목목표와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운명을 놓고 성찰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는 쇄신의 길에서 한순간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강론과 교리교육, 그리고 훈화를 통해서 이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듣기 불편하다고 한다. 터무니없고 또 옹색하게 들리겠지만 필자는 “다른 자리에서는 여러분 마음을 평화롭고 편하게 해주는 말씀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하며 넘어간다. 아주 드물게 “말씀 잘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신부님 개인의 생각이지 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때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를 권한다.

 


성경을 통해 역사성과 초월성을 배우자

 

1. 우리의 신앙의 근거인 성경을 공동체의 관점에서 또 역사의 관점에서 읽어보자. 필자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셨다고 믿는다. 동시에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신앙공동체의 신앙고백서이며, 교리서이며, 기도서라고도 믿는다. 성경을 공동체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태도는 왜곡된 개인주의의 신앙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앙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지나치게 개인의 차원에서만 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당신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가 그들의 신앙과 기도와 살아야 할 길(교리)을 고백한 것이다.

 

성경은 또 구체의 현실 곧 역사라는 무대 위에 펼쳐진 인류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役事)를 소개하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심하고 외면하는 것이 초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많은 교우들이 성경을 영적 양식이라 하는데, 이 영적 양식이 세상일에 무심하고 외면할 힘을 주는 그런 양식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세상일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양식으로서 영적 양식이다.

 

역사에는 희망과 절망의 현상이 나란히 이웃하여 있다. 마음의 위안도 있지만 육체의 고통도 있다. 거꾸로 마음의 고통이 있으면서 육체의 쾌락이 섞여있다. 어느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을 그렇게 구별하기보다는 전인(全人)으로 보며, 이 인간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역사성) 천상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초월성)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역사성과 초월성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기쁨과 희망을 새롭게 할 쇄신의 방향을 공의회 문헌에서 찾자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학습하자. 일선 본당에서 또는 여러 기관에서 성경에 관한 공부는 많이 하고 있지만, 공의회 문헌을 학습할 기회는 드물다. 우리가 공의회 문헌을 펼쳐봐야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

 

세계 공의회 문헌은 그 자체로 보편 교회의 선언이며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공의회에 따라 전례가 변경되고, 교회법이 수정되며, 교리가 개정된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우리말로 미사를 거행하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983년에 새 교회법이 나왔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992년에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새로 나왔다.

 

물론 교회가 공의회 이전의 전례와 교회법과 교리서를 무효화하고 전혀 새로운 것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교황령 ‘신앙의 유산’ 1항이 밝힌 것처럼 이 모든 작업은 “교회 생활 전체의 쇄신에 크게 이바지”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같은 곳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공의회 폐막 메시지를 인용하여 밝힌 것처럼 “공의회의 목적인 사상과 행동과 관습과 도덕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새롭게 할 쇄신”의 방향을 찾고자 함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교회의 전례, 교회의 규칙, 교회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일선 사목현장에서 필자가 교우들의 신앙생활에서 발견하는 안타까움은 공의회의 성격과 중요함조차 모르고 있는 현상이다. 때로는 의도를 갖고 감추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교우들이 기회를 만들어 공의회 문헌 가운데 ‘사목헌장’의 제2부 ‘몇 가지 긴급 과제’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어쩌면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서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전쟁, 국제사회, 문화, 가정에 대해서 그 입장을 ‘헌장’으로 밝히고 있다. 혹시 왜 교회가 쓸데없이 세상일에 관심을 두느냐고, 혹시 일부 사제를 두고 뜻도 모호한 ‘좌파 신부’라 부르시는 분들이 계시면, 공의회 문헌을 꼼꼼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가톨릭교회에서 떠날 작정이 아니라면, 공의회의 선언을 소홀히 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무시하는 것은 더욱 가당치 않다. 실제로 오늘까지도 우리가 미사 때 고백하는 ‘신앙고백’도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고백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과 전례의 길잡이이다.

 

 

내가 믿고 따르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무슨 내용이 있나?

 

3.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학습하자. 여러 종류의 교리서가 있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행한 교리서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것들은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기초로 한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 모든 교리서의 지침이 되는 이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읽어보면 좋겠다. 특히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4편 ‘그리스도인의 기도’ 편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 부분을 실제로 읽어보게 되면 공의회 문헌을 읽을 때의 그 충격(?)을 받을 분이 많을 것이다. “내가 믿고 따르는 가톨릭 교리에 이런 교리가 있었단 말인가!” 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제3편의 제2부 ‘십계명’ 부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가 무심결에 외우고 있는 십계명을 자세하게 풀이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다섯째 계명 ‘살인하지 마라’는 대목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였으며, 우리에게 현실 세계의 문제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찰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 같은 예는 독자들이 직접 펼쳐보면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 - 주님의 기도를 되새기자

 

4.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를 되새기자.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청했을 때의 마음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의 마음을 날마다 헤아려보도록 하자.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는 대신에 우리의 이름과 명예를 빛내려 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맞아들이기보다는 우리의 권력이 미치는 나라를 세우고자 모든 힘을 다 쏟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꺾고 우리의 뜻만을 세우려는 것을 제자들과 예수님께서는 아셨던 것이 아닐까? 일용할 양식 대신에 곳간을 더 세워 채우려는 우리의 욕망과 탐욕과 이기심을 경계하신 것이 아닐까? 유혹이란 바로 이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닐까?

 

주님의 기도야말로 ‘하느님의 목마름’이면서 곧 ‘우리의 목마름’이 아닐까!(“가톨릭교회 교리서”, 2560항 참조)

 

* 필자께서 서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출발한 우리의 신앙이 공동체적인 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지평을 열어주신 필자와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경향잡지, 2009년 12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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