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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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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정복혜와 심아기, 강경복과 문영인, 그리고 김연이와 한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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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788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정복혜와 심아기, 강경복과 문영인, 그리고 김연이와 한신애

 

 

이번호에서는 1801년(신유박해) 4월 2일 순교한 정복혜 칸디다와 4월 초에 순교한 심아기 바르바라, 5월 22일 순교한 강경복 수산나 · 문영인 비비안나 · 김연이 율리아나 · 한신애 아가타 등 여교우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순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복혜 칸디다(?-1801년)는 과부가 된 뒤 한신애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교우들이 만든 교회서적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성물과 서적을 한신애의 집으로 가져다 숨기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습니다.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자,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해 4월 2일(양력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심아기 바르바라(1783-1801년)는 오빠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포졸들에게 체포당할 때, 그녀는 어머니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말한 뒤,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녀는 모진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포도청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유배된 그녀의 오빠는 “제 누이에게 가르쳐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하였는데, 누이는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라고 진술하였습니다.

 

궁녀 출신 강경복 수산나(1762-1801년)는 은언군의 부인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의 집으로 폐궁이라 불리던 양제궁에서 살았습니다. 1798년 송 마리아한테 교리를 배운 그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포도청에서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였지만 의금부에서는 잠시 마음이 약해져 “믿지 않겠다.”고 진술하였습니다. 다시 형조로 이송된 그녀는 크게 뉘우치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습니다. “저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서 이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해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일곱 살 때 궁녀로 뽑힌 문영인 비비안나(1776-1801년)는 스물한 살 때 병으로 잠시 궁궐에서 나와 살 때 실장수 노파한테서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다시 궁궐로 돌아갔지만 신자인 것이 발각되어 쫓겨났고, 다시 집에서도 쫓겨나 청석동에서 살았습니다. 1800년에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해 오자 강완숙의 요청으로 그에게 집을 두 달간 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체포된 그녀는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 중에 정신이 혼미해져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였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녀는 형조에서 “포도청의 진술에서는 천주교를 배척한다고 했지만, 입으로는 그렇다고 했으나 마음으로까지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으므로 곧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독실하게 믿은 신앙인데,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잔혹하게 다리에 매를 맞을 때, 다리에서 솟구친 피가 꽃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떠올랐고, 참수를 당할 때 목에서 나온 피가 젖과 같이 희었다고 합니다.

 

김연이 율리아나(?-1801년)는 한신애 아가타한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신심이 깊은 그녀는 ‘천주교의 중매인 노파’라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습니다. 양제궁에 살던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강경복 등과 만나면서 그들을 안내하여 주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강완숙의 요청에 따라 이합규와 김계완, 황사영을 숨겨주기도 하였습니다. 엄한 형벌 가운데에서도 “만 번 죽더라도 천주교를 믿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한신애 아가타(?-1801년)는 강완숙의 전교로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완숙은 옛 역서(曆書) 안에다 교리를 베껴주었으므로 그녀는 딸과 함께 보고 익혔고 강완숙의 집에서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정광수, 이용겸 등을 통하여 아들과 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애를 썼습니다. 박해가 일어난 뒤 정복혜가 서적과 성물을 거두어오자, 자신의 집 곳간에 숨겨두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에도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순교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의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여성 순교자들, 그들은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떤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루었던 공동체와 순교적 삶을 우리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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