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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일본천주교회 26위 성인들 순교의 길 (중) 죽음으로 증거한 사랑은 갈수록 또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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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3-30 ㅣ No.783

일본천주교회 26위 성인들 순교의 길 (중) 가신 임 모습은 희미해지건만 죽음으로 증거한 사랑은 갈수록 또렷...

 

 

26위 성인 기념관 내 성 바오로 미키 순교상.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에서 무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성인은 예수회에 입회, 오사카에서 열정적 전교로 큰 성과를 거뒀다.

 

 

니시자카의 죽음은 이내 잊혀지는 듯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공식 금교령 선포와 함께 무려 37만 명에 이르렀던 일본 천주교회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잠복기'로 접어든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1627년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순교한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수사들과 일본 신자들 23위를 시복하고, 1629년에는 일본인 출신 예수회 수사 3명을 시복했다.

 

또 230여 년이 지나 교황 비오 9세는 1862년 이들 26위를 시성했다. 이 당시 26위 시성 명칭은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복자들 시성건'이었다. 그래서 26위 시성 100돌을 맞아 나가사키현 당국이 1962년 니시자카 언덕에 세운 순교기념비에도 이들 성인 2위만 두 손을 펼친 채로 서 있고, 다른 24위는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 채로 형상화돼 있다.

 

일본 26위 성인 순교 기념미사를 봉헌하고나니, 니시자카 순교지는 이내 고요에 젖어든다. 2월의 포구는 언 땅에서 막 틔워내는 푸른 새싹으로 봄이 멀지 않았음을 전해준다.

 

때마침 미사에 참례한 뒤 나가사키 교외 소토메 수도원으로 돌아가던 예수성심시녀회 이건숙(율리에타) 수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2008년 7월 한국에서 파견돼 나가사키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성지 안내 봉사를 하고 있는 이 수녀를 붙잡고 안내를 부탁했다. 이 수녀를 통해 듣는 순교비와 26위 성인 기념관, 니시자카 공원 내력은 새로다. 피로 얼룩진 순교 사화가 하나하나 풀려나왔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니...

 

33살, 청목처럼 젊은 나이로 순교한 예수회 바오로 미키 수사가 남긴 유언은 특히 가슴을 저리게 했다.

 

"여러분, 저는 일본인 예수회 수사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전파했다는 이유로 저는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이유로 죽게 된 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죽기 전에 진리만을 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저는 저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청합니다. 간절히 원하건대 타이코(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칭)를 비롯해 여러분들은 부디 그리스도인이 돼 꼭 구원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26위 성인 순교비.

 

 

당당히 교리를 설파한 바오로 미키 수사는 자신을 죽이려는 박해자들을 용서하며 죽음을 맞는다. 이로써 일본 혼슈 중부 후쿠이현 아즈치야마 예수회신학교 출신 선교사로 교토와 오사카 일대 교회의 초석이 됐던 미키 수사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한다.

 

교회사는 또 성 바오로 미키와 함께 오사카 출신 야고보 키사이, 고토 열도 출신 요한 소안도 예수회 수사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바오로 미키가 158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13년간 선교활동을 하며 수사로 살았다면, 야고보 키사이나 요한 소안은 예수회 보조자이자 교리교사로 활동하다가 순교 직전 감옥에서 예수회 입회 허가를 받았을 뿐이었기에 두 사람의 행적은 그리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처럼 26위 중 예수회 출신 성인은 3위에 그치지만, 전교와 함께 교리서를 편찬하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한 데 이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예수회 순교성인들은 일본 교회에서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임의 사랑은 갈수록 또렷해지고...

 

가신 임의 모습은 희미해지건만, 죽음으로 증거한 사랑은 갈수록 또렷해진다.

 

26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건 프란치스코회였다. 베드로 밥티스타 수사신부를 비롯해 마르티노 로이나스 수사신부(이상 스페인), 필리푸스 데 라스 카사스 수사(멕시코), 군디살보 가르시아 수사(포르투갈), 프란치스코 블랑코 수사, 미카엘의 프란치스코 수사(이상 스페인) 등 수사만 6위였다. 대부분 멕시코나 필리핀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로, 박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와 교토와 오사카 등지에 학교와 병원을 짓고 수도원을 건립해 수도생활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선교하던 선교사들이었다.

 

또 나머지 일본 순교성인 17위 중 상당수도 프란치스칸 3회로 가입해 활동함으로써 예수회와 함께 일본 교회의 뿌리가 됐다.

 

이들의 순교를 이해하려면 먼저 1596년 필리핀 카비테항을 출항, 멕시코로 향하던 산 펠리페호가 시코쿠 연안에 표착한 사건을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이 배 안에는 많은 승무원과 화물,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회 등 수도자 7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시코쿠 영주이던 쵸소카베 모리치카는 일본 관습에 따라 화물을 몰수하고 승무원을 감금하고 선교사를 포박한다. 이에 선장 마키아스 데 란데초는 밥티스타 신부를 통해 당국에 석방을 탄원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마스다 나가모리는 이미 화물을 인수하고자 출발한 뒤였다. 이때 항해사 란데이아가 마스다 나가모리에게 "우리를 잘 대해주면 아군이 되고, 학대하면 영토를 강점할 것"이라고 하자, 격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6년 말 스페인 필리핀 총독 사절로 일본에 와 있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체포령을 내린다. 이미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과 금교령이 내렸는데도 공공연히 선교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로써 교토와 오사카 일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잡혀 들어왔고, 일본인 신자들도 함께 체포됐다.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고...

 

26위 성인 기념관에는 선교사들의 사진과 서한, 행적, 관련 유물 등이 전시품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인 순교자들 가운데 특히 세 소년의 순교가 가장 애달프다. 12살 루도비코 이바라키, 13살 안토니오, 14살 토마스 코자키다. 모두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성직수사들 복사로 활동한 소년들이다. 이들은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800㎞를 걸어 니시자카에서 순교의 관을 썼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려 "천국, 천국…"을 되뇌이며 옆구리에 창칼을 받고 숨을 거운 루도비코 이바라키 순교자의 순교 사화는 아직도 일본 교회에 애절하게 전해진다.

 

이와 함께 프란치스칸 3회로 뛰어난 교리교사이자 교토 성 요셉 병원 운영을 맡았던 성 바오로 스즈키, 승려였다가 천주교로 개종해 전교회장으로 활동한 성 레오 가라수마루, 또 다른 미야코를 대신해 체포돼 순교한 미야코의 성 마티아, 칼을 만드는 장인으로 살다가 천주교로 개종해 교리교사로 산 성 고스마 다케야, 목수였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며 교토와 오사카에 수도원 및 성당 신축을 돕고 교리교사로 활동한 성 토마스 코자키의 아버지 성 미카엘 코자키 등이 주목할 만하다.

 

이밖에 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형인 성 바오로 이바라키, 성당 기물 보관 역할을 맡다가 순교한 성 베드로 수케지로, 의사이자 교리교사로 산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 무사 출신 순교자 성 카이오 프란치스코 등이 있다.

 

[평화신문, 2010년 3월 7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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