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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일본천주교회 26위 성인들 순교의 길 (상) 교토에서 니시자카까지 27일간 죽음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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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3-24 ㅣ No.780

일본천주교회 26위 성인들 순교의 길 (상) 교토에서 니시자카까지 27일간 800㎞ '죽음의 행진'

 

 

- 7일 일본 26성인 순교제 기념미사 중 나가사키대교구 한 사제가 성 야고보 키사이(St. Jacob Kisai)의 손 유해가 담긴 현시대를 들고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본천주교회에는 42위 성인이 있다. 그렇다고 103위 성인을 탄생시킨 우리나라보다 박해가 미약했다거나 짧았던 것도 아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파테렌(伴天連, 선교사) 추방령',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기리시탄(切支丹, 그리스도인) 금령'으로 공식화돼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그리스도교 금지를 명시한 '고사츠(高札)'를 전국적으로 철거, 신앙 자유를 정부 차원에서 보장하기까지 277년간 지속돼 숱한 순교자를 냈다. 이들 가운데 42위가 시성됐고, 393위가 시복됐다.

 

일본 복음화의 관문 나가사키(長崎)대교구는 해마다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순교자 기념일이면 1597년 니시자카에서 순교한 26위를 기려 '일본 26위 성인 순교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올해엔 경축 이동으로 7일로 옮겨 니시자카(西坂) 순교지에서 봉헌됐다. 이날 26위 순교 기념미사 참례를 계기로 26위 성인의 삶과 행적, 신앙을 기억하는 특집을 마련한다.

 

우리나라에 '절두산'이 있다면, 일본엔 '니시자카'가 있다.

 

나가사키대교구 니시자카를 필두로 일본 또한 숱한 순교지가 있지만, 니시자카만큼 상징성을 지닌 순교지를 찾기는 힘들다. 일본교회 사상 가장 뜻깊은 순교지일 뿐 아니라 일본에서 첫 복자(1627년), 첫 성인(1861년)이 나온 계기가 된 영광의 땅이어서다.

 

- 7일 주일 교황대사 카스텔로(제대) 대주교 주례로 일본 26성인 순교제 기념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순교기념비 뒤에는 현수막이 붙어있는 26성인 기념관이 보인다.

 

 

칼끝 앞에 당당히 서서 기꺼이 죽음으로 일본 전역에 신앙을 증거한 원점, 니시자카는 이처럼 일본 교회의 수백 년 아픔과 눈물, 기쁨과 희망, 기도와 신앙적 자부심을 온전히 함축한다.

 

거친 광야를 기도로 떠나온 순례자들은 7일 오후 순교의 땅 니시자카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26위 성인 순교 기념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다. 한겨울이라고는 해도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 푸근한 니시자카 언덕에 모여든 일본 신자 2000여 명은 묵주기도를 바치며 '26위 성인 기념비'를 향해 마주 섰다.

 

삶의 회한과 불망 속에서 신앙의 거울처럼 다가서는 순교비를 기도와 함께 바라본다. 돋을새김 기법으로 벽면에 생생하게 살아난 26위 순교 성인들은 두 손을 모은 채, 혹은 두 팔을 벌린 채 이들을 따스하게 맞아들인다.

 

 

일본에서 첫 성인이 나온 영광의 땅으로

 

특별히 나가사키로 순례를 온 주일 교황대사 알베르토 보타리 데 카스텔로 대주교 주례로 봉헌된 이날 기념미사는 단순한 기억과 회상의 자리만은 아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상의 기쁨을 안고 하늘로 불려오르는 순교 성인들을 통해 평화를 기원하고 그 신앙을 오롯이 내면화함으로써 전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신앙 실천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다지는 역사와 현실의 자리였다. 나가사키대교구장 다카미 미츠아키(高見三明) 대주교와 교구 사제단, 수도자들, 순례자들의 마음은, 기도는 한결같다.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십자가 신비를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저희가 선조들의 순교 얼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은총 주소서!"

 

메구미 다니구치(惠美谷口, 오츠게의 마리아수도회) 수녀의 고백이 마음에 쏙 들어온다.

 

"26위 성인은 1596년 말 당시 수도 교토에서 체포돼 니시자카에서 순교하기까지 800㎞를 죽음을 향해 걸었습니다. 그 기나긴 여정의 고통을 되새기고자 해마다 저는 시내 우라카미(浦上)에 있는 수녀원에서 니시자카 언덕까지 5㎞를 걸어옵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떻게 기도생활,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새기며 26성인 순교 기념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지요."

 

사세보(佐世保) 가와라마치(河原町)본당 가와시모 히사시(川下久, 미카엘, 55)씨도 온 가족과 함께 미사에 함께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아들을 차에 태우고 성지에 왔다"며, 그는 초등학교 5학년생 아들 가와시모 마사키(川下勝希, 미카엘)군이 기도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귀 잘린 채 시내 끌려다녀

 

자녀 셋, 부인과 함께 일본 26성인 순교제 기념미사에 참석한 사세보 가와라마치본당 가와시모 히사시(오른쪽)씨.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간절하게 니시자카로 끌어들이고 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4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인 1596년 12월 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페인 필리핀총독 사절로 일본에 온 프란치스칸들이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며 공공연히 선교하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며 교토(京都)와 오사카(大阪) 등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체포한다.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과 예수회 수사 3명, 일본인 15명 등 24명이었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프란치스코회 제3회 회원들이었고, "금지된 그리스도교를 믿고, 그 교를 퍼트렸다"는 게 죄목이었다. 체포된 24명은 1597년 1월 3일 귀를 잘린 채 일주일간 교토시내를 끌려다니며 온갖 조롱을 당해야 했다. 외교인들은 이들에게 침을 뱉고 돌 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체포된 신자들은 겸허하게 조롱을 받아들이고, "오늘 하느님 자비로 이렇게 큰 은혜를 받으니 기쁘기 한량없다"고 서로를 권면하며 기쁨에 넘쳤다.

 

이어 일본판 '죽음의 행진'이 1월 9일 시작됐다. 교토를 출발해 오사카를 경유, 나가사키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잘려나간 귓볼에선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눈비를 맞으며 흙탕과 먼지투성이 산길을 걸었다. 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누더기가 돼 버린 옷깃을 여미고 추위를 이겨내며 굶주림을 감내해야 했다.

 

 

순교 직전에도 교리 설파

 

이들이 혼슈(本州)와 규슈(九州) 사이 해협에 자리잡은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을 때 교토에서부터 이들을 따라온 두 일본인 신자가 또 다시 기리시탄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이로써 니시자카로 끌려간 복음의 증인은 모두 26명이 됐다.

 

27일 만에 니시자카에 도착한 선교사와 신자들은 2월 5일 저녁 책형을 받고 처형됐다. 기둥에 묶어놓고 좌우에서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이었다. 이 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가사키시 해변가 니시자카 언덕에 십자가 26개가 세워졌고, 4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형 집행을 눈앞에 둔 선교사와 신자들은 찬미가를 부르며 십자가에 달렸다.

 

일본인으로 첫 예수회 수사였던 성 바오로 미키(三木) 수사도 이날 니시자카에서 순교 화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살이었다. 순교 직전, 그는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교리를 설파하고 복음이 널리 전해지기를 기원하며 순교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죽음을 맞았다.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 죽음입니다 / 예수도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 베드로도 예수를 사랑한 죄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 사랑은 죽음으로 지키는 책임이고 맹세입니다 / 밀알 한 알 죽어야 한 섬의 나락을 거두기에"(홍윤숙 시인 '사랑' 일부)

 

[평화신문, 2010년 2월 2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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