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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나는 믿나이다: 고해성사 - 주일미사를 빼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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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279

[나는 믿나이다] 고해성사 - 주일미사를 빼먹었습니다?

 

 

예비신자는 세례를 받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첫 고백을 하게 된다. 세례성사와 첫영성체가 새 교우들에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첫 고백은 그들을 긴장시키고 심지어는 부담스럽게 한다. “대부(모)님, 저 다음 주에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걱정되고 떨려 죽겠어요.” “세례 받은 다음에 성당에 빠진 적 있어?” “예, 지난 주일에 집안일 때문에 미사에 못 갔는데요.” “그러면 고해소에 들어가서 그거 말하면 돼.” “미사 빠진 적은 없는데요.” 할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대부(모)는 “누구 미워한 사람은 있을 것 아냐?” 하고 묻고, 새 교우가 “그렇긴 하지요. 어떻게 미워하지 않고 살아요?” 하면, “그럼 들어가서 신부님한테 그거 말하면 돼.” 하는 식이다. 고해성사는 기존의 교우에게나 새 교우에게나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하고 감격스러운 일이기보다는, “주일 미사를 빼 먹은 것” 과 “사람을 미워한 것” 정도를 신부에게 고(告)하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고해성사에 대해 알아보자.

 

 

1. 고해성사 -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듣고 나의 유한함을 고백하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다. 거울을 볼 때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옷을 입을 때도 아무 옷이나 아무렇게나 입지 않는다. 색상을 맞추고 모양을 맞춘다. 신발도 하다못해 양말도 맞춰 신는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받고자 함이다.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잘 보이려는 것이다.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서야 아무리 치장을 하고, 아무리 궁리를 했다 하더라도 “이만하면 됐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다.”고 하지 못한다. 아직 여전히 부족한 것 같고 여전히 불안하다.

 

그렇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마침내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사실은 당신이 그때 입었던 옷이나 당신이 한 이야기들은 참 유치했어. 하지만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그 정성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말은 안 했지만….”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이런 말을 듣고 화가 날까? 화가 나기보다는 “그렇지, 당신 마음에 들려고 꽤나 애썼지.” 하며 따뜻한 미소를 나눌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려 애썼던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둘이 사랑을 키워가는 사이라면 말이다.

 

고해성사는 앞의 이야기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고해성사는 무엇보다도 “나(하느님)는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어.” 하는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듣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사람 쪽에서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하느님 쪽에서는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변함이 없다고 고백하여 깨우쳐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골라 입은 옷이 유치하고, 내 행동과 말과 생각에 빈틈이 많았음에도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나를 사랑하셨다. 하느님의 이 사랑고백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쓴다.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들을 때마다, 옷매무새를 거울에 비춰보듯이 자신의 행동을 살피며, 색깔을 맞춰보듯이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펴보아 부족한 것을 부끄럼 없이 고백하고, 어떻게 하면 그 부족함을 채울지 궁리하고 묻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채울 길을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따뜻하게 자라고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해성사의 근본요소가 두 가지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신자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사제의 사죄 행위이다. 고해성사에서신자의 행위는 주의 깊은 양심성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정개)을 포함한 통회, 사제 앞에서 스스로 자기 죄를 말하는 고백 행위와 보속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사제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죄로 생긴 손해를 갚도록 고백자에게 부과하는 보속의 방법을 정해주는 사죄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302-303항 참조. 이하 교리서로 표기).

 

 

2. 고해성사 유감 - 무엇을 고백하는가?

 

만일 주일미사를 빼먹었다(?)고, 누군가를 미워했다고 고백했을 때, 하느님과 나 사이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감격스럽다면 그 고해성사는 하느님 구원과 사랑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거추장스러운 짐을 벗어버리려는 행위라면 그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결합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맺은 그 엄숙한 관계가 단지 주일미사를 빼먹은 그것 때문으로만 왜곡된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과 옳은 관계 맺기는 너무나 기계적이다. 하느님 대신에 우상으로 섬기는 일들이 모두 정당해진다. 하느님 대신에 돈을 섬기는 현상은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느님 대신에 무력으로 평화를 건설하겠다는 태도와 행위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 대신에 인간의 탐욕을 채우려는 행위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모든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깨닫지 않고, 단지 주일미사를 빼먹은 것만을 두고 뉘우친다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평화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주일미사를 빼먹은 것은 죄라 여기고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고해성사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는 편리한 기회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과 세상에 범한 모든 죄는 세상살이하는 데 어쩔 수 없는 삶의 기술 또는 살려면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 쯤으로 여기고, 다만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미워한 것만을 죄라고 간주한다면, 하느님의 세상 창조질서 보전은 요원해지고, 세상과 올바른 관계 맺기는 왜곡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둘러보라. 불의와 부정, 다툼과 분열로 세상에 고통과 절망, 슬픔과 어둠을 퍼뜨리고 자라게 하는 행위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 기술이라면 도대체 세상과 옳은 관계를 맺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을 어지럽힌 그 죄를 덮어둔 채 몇몇 종교적 의무나 규정을 지키지 못한 것과 인간의 감성 가운데하나인 미움의 감정에 대해서만 죄책감을 갖고, 그 죄책감을 고해성사라는 편리한 장치를 통해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도대체 하느님의 세상 창조질서보전은 누구 몫이란 말인가?

 

하느님과 세상에 부끄럽고 뉘우칠 일이 주일미사를 빼먹은 것과 사람을 미워한 감정 정도뿐이라면, 그것은 고해성사를 인간의 탐욕과 죄를 덮어버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세상의 무질서를 회복하는 은총과 사랑의 통로 곧 구원의 길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밀어내고, 세상을 더 어둡게 하는 온갖 죄를 정당화시키는 편리한 도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같은 비판은 사회주의자들 또는 무신론자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무질서하게 해놓고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했다는 그 이유로 자신이 세상 한복판에서 저지른 수많은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의식도 책임도 갖지 않는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해 보자. 민주주의를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라고 여긴다. 규모가 큰 정치집단에서든, 규모가 작은 가정이나 학교에서든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자의 의견이나 처지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은 죄악이다. 한 예로 최근 서울지역의 ‘뉴타운 개발’이라는 사업이 있다. 주민의 의견을 수렴할 때 철저하게 소외되고 심각한 피해를 보는 구성원이 있다. 세입자들이 그들이다. 이때 세입자들이 처할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주민의 동의가 있다고 해서 밀어붙이는 것은 집단의 폭력이며 죄악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의 권리는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재화가 사유화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어느 특정 개인이 소유할 경우공공의 안녕을 위협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공공재’라 하는데, 물, 전기, 도로 같은 것들이다. 이런 공공재들을 소수의 개인(자본)이 독점으로 지배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과 심지어는 생존 자체가 종속될 위험이 아주 크다. 대부분의 근대국가에서 그 공공재를 국가(공공부문)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 또는 사유재산의 권리를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면서 사회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차가운 자본주의’는 공동체 자체를 붕괴시키는 죄악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과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의 권리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공공의 선익을 보호하는 장치가 없을 경우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이웃을 고통으로 내모는 합법적인 죄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알아내고 뉘우치고 결심하며 고백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킨 모든 죄다. 오늘날 예를 들어 배금사상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삶의 태도는 그 죄가 무겁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고,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인간의 탐욕이기 때문이다. 세상만사를 하느님께 봉헌해도 좋을 거룩한 제물로 가꾸는 대신에 자기 몫으로 하여 나누지 않는 삶의 태도는 주일의 참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다. 우리가 고백할 죄는 세상 창조질서를 훼손한 모든 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도 따위에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훼손한 모든 행위들이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죄다.

 

그리하면 고해성사는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 곧 죄의 사함, 교회와 이루는 화해, 잃어버린 은총 지위의 회복, 죽을죄로 받게 되었던 영원한 벌의 사면, 죄의 결과인 잠벌의 부분적인 사면, 양심의 평화와 안온, 영적 위안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을 위한 힘의 증대”(교리서, 310항)의 효과를 가져온다.

 

 

3. 고해성사 유감 - 어떻게 고백할까?

 

글머리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교우들은 심심치 않게 서로 ‘상의하여(?)’ 죄를 알아내고 뉘우치고 결심하고 고백한다. 고해의 비밀이 무색하다. 물론 양심성찰을 위한 조언을 구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에도 일반적이어야 하지 자신의 죄를 공개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안 된다. 고해성사를 앞두고 서로 물어가면서 죄의 목록을 정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때로는 공개된 공간에서 “신부님, 미사에 빠진 것도 고백해야 하나요? 주님의 기도 서른세 번 했어도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요?” 묻는 교우들도 있다.

 

‘고해의 비밀’이란 것이 있다. 물론 이는 고해사제에게 어떠한 예외도 없이 적용되는 것이지만, 고해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고해할 죄를 상의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성령의 인도로 고해자는 죄를 알아낼 수 있고, 뉘우칠 수 있으며, 결심할 수 있다.

 

심지어는 “신부님, 우리 본당에서는 공동고백 안 주나요?” 하고 묻기도 한다. 이때 이른바 ‘공동고백’이란 말에는 집단으로 모여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고백하면서 죄의 사함과 보속을 받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 숨어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고해성사를 우리의 유한함과 불완전함마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행위가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짐을 벗어버리는 행위 정도로 이해한 때문이다. “중대한 필요가 있을 때에(예를 들어 비행기나 선박의 사고나 전장에서 죽음의 위험이 임박한 때) 교회의 규정에 따라 일괄로 고백하고 집단으로 죄를 용서할 수는 있으나, 이런 경우라도 각자는 적절한 때에 개별적으로 고백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교리서, 311항).

 

[경향잡지, 2008년 9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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