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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계산주교좌성당 십자가와 또 다른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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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478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계산주교좌성당 십자가와 또 다른 100년


우리는 계산주교좌성당을 들어서면서 좌대까지 합쳐 약 5m에 달하는 커다란 십자가와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같은 십자가가 복자성당 순교자 묘지 앞에 서있으며, 월성성당 뜰 중앙에도 있다.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물리적으로 똑같은 24시간이지만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은 날들이 있다. 아니 사람들은 그런 날들을 만들기를 좋아하고 또 그런 날들을 추억하며 사는지 모른다. 물론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해도 있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힘을 얻게 되고, 미래의 꿈을 품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사람들은 기념일을 정하고 기념물을 소중히 여겨왔다. 계산성당의 십자가도 바로 그 때문에 세워졌고, 같은 이유로 소중함을 더해가고 있다.

대구대교구는 올해 10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연히도 대구대교구의 열 번째 주교가 교구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100과 10은 십진법의 단위를 꽉 채우는 완전수이다. 이 숫자들은 지상의 교회가 지향해 나가야 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100년을 달려오는 동안에 대구대교구도 여러 번 처음 출발할 때의 뜻을 다지고 그동안의 풍성한 결실을 기리고자 했다. 25주년, 70주년, 90주년 등. 이 기념행사들 중 가장 큰 행사가 100주년 행사였음은 말할 나위없다.

그리고 이 100주년의 행사에 버금할 만큼 성대했던 행사는 대구교구 25주년 은경축 행사였다. 1936년 6월 11일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우선 당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들이 처음 조선땅에 발을 디딘 1836년을 기념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대구교구는 교구 25주년을 맞고 있었다. 더욱이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주교서품 은경축을 맞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날을 ‘양대경사일’ 이라고 했다.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9시 축하대례미사가 있었다. 오후 1시 시가행렬, 3시 성모당 앞에서 축하대회, 4시 주교댁에서 귀빈잔치, 저녁 8시 역전공회당에서 기념대강연회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전교구민이 하루 종일 잔치에 싸여 지낸 날이었다. 주교는 수없는 편지와 67통의 축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념식 행사는 모두 지나갔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기념물이 있다. 이날 사람들은 계산성당 앞마당 중앙화단에 화강암 십자가를 세웠다. 드망즈 주교는 첫 선교사가 입국한 100년과 교구 25년을 동시에 기념하면서 미사 직후 천주의 은총으로 이날을 맞게 됨을 감사하며, 이 십자고상을 축성하여 천주께 봉헌하였다. 그는 조선인 사제들이 교구사목을 온전히 담당하게 되는 때, 신자들이 이 십자가를 보면서 교구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수행한 역할을 기억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과연 드망즈 주교는 언제쯤 한국인 사제들만으로 교구가 운영되리라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때도 이렇게 감사하며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파리외방전교회는 특이한 단체이다. 파리 중앙 뤼드박(Rue de Bac) 거리에 그 본부가 있다. 그리고 그 왼편으로 50여 미터쯤 되는 곳에 기적의 메달 성당이 있다. 한 블록 떨어져서는 예수회 본부도 있다. 그곳에서 다시 한 블록 지나오면 가톨릭대학이 있다. 즉 뤼드박은 파리 속의 예루살렘이다. 원래 박(Bac)은 나룻배를 뜻하는 말인데, 이곳에서 신앙을 실어 날랐다.

박해시대 이래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던 외방전교회는 수도단체가 아니라 선교사를 지망하는 교구사제들의 단체이다. 1658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파리외방전교회는 동양전교에 주력했다. 그래서인지 파리외방전교회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의 상이 제대를 향해 오른쪽에 있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에 파견되어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말과 풍습을 배워 직접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선교지의 사람과 같이 되려고 했고, 포교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해서 그들 자신이 자신의 교회를 운영하도록 하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조선에 처음으로 입국했던 모방(Maubant, 羅) 신부는 입국한 뒤 제일 먼저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을 보냈고,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으로는 첫 사제가 되었다.

박해시대에도 선교사들은 국내에서 신학교를 운영해 사제를 양성하고자 했다. 1853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병인박해로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1885년 강원도 원주 부엉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했고, 이를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 예수성심신학교를 개설하여,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물론 대구교구도 설립되면서부터 신학교를 세우고자 노력하여 1914년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설립했다. 대구교구의 첫 한국인 사제는 주재용 신부였다. 그는 해방직후 혼란기에 주교대리로 교구살림을 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한국인 성직자는 차츰 늘어갔다. 1920년 한국에는 총 71명 사제 중 30명이 조선인이었는데, 100년을 맞은 지금은 대구대교구만도 한국인 사제가 400명이 넘는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성장이란 결국 선교지를 독립시켜 자신이 그곳을 떠남을 의미한다. 자신들이 피땀을 흘려 일했던 선교지에서 사라져야만 그들의 사업은 완성된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의 간섭과 6.25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일제는 일본인으로 교회책임자를 바꾸려고 했다. 그래서 일제는 1942년 대구교구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을 남산동성당에 감금했다. 그리고 강제로 무세주교를 사임시키고 하야사카 주교를 임명했다. 그후 해방이 되었고, 하야사카 주교를 이어서 주재용 주교대리가 취임함으로써 교구의 관할권이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대구에서는 1948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환송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특수사목을 하던 델랑드(Deslandes, 南大榮) 신부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들은 대전교구로 이동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자립을 갈망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날 전 교구가 현지인 출신 사제들로 움직이게 될 때 선교사들의 활동을 기억해 달라는 비를 세웠다. 이 비가 세월이 오래되어 낡게 되자 계산성당에서는 1994년 똑같은 비를 세우고 이 십자가를 치웠다. 그러나 복자성당에서는 2000년 최시동 신부 때에 이 낡은 십자가를 옮겨다 보수 수리하여 순교자 묘역에 세웠다. 그리고 월성성당에서는 2003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초심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모양의 비를 세웠다.

이렇게 역사는 이어간다. 더욱이 같은 사람인 손선목(프란치스코) 님이 계산성당의 십자가를 제작하고 복자성당의 십자가를 보수했다. 그는 계산성당 신자일 때 비 재건작업을 했는데 현재는 월성성당 신자이다. 이렇게 여러 연고를 거치면서 우리도 이 십자가를 전수해가며 역사에서의 성장과 초기 씨앗들을 가꾸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 파리외방전교회는 170여 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했는데, 그중 공산치하의 희생자까지를 합하면 24명이 이 땅에서 순교했다. 그들은 약 100여 명의 한국인 사제를 양성했다. 그리고 이제 대구에서는 이 기념 십자가상을 통해서 그들이 기억될 것이다, 그들이 뿌린 씨앗이 영글어 이제는 우리 교구에서 36명의 사제가 미국, 캐나다 등 세계로 교포 사목을 나가 있다. 특히 볼리비아와 아프리카 등에서는 우리 대구대교구가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이 커다란 성장 앞에서 드망즈 주교의 말을 생각한다. 은경축 날 드망즈 주교는 자신의 영광을 가리켜 “사람들은 비슷한 경우에 있어서 모든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지휘관에게 훈장을 수여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하다고 했다. 그는 “이 교구에서 성취시켜야 할 사업을 위해서 사령관과 병사들, 그리고 남녀협조자들과 남녀 후원자들을 거느리신 주님께서는 오직 공평하게 그들에게 맞는 평가대로 각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알고 계신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드망즈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첫 선교사가 이 땅에 입국한 이후 100년에 걸쳐 이룩한 모든 일을 자신들 뿐만 아니라 전체의 공으로 돌렸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우리 전체가 함께 이룬 업적이며 이루어가야 할 업적이기 때문이다. 계산성당의 십자가는 또 다른 백년을 향해 우뚝 서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교구 100년을 맞는 신자들의 가슴에도 새겨져 있다.(도움 : 영남교회사연구소, 대구본당 100년사, 계산성당 · 복자성당 · 월성성당)

[월간빛, 2011년 1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관덕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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