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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17-18: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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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7-08 ㅣ No.440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7)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870) (상)


로마 교황 수위권 굳건히 지키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집의 발단이 된 포티우스 이교 사던 당시의 교황 성 니콜라오 1세(왼쪽)와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한 당시의 교황 하드리아노 2세.

 

 

배경

 

여덟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부인하고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한 이른바 '포티우스 이교(離敎)' 사건을 다루고자 소집된 공의회였습니다.

 

9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이냐티우스(Ignatius, 799~877)라는 뛰어난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가 된 미카엘 1세(재위 811~813)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카엘 1세를 내쫓고 황제 자리를 차지한 레오 5세(재위 813~820)는 이냐티우스를 거세시키고 수도원에 가뒀습니다. 이냐티우스가 미카엘 1세의 후계자로 황제직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내린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이냐티우스는 자진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수도원장이 되고 나중에는 주교까지 됩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비잔틴 황제 테오필루스(재위 829~842)에 이어 그 아들 미카엘 3세(재위 842~867)가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겨우 3살인 어린 아들을 위해 황후 테오도라가 섭정을 펼칩니다. 때마침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이냐티우스 주교는 테오도라 황후의 호의에 힘입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되지요. 847년이었습니다.

 

미카엘 3세 황제는 성장하면서 천하의 난봉꾼이 됩니다.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의 간섭이 심해지자 그는 외삼촌 바르다스와 결탁해 어머니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해달라고 이냐티우스 총대주교에게 요청합니다만 단호하게 거절당합니다. 아들과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자 테오도라 황후는 자진해서 물러나지요. 그 자리는 황후의 동생 바르다스가 차지합니다. 바르다스는 아내와 이혼하고 며느리와 동거할 정도로 조카 황제 미카엘 3세 뺨치는 인물이었고, 또 그로 인해 이냐티우스 총대주교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황제와 그 외삼촌 바르다스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냐티우스 총대주교는 결국 총대주교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황제의 제1서기였던 포티우스(815?~897)가 차지합니다. 857년 성탄 때였습니다 포티우스는 신학ㆍ문학ㆍ의학ㆍ철학ㆍ수사학ㆍ법학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적 인물이었지만 평신도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포티우스는 독서직을 시작으로 총대주교직에 필요한 성품을 불과 6일 만에 다 받고 총대주교좌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에게 성품을 준 주교는 파문당한 주교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측근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앉힌 황제는 교황의 환심을 사고자 포티우스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교황은 성 니콜라오 1세(재위 858~867)였습니다. 그는 황제들의 간섭에서부터 교회의 독자성을 확립하고 문란한 교회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으며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쏟은 중세기의 뛰어난 교황이었습니다.

 

니콜라오 1세는 사절들을 파견해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합니다. 그렇지만 사절들은 황실을 등에 업은 포티우스의 뛰어난 언변과 지략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래서 8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사절들이 주재한 교회회의에서는 이냐티우스 해임과 포티우스의 총대주교 취임을 승인합니다.

 

하지만 이냐티우스 총대주교 측으로부터도 보고를 전해들은 교황은 이 회의를 승인하지 않고 오히려 863년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포티우스를 파문하고 이냐티우스의 복직을 결정합니다. 아울러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좌들에게서 서한을 보내 포티우스를 승인하지 말 것을 요청하지요. 교황의 이런 조치에 포티우스가 반발하리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 시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불가리아 왕 보리스가 비잔틴 황제를 대부로 삼아 신자가 됐는데 이를 계기로 동방 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불가리아로 파견돼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보리스 왕은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해 교회 교리와 규율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니콜라오 1세 교황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냈는데 이를 동방 교회의 관할권에 대한 로마의 침해라고 여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발끈한 것입니다.

 

이윽고 포티우스는 동방 주교들에게 칙서를 보내 로마를 대표로 하는 서방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교황과 서방 주교들을 뭉뚱그려 단죄합니다. 포티우스는 특히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없는 '성자에게서'를 신경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는 빠른 시일 안에 교회회의를 소집해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교회들이 공동선언을 발표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따라 마침내 867년 여름에 많은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회의가 열리고 참석 주교들은 서방 교회의 교리와 규율들에 문제가 있다고 공격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로마와 서방 교회가 △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으며 △ 사제들에게 견진성사 집전권을 허락하지 않으며 △ 신경에 '(~와) 성자에게서'(필리오케, filioque)라는 문구를 멋대로 집어넣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필리오케'에 관한 부분입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확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고만 돼 있었습니다. 이 신경을 풀어 쓴 또 다른 신경 중 하나인 '아타나시오 신경'에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와) 성자에게서'가 첨부돼 있었습니다. 이 신경이 널리 소개되면서 589년 스페인 톨레도에서 개최된 2차 톨레도 지역 공의회에서는 이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공식적으로 첨가하고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이를 널리 사용해 왔습니다. 포티우스는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포티우스가 주도한 교회회의는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면서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포티우스 이교(離敎) 사건, 곧 포티우스가 보편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서방 교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 측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그해 가을 포티우스가 쫓겨나고 이냐티우스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습니다. 포티우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가 살해되고 마케도니아 출신인 바실리우스 1세(재위 867~886)가 황제에 오르면서 그리된 것입니다. 그해 11월에는 교황 니콜라오 1세도 선종하고 하드리아노 2세(재위 867~872)가 후임 교황에 선출됩니다.

 

새롭게 마케도니아 왕조를 연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교황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또 복직된 이냐티우스 총대주교도 포티우스가 저지른 일들을 다시 처리하기 위해서는 교회회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교황에게 공의회를 요청합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사절들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단서를 붙입니다. 뒤늦게 포티우스 사건을 알게 된 로마는 869년 6월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포티우스가 주도한 867년 교회회의를 단죄하고, 회의 결의안들을 불태우고 포티우스를 단죄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될 교회회의가 로마 교회회의의 결정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황이 제시한 조건이었습니다.

 

마침내 869년 10월 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회의가 열립니다. 나중에 8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될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였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5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8)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870) (하)


공의회 전통과 교황 수위권 재확인

 

 

공의회 개최와 과정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소피아 성당에서 교황 사절단 주재로 개최됩니다. 교황사절단은 오스티아 주교 도나투스를 포함한 주교 3명과 마리누스 부제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회의는 모두 10차에 걸쳐 열렸습니다. 참석자들은 대단히 적었습니다. 첫 회의 때는 10여 명에 불과했고, 5차 회의 때까지 참석 주교가 21명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11월 8일 열린 8차 회의에는 38명으로, 이듬해 2월 12일 열린 9차 회의 때는 65명으로 조금씩 늘었습니다. 870년 2월 28일 열린 열 번째이자 마지막 회의 때에 참석한 주교는 103명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규모로만 본다면 이전 공의회들에 비해 훨씬 적었습니다.

 

이렇게 규모는 적었지만 참석자 면면을 보면 의미가 없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들이 저마다 대표들을 보냈을 뿐 아니라 전체 40개 관구 가운데서 관구장 주교 37명이 참석한 것입니다.

 

공의회 목적이 포티우스를 단죄하는 데에 있었기에 포티우스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미 첫 회의 때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문서가 작성됐고 참석 주교들은 모두 서명해야 했습니다. 공의회 초반의 주요 논의사항은 포티우스가 서품한 주교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포티우스에 대한 단죄에 동의하는 주교들은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

 

포티우스는 제5차 회의(10월 20일) 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만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6차 회의 때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대신해서 변호했습니다. 그리고 7차 회의(10월 29일) 때 자신을 서품한 게오르기우스 주교와 함께 나타난 포티우스는 옛 교회법 규정에 따라 인사 문제는 교황이 아니라 황제에게 문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 회의에서 포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단죄됩니다. 포티우스는 보스포루스 섬에 유배되지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열린 제8차 회의에서 포티우스의 교황 반대 관련 저술들과 그가 867년 소집한 교회회의 회의록이 모두 불태워집니다.

 

이후 공의회는 3개월 가량 소강 상태를 보이다가 870년 2월 두 차례 회의를 더 한 후 폐회합니다. 2월 28일 열린 마지막 제10차 회의에서는 교회 생활과 규율에 관한 27개 조항의 법령이 발표됩니다.

 

교회 조직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이 법 조항들에 따르면, 주교들은 관구장 주교에게, 관구장 주교들은 총대주교에게 종속됩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5대 총대주교좌의 순서를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마의 수위권이 천명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둘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 뒤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서로 서열이 정해지지요. 공의회는 또 주교 임명에 세속 권력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성화상 공경의 합법성을 재확인했습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에서 성화상 공경의 합법성을 인정한 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동방 교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의 책동이 사그라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공희회 폐회식에서는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1세와 교황사절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냐티우스, 37명의 관구장 주교와 65명의 주교가 모두 서명을 했고, 공의회 결정들이 국가법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됐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대한 로마 사도좌의 수위권이 아주 장엄하게 선포됐습니다. 폐회식에는 불가리아 왕의 사절들도 참석했습니다.

 

 

공의회 결과와 그 이후

 

로마 사도좌의 수위권을 부인하고 나아가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한 포티우스 이교 사건(867년 교회회의)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포티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재확인했습니다. 공의회는 이전 7차례 세계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재천명하는 신앙고백문을 발표함으로써 세계 공의회의 전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의회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던 교황 사절들이 해적들에게 습격을 받아 붙잡힌 것입니다. 해적들은 한참 후에 교황사절들을 풀어주었습니다만 공의회 문서들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해적들의 이같은 소행은 공의회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비잔틴 황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다행히 교황사절 일행인 아나스타시우스라는 도서관원이 그리스어로 된 공의회 문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사본을 별도로 만들어 뒀고, 그 사본을 가지고 다른 배로 로마에 돌아감으로써 공의회 문서가 사라질 뻔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교황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냐티우스에게 불가리아 선교에 관여하지 말라는 교황 서한을 전달했는데 이냐티우스는 이를 묵살해 버리고는 불가리아를 맡아달라는 불가리아왕 보리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불가리아를 책임질 주교 10명을 축성해 불가리아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관할로 삼아버렸습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871년 11월 10일 비잔틴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의회 결정 사항들을 승인하면서 동시에 불가리아에 대한 이냐티우스 총대주교의 조치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대표되는 동ㆍ서방 교회간 대립이 해소되고 로마 사도좌의 수위권이 재확립되는 듯했지만, 불가리아 문제로 다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삐걱거린 것입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872년 선종하고 요한 8세(재위 872~882)가 후임 교황이 됩니다. 요한 8세는 불가리아 문제에 더욱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이냐티우스 총대주교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관할권을 로마에 돌려주지 않으면 파직시키겠다고 경고합니다. 교황이 이렇게 단호한 입장을 보인 것은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긴밀하게 결부될 경우 또 다른 이교(離敎)의 위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냐티우스 총대주교는 877년 선종하고, 쫓겨났던 포티우스가 다시 총대주교좌에 오릅니다. 모두 포티우스가 총대주교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에 교황 요한 8세는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포티우스 역시 교황을 파문한 자신의 잘못을 용서 청하고 참회해야 했습니다.

 

포티우스 총대주교는 그러나 879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소피아 성당에서 교황 사절 3명을 비롯해 380여명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다시 공의회를 열어 자신을 단죄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면서 교황에게 승인을 요청합니다. 교황 요한 8세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고 다시 포티우스를 파문하지요. 하지만 동방 교회에서는 포티우스가 주도한 879년의 이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여기면서 869년 공의회를 비난합니다.

 

어쨌거나 포티우스가 주도한 879년 공의회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다시 분열하게 되지요. 포티우스는 886년 바실리우스 1세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레오 6세가 비잔틴 황제가 되면서 다시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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