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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13-14: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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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5-19 ㅣ No.436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년) (상)


단의설 퍼지면서 끊임없는 갈등만이

 

 

단의설로 시끄러웠던 7세기 초중반 교황들. 왼쪽부터 호노리오 1세(재위 625~638)ㆍ세베리노(640)ㆍ요한 4세(640~642)ㆍ테오도로 1세(재위 642~649) 교황.

 

 

배경


단의설의 득세와 교황 호노리오 1세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한 위격(인격) 안의 두 본성' 교리를 통해 단성설을 배격한 이후 단성설이 득세하던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는 단성설파의 독자적 세력이 형성됩니다. 이 단성설파를 끌어들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527~565)는 543년 단성설과 반대 경향인 친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과 그 저작들인 '삼장서'(三章書)를 단죄했지요. 이로 인해 불거진 문제를 다루고자 소집된 공의회가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섯 번째 세계공의회인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세기쯤 지나서 단성설파와 화합을 모색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단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활동 원리만 있다는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 또는 단활설(單活說, monoenergism)이라는 이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설은 사실 단성설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신성이 인성을 흡수해 버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만 남아 있다는 것이 단성설인데,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적용해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하면서 신적 의지 하나만 남아 있다는 주장이 단의설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의설 또는 단활설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6세기 초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지낸 세베루스(재임 512~538)였습니다. 그러나 단의설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거의 1세기가 지나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다 존재함을 인정하면서도 의지와 관련해서는 신적 의지 하나뿐이라는 단의설을 주장한 세르기우스는 당시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재위 610~641)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한때 페르시아에 빼앗겼던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을 재탈환하면서 이 지역 주류 세력인 단성설파를 끌여들여 제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이자 단성설과 비슷한 단의설 주창자인 세르기우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키루스라는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가 단성설파와 화합하는 것에 대해 칼케돈 공의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고 반발하다가 세르기우스가 제시하는 단의설 교리에 넘어갑니다.

 

마침내 황제와 세르기우스의 도움으로 631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된 키루스는 633년 이집트 전지역에서 단성설파와 일치를 선언하는 일치령을 발표합니다. 단성설파가 반대하는 것은 네스토리우스파였지 자기들과 비슷한 단의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아니었기에 일치 선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일치령이 발표되자 단의설 주창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적극 환영합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행동만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교리 설명서까지 발표합니다.

 

그런데 강력한 반대자가 등장합니다. 수도승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된 소프로니우스였습니다. 그는 세르기우스의 단의설이 '두 본성 안의 한 위격' 교리를 확정한 칼케돈 공의회 가르침과 위배된다며 세르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목자의 탈을 쓴 늑대라고 강력히 규탄합니다.

 

뜻밖의 적수를 만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교황 호노리오 1세(재위 625~638)에게 그럴듯한 말로 상황을 무마하면서 논쟁으로 평화를 깨지 말고 전통 가르침을 지키기로 했다는 요지의 편지를 써 보내고는 교황의 의견을 구합니다.

 

첨예한 신학적 논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호노리오 1세 교황은 세르기우스에게 보내는 개인 서한에서 이 논쟁이 말놀이에서 비롯했다면서 불화를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을 삼가할 것을 당부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교황은 서한에서 '그리스도에게는 하나의 의지만 있다'고 밝힘으로써 단의설을 수용한 것입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선언한 '한 위격 두 본성' 교리에 따르자면, 의지와 관련해서도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온전히 다 있어야 하는 것이 정론인데, 교황 자신이 이와 다른 주장을 하고 만 것입니다.

 

어쨌거나 교황 편지에서 힘을 얻은 세르기우스는 단의설을 더 내세우며 단성설파와 타협을 시도하고 황제는 세르기우스의 도움으로 638년 '신앙고백(Echtesis)'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의지만이 있다'는 단일설을 제국의 법으로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반발했어야 할 소프로니우스는 단일설이 발표되기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교황 호노리오 1세도 그해 10월 12일에 선종하지요. 주동자인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는 교회회의를 통해 이 칙령을 승인하고는 역시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단의설에 대한 서방 교회의 반발

 

황제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방 교회에서는 주교들이 대부분 이 새로운 신앙고백에 서명합니다. 하지만 로마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호노리오 1세가 선종한 후 후임 교황이 된 세베리노는 그리스도 안에는 두 본성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두 의지와 두 활동(원리)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황제가 발표한 신앙고백 칙령을 단죄해 버립니다. 그러나 세베리노 교황은 교황직에 오른 지 불과 4개월 만인 640년 12월에 선종합니다.

 

세베리노 교황 후임인 요한 4세(재위 640~642) 교황은 교회회의를 열어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의지만 있다는 신앙고백 칙령을 이단으로 단죄합니다. 그리고는 그 결정을 황제에게 보내지요.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신앙고백' 칙령의 저자가 아니라면서 그러나 자신이 그 칙령에 서명했고, 그 칙령이 많은 문제를 야기했음을 인정합니다. 그게 황제로서 한 마지막 행위였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41년 사망합니다.

 

요한 4세 후임으로 교황이 된 테오도로 1세(재위 642~649) 역시 단의설을 단죄하면서 단의설을 지지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도 단죄합니다. 이렇게 교황들이 계속해서 단의설을 단죄하고 나서자 641년 동로마 황제에 오른 콘스탄스 2세는 648년 10년 전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발표한 '신앙고백' 칙령을 폐지하고, 앞으로는 교황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신학적 문제, 특히 그리스도의 본성과 의지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쟁론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령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칙령은 오히려 혼란을 더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8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4)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680~681년) (하)


갈등의 마침표, 정통교리 수호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집 당시 교황이었던 성 아가토(재위 678~681, 왼쪽) 교황과 공의회 결과를 추인한 성 레오 2세(재위 682~683) 교황.

 

 

성 마르티노 1세 교황과 고백자 성 막시모

 

이런 상황에서 서방 교회에 새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테오도로 1세 후임인 교황 마르티노 1세(재위 649~655)였습니다. 마르티노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두 가지 중대한 조치를 취합니다.

 

첫째는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바로 교황좌에 착좌한 것입니다. 비잔틴(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 때부터 로마 주교는 황제 승인을 받아야만 교황으로 축성될 수 있었는데 마르티노 1세는 이 관행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황궁인 로마 라테라노에서 로마 공의회를 열어 단의설 주창자들과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638년에 선포한 '신앙고백' 칙령을 단죄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단의설을 주장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루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물론 세르기우스의 후임 총대주교들인 페트루스와 피루스까지 단죄받았습니다.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큰 역할을 한 신학자가 고백자 성 막시모(580~662)였습니다. 한때 헤라클리우스 황제 비서를 지냈던 그는 수도자로 살면서 단의설을 배격하고 칼케돈 공의회 가르침에 따른 정통 교리를 수호했습니다. 마르티노 1세 교황은 그를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시켜 단의설의 이설을 배격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르티노 1세와 막시모 성인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후임인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서 미움을 받습니다. 대역죄인으로 몰린 두 사람은 6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돼 재판을 받습니다. 교황은 흑해 크림반도로 유배돼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지요. 동ㆍ서방 교회는 공히 그를 순교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막시모 성인 역시 재판에 회부돼 발칸반도 남동부 트라키아로 유배됩니다. 나중에는 혀와 오른손마저 절단 당한 채 흑해 연안으로 다시 추방돼 지내다가 662년에 생을 마칩니다.

 

 

공의회 소집과 과정

 

단의설을 둘러싼 교리 싸움은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재위 668~685) 때 새로운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쯤에 와서는 제국 영토였던 이집트와 시리아가 다시 아랍인들 손에 넘어가 버린 상태였습니다. 단의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성설파와 손을 잡기 위해서였는데 아랍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해 버렸으니 의미가 없어진 셈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4세는 678년 로마 교황 성 아가토(재위 678~681)에게 서한을 보내 동ㆍ서방 상호 이해를 위한 공의회 개최를 제안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교황은 먼저 680년에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어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의지가 있다는 교리를 확인하고 그 결정사항을 특사 편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냅니다.

 

마침내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680년 11월 7일 황제궁 둥근 천장이 있는 대회의실에서 개막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는 전체적으로는 174명이었지만 개막 첫 회의에는 50명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황 특사로는 주교 3명과 사제 2명, 부제 1명 등이 참석했습니다.

 

공의회는 681년 9월 16일까지 꽤 오랜 기간 열렸고, 모두 18차 회의가 진행됐습니다. 황제가 직접 참석한 회의는 마지막 회의까지 합하면 모두 12차례나 됐습니다. 아가토 교황이 쓴 긴 교리 서한과 680년 로마 시노드에서 결정한 사항들이 회의 전반부에 낭독됐습니다. 18차에 이르는 회의의 많은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가 하나인지 둘인지, 활동(원리)이 하나인지 둘인지에 대해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검토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단의설을 주장하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마카리우스를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은 준비한 성명을 읽고 자신들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이어 마카리우스에 대한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을 잘못 적용하고 멋대로 인용했다는 비판을 받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마카리우스는 총대주교직을 박탈당합니다.

 

교부들은 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리기우스가 교황 호노리오 1세에게 보낸 편지 등을 검토한 후 세리기우스를 비롯해 그 후임 총대주교들인 피루스, 파울루스, 페트루스 등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지낸 키루스 등 단의설 추종자들을 모두 단죄합니다.

 

여기까지는 교황 아가토가 제시한 공의회 방향과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교부들은 또 아가토 교황이 언급하지 않은 선임 교황 호노리오 1세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그를 단의설 추종자들과 함께 단죄합니다. 교황 특사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681년 9월 11일에 열린 제17차 회의에서 교부들은 공의회의 신앙고백문(신조)를 작성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본성적 의지와 두 개의 본성적 활동(양식)이 나뉘지도 바뀌지도 갈리지도 섞이지도 않으며, 사악한 이단자들의 말과 달리 이 두 본성적 의지들이 반대되지도 않는다고 선언한다."

 

681년 9월 16일 이 신조가 표결을 통과했고, 참석 주교 174명이 서명을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도 승인합니다. 이로써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끝났습니다.

 

 

공의회 결과와 평가

 

그 사이에 아가토 교황은 선종하고 후임 교황직에는 레오 2세(재위 682~683)가 즉위합니다. 레오 2세는 683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결정을 추인합니다. 이로써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여섯 번째 세계공의회로서 단의설뿐 아니라 호노리오 1세 교황까지도 단죄한 공의회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레오 2세 교황은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만 있다'며 단의설의 이설을 수용한 호노리오 1세 교황에 대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르침을 충실히 제시해야 할 교황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합니다.

 

호노리오 1세 교황의 단죄는 이후 교황 무류성과 관련해서 자주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교황 무류성이란 교황이 공식으로 선언한 가르침은 오류가 없다는 가르침인데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앙교리로 선포됩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논의했을 때 호노리오 1세 교황의 단죄가 쟁점이 됐습니다.

 

하지만 호노리오 1세가 그리스도에게 신적 의지밖에 없다고 밝힌 것은 사도좌에서 엄숙하게 선언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에게 보낸 개인 서한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이를 교황 무류성이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호노리오 1세는 교황으로서 경솔했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1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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