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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성지 순례기 (하) 운젠 지고쿠, 오무라 호코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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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29 ㅣ No.752

일본 나가사키 성지 순례기 (하) 운젠 지고쿠, 오무라 호코바루


뜨거운 온천물에 시든 붉은 철쭉 '성스러운 불꽃'으로 타올라

 

 

- 운젠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교비. '성스러운 불이 타오르다'는 글귀가 순례자들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운젠 지고쿠(蕓仙地獄)

 

"주님, 주님의 손에서 저를 떼어놓지 마소서!"

 

운젠 지고쿠에서 순교한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內堀 作右衛門,?~1627)의 간절한 기도다.

 

일본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경관이 수려하고 많은 온천을 자랑하는 운젠(蕓仙). 이 아름다운 지대가 약 380년 전 일본 키리시탄에겐 천국을 가기 위해 꼭 거쳐야만 했던 지옥이었다.

 

에도(현 도쿄)막부 가톨릭교회 박해시절, 시마바라(島原) 영주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는 키리시탄을 굴복시킬 잔혹한 형벌을 고안해냈다. 바로 운젠의 뜨거운 유황물이 이글거리는 화산구에 신자들을 집어넣어 배교를 강요하는 '지고쿠 세메'(地獄責)이었다. 이때부터 나가사키와 시마바라에서 잡힌 키리시탄은 누구도 이 지고쿠 세메를 피해갈 수 없었다.

 

박해자들은 신자들을 발가벗겨 칼로 수십군데 베고 찌른 뒤 뜨거운 바위 위에 눕힌 뒤 열탕 물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그런가 하면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밧줄에 매달아 열탕에 넣었다 건졌다를 반복했다. 피부가 벗겨지고 뼛속까지 화상을 입었다. 이같은 모진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탕에 넣어 쪄 죽였다. 운젠 지고쿠 세메는 1627년부터 1632년까지 5년간 지속됐다.

 

유명 온천지로 변한 운젠은 380여 년 전 일본 키리시탄의 순교지였다. 순교자들에게 '지고쿠 세메'라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30여 개의 열탕이 지금도 유황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가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이다. 사제를 돕다 체포된 그는 시마바라에서 어린 세 아들 발다사르와 안토니오, 이냐시오의 순교를 목격했다. 그 역시 손가락이 잘리고 인두로 이마에 '切支丹'(그리스도인의 일본표기 - 키리시탄으로 발음) 이란 낙인이 찍힌 채 운젠으로 끌려와 순교했다. 운젠 순교자 가운데 지난해 시복된 26위와 1867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복자품에 오른 6위 등 총 32위의 순교 복자가 탄생했다.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조선인 이사벨라도 운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널리 공경받고 있다. 1629년 8월 3일 운젠으로 끌려온 그는 600여 명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3일간의 지고쿠 세메를 이겨냈다. 고문하다 지쳐버린 형리들이 참다못해 "우리는 10년, 20년이고 계속할 것"이라고 하자 이사벨라는 "10년, 20년은 잠깐 사이, 100년이라도 나는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이 고통을 참고 그 시간을 행복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형리들은 그의 손을 잡고 강제로 '배교 서약서'에 서명하게 하고 내쫓았다.

 

호코바루 순교지에서 순교한 조선인 순교 복자 13위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교비. 이 비는 1997년 10월 재일한국인 조건치씨와 오무라순교자현양회가 건립했다.

 

 

운젠 30개 열탕 가운데 산 중턱에 있는 '오이토 지고쿠'에는 나가사키대교구에서 1961년에 세운 십자가 순교비와 이전 1939년에 설치한 비석이 있다. 십자가 순교비에는 안토니오 이시타 신부와 미카엘 나카시마 수사 등 순교 복자 6위 이름이 새겨 있다. 비석에는 시인 이쿠타 쵸스케가 순교의 피를 운젠의 붉은 철쭉에 비유해 지은 시 가운데 '성스러운 불이 타오르다'라는 싯구가 새겨 있다.

 

온천 관광지로 변해버린 오늘날의 운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순교비를 무심하게 지나치지만 그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장엄한 신앙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살과 뼈가 익는 고통을 이겨낸 순교자들의 신앙과 용덕, 그 믿음을 닮으려 침묵하고 기도하는 순례자들. 교회는 매일 매순간 부활의 신비를 살고 있다.

 

호코바루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머리만 묻혀있는 쿠비즈카(首塚) 터에 홀로 서 있는 순교자상.

 

 

오무라 호코바루(大村 放虎愿)

 

아름다운 해안 도시 오무라(大村)는 16세기 후반 일본과 포르투갈의 무역기지로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였다. 오무라 가문 18대 영주 스미타다(純忠)는 1563년 세례를 받고 전국 다이묘(大名)가운데 최초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영내 키리시탄이 6만 명이 넘을 정도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스미요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키쿠레 키리시탄을 색출하지 않는다는 힐책을 듣고 1617년부터 박해를 시작, 체포된 키리시탄을 호코바루에서 처형했다. 1658년에는 동굴에서 기도하던 카쿠레 키리시탄 608명을 체포해 411명을 처형했다. 411명을 한 곳에서 처형할 수 없어 5곳에 나눠 같은 날 처형했는데 131명이 호코바루에서 순교했다.

 

가톨릭의 부활 신앙을 알고 있었던 오무라 영주는 순교자들의 부활을 겁내 131명의 참수한 머리와 몸을 500m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다. 순교자들 머리만 묻혀있는 쿠비즈카(首塚)와 몸이 묻혀있는 도즈카(胴塚)에는 이들을 기억하는 순교자상이 홀로 서 있다. 호코바루 순교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조선인 순교복자 13위 현양비가 순교자들의 믿음을 증언하고 있다.

 

[평화신문, 2009년 11월 2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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