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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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성지 순례기 (중)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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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24 ㅣ No.745

일본 나가사키 성지 순례기 (중) 나가사키


800km 죽음의 행렬과 수백년 박해에도 살아난 신앙

 

 

일본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천주당.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카쿠레 키리시탄 25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역사적 현장이다.

 

 

일본 26위 성인 순교지 니시자카(西坂)

 

"내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내가 이 이유로 죽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나는 나의 박해자들을 용서합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청하며 나의 피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비처럼 나의 동포에게 내리기를 바랍니다."

 

일본인 예수회원 첫 순교자 성 바오로 미키(三木,1564~1597) 신부가 십자가에 달린 채 군중들에게 한 마지막 설교이다. 1597년 2월 5일 아침,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언덕에 세워진 26개의 십자가에 바오로 미키 신부를 비롯한 일본인 키리시탄(切支丹·크리스천) 20명과 외국인 선교사 6명이 달려 있었다. 10대 소년들부터 60대 노인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이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금교령에 의해 1596년 12월 교토(京都)와 오사카(大阪),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체포돼 귀가 잘리고 돌팔매질을 당한 뒤 교토에서부터 나가사키까지 800km의 길을 걸어와 이 언덕에서 4000명이 넘는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형(십자가에 매달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했다. 이들 26위 순교자들은 교황 울바노 8세에 의해 1627년과 1629년 시복됐고, 1862년 6월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일본 26위 성인 순교지인 니시자카 언덕에는 이들의 시성 100주년을 기념해 1962년 '성 필립보 성당'과 '26위 성인 기념관','순교비'를 세워 니시자카 공원을 조성했다. 26위 성인 기념관에는1546년 포르투갈 왕에게 보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친필 서간과 17세기 작품 '눈의 산타 마리아', 카쿠레 키리시탄이 기도할 때 예수상으로 쓰던 7세기경 한반도에서 건너간 미륵보살상이 전시돼 있다.

 

성 필립보 성당. 니키자카 순교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성당은 가우디 풍의 설계로 건축되어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성 필립보 성당은 26위 성인 가운데 멕시코 출신 프란치스코회 예수의 필립보 수사를 현양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기부를 받아 지었다. 스페인의 대표적 건축가 가우디의 영향을 받은 이마이 겐지씨가 설계한 이 성당은 26위 성인들이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걸어온 길에 있는 모든 도자기 가마에서 가져온 도자기로 장식해 놓은 것이 이채롭다. 또 멕시코에서 보내온 대리석으로 제단을 만들었고, 예수의 필립보 성인을 비롯한 4명의 성해가 안치돼 있다.

 

최초 26위 순교자가 처형됐고 이후 기록상으로도 600명 이상의 키리시탄이 순교한 이곳을 1981년 순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니시자카는 더 없는 행복의 언덕"이라고 명명하고 축복했다.

 

 

오우라 천주당

 

1865년 2월 19일. 아직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그리스도교를 외국인에게만 허가하던 시기,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인 미나미야마테에 아름다운 고딕식 성당이 완공돼 봉헌식을 거행했다. 바로 일본 26위 순교 성인에게 봉헌된 오우라 천주당이다.

 

성당 봉헌식이 있은 지 채 한 달도 안된 1865년 3월 17일, 오우라 천주당에선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산타 마리아상은 어디에?"

 

이사벨라 유리 가족을 비롯한 우라카미(浦上) 농민들 15여 명이 몰래 성당을 찾아와 베르나르도 프티쟝(B.Petitj ean,1829~1884) 신부에게 귓속말로 고백한 말이다. 이 말은 들은 프티쟝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250여 년간 이어진 박해로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았던 카쿠레 키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이 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프티쟝 신부는 제대 오른편 성모자상 앞으로 이들을 인도했다. 일본 키리시탄의 부활을 확인하는 감격적 순간이었다.

 

1865년 3월17일 오우라 천주당에서 프티쟝 신부와 열다섯여명의 카쿠레 키리시탄이 조우하는 장면을 삽화로 재현한 작품. 오우라 천주당 전시실에 소장돼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 등록을 앞두고 있는 오우라 천주당은 한국 천주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1883년 7월 8일 프티쟝 주교 주례로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이곳에서 거행됐고,1882년부터 1884년까지 조선인 신학생 21명이 이곳을 거쳐 페낭 신학교로 갔다.

 

또 1882년 3월 블랑 신부가 홍산 서들골에 묻혀 있던 갈매못 순교자 다블뤼 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황석두(루카)의 유해를 발굴, 유해 손실을 우려해 1882년 11월부터 1894년 5월까지 12년간을 오우라 성당에 안치했다. 이들 갈매못 순교 성인의 유해들은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용산신학교을 거쳐 1900년부터 명동성당에, 이후 1967년부터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돼 있다.

 

일본 최고(最古)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인 오우라 성당은 1873년(메이지 6년) 그리스도교 금교령이 폐지된 이후 대규모 증개축을 해 1878년 현재의 오우라 성당을 완공했다. 1934년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성당은 벽돌로 지어졌지만 내외벽 전체를 석회로 발라 산뜻한 느낌을 준다. 고딕과 바로크 혼합 양식의 오우라 성당은 1975년 새 성당 신축 후 매년 성탄대축일 전야와 3월 17일(카쿠레 키리시탄을 발견한 날)에만 미사가 봉헌된다.

 

이밖에 나가사키에는 그 아름다움과 규모에서 '동양에서 제일'을 자랑했지만 원폭으로 폐허가 된 우라카미(浦上)성당과 평화공원, 십자가 산 등을 꼭 순례하길 추천한다.

 

 

일본 키리시탄 시대의 조선인 순교자들

 

프티쟝 신부가 25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키리시탄에게 보여주었던 성모자상. 지금도 오우라 천주당 제대 오른편에 있다.

 

 

약 5만명의 조선인들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정유왜란 기간 동안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 이국땅에서 포로와 노예생활을 하던 조선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일본 키리시탄 시대에 조선인 3000~5000명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인 키리시탄 중에는 코라이(高麗)라는 이름이 많다. 고려의 포르투갈 발음이다.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해지기 200년 전이다.

 

1614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금교령(禁敎令)을 선포한 이후 250년간 키리시탄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이어졌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카와 이에야스 등 일본 막부의 최고 권력자와 지역의 다이묘(大名·영주)들은 신자 색출을 위해 '후미에'(예수상과 마리아상을 밟고 지나가게 하는 일)를 행하고, 키리시탄을 붙잡아 화형, 참수형, 절단 고문, 학춤 고문, 열탕 고문 등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이 기간 약 5만 명이 순교했고 이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수는 대략 3500여 명이다.

 

기록을 통해 이름을 찾아낸 조선인 순교자는 50여 명에 이른다. 이국땅에서 최초로 순교한 조선인은 에도 키리시탄의 지도자 요아킴 하치칸이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소테로 신부의 숙박과 사목을 돕다가 1613년 체포돼 처형당했다. 1867년 시복된 205위 순교 복자 중 고스메 다케야와 아들 프란치스코, 코라이 안토니오와 가족(부인 마리아, 아들 요한과 베드로), 가이오 지에몬, 빈센트 카운, 가스바르 바스 등 10명이 조선인이다. 이밖에 막센시아, 마뉴엘, 코라이 미켈, 코라이 베드로, 코라이 안드레아, 도마 쿠사쿠, 하치로, 요한네, 레오 타케야 곤시치와 모친 마리아 등이 기도를 바치고 기쁘게 순교를 받아들인 조선인들로 기록돼 있다.

 

일본 교회에는 순교 성인 42위와 순교 복자 393위를 모시고 있다. 이들 가운데 조선인 순교 복자 10위가 있다.

 

[평화신문, 2009년 11월 2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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