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22-23: 빛을 담은 그릇 - 성모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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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11 ㅣ No.1076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22) 빛을 담은 그릇 - 성모 마리아


‘카잔의 성모’ 이콘, 러시아인들에게 공경과 사랑 받아

 

 

- (작품1) 카잔의 성모 복사본, 66 x 55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1. 어머니와의 인연

 

어머니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포근함·그리움·아쉬움·모자람·후회 등을 연상시킵니다. 애틋하고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로 이어져 있음을 느낍니다. 어머니와의 인연이란 불교의 겁(劫)1)을 떠올려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수천 겁의 교차점을 거쳐야만 부모와 자식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여인네의 옷자락만 스치려해도 몇 겁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가능하다는 개념은 도무지 인간의 상식으로는 헤아릴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살 만하고 효도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을 즈음, 어머니께선 중풍과 치매로 거의 15년 동안을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느 봄날, 나는 어머니께서 불그레한 초로(初老)의 깨끗한 얼굴에 쪽을 찌시고, 얇고도 연한 녹두색 저고리와 연분홍 치마를 입으신 청초한 모습으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서울로 가시는 꿈을 꾸고 무척 불안해했었습니다. 시집가는 꿈은 돌아가시는 꿈이라던데⋯.

 

그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식으로서 못다한 효도의 골짜기가 너무나 깊어 한스러웠다고나 할까요. 훗날 어머니와 인연이 끊어진 순간을 추억하면서, 손을 입가에 얹고 앞을 바라보며 슬퍼합니다. 병고(病苦)로 온갖 고생을 하시고, 저녁나절 잠드신 채로 아무도 모르게 떠나가신 어머니. 마치 저녁 노을 지는 바다 저멀리 반짝이는 홍옥빛 파도 위를 날아가는 외기러기처럼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옛날 분들이 그랬듯이 장남만을 챙기는 분이셨습니다. 중학생 시절, 나름대로 옳지 못하다는 생각에 자식 편애가 심한 어머니와 앙살을 부리며 자주 다투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형의 발가락 사이의 때만도 못한 놈, 속 좁은 놈이라고 야단치셨습니다. 동생들은 어리고 세 살 터울인 형과도 사이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참 외로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이라는 노랫말을 담은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노랫말처럼 내 어머니도 그곳 십자성에 계시고, 나를 반가이 맞아주실 것이라며 상상 속의 어머니를 그리워했습니다. 그 후 십수 년의 세월이 흘러 형님 내외는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몇 년 지나지않아 실패하고 말았지요. 부모님 재산을 사업 자금으로 모두 탕진한 후 다시 시골로 돌아왔습니다. 부모님과 형님 내외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겹치면서부터 어머니는 모든 형제자매를 골고루 사랑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고운 얼굴은 농사일로 찌들고, 여덟 식구의 생계 유지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무척이나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고생은 부모 된 자로서 오롯이 짊어져야 할 과정이었나 봅니다. 나도 두 아이의 부모로서 자식 키우는 어려움이 있어도 후회한 적 없이, 또 고통이라 생각지 않고 지나가는 과정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다만 나는 다행히도 애옥살이에 치인 어머니 시절보다 편한 시기를 거쳐왔습니다. 따라서 자식 키우는 것도, 먹고 입고 사는 것도 훨씬 수월했다는 사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

 

묶여있던 인연을 잘라내 동산에 오릅니다.

가시는 길, 생사를 가름 없이 두려움은 접어두고,

걱정과 시름일랑 잊으시라 공중에 띄워 보내오니

망각의 바다를 지나시며 이제는 자유롭게 되소서.

빛 고운 자주색 끝동, 잠자리 날개, 연두저고리

하얀 꽃신 위에 팔랑이는 금선 둘린 복사꽃 치마

나비같이 새색시 단장시켜 어머니를 보내오니,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하느님,

생전에 닦은 공덕은 천 배로 늘려 잡으시고

지나가 버린 죄과는 만 번을 깎아 셈하소서.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이 내게는 서러워도,

비오니, 주님 궁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소서.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한 자식들도 노령과 병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며 다시 되돌릴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불 지필 장작이 없어 종이쪼가리만 태우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그라지는 불씨를 바라보며, 더 태울 종이조차 없어 손을 놓아버리는 심정이었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그냥 육신의 껍질만 남기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촛불 같은 느낌이랄까!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다들 그러하셨더랬지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카잔의 성모님 (작품 1)

 

1579년, 러시아의 카잔이라는 도시 이야기입니다. 9살 소녀인 마트로나는 이미 허물어져 폐허가 된 집들 주변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마트로나에게 폐허더미 속에 묻힌 어느 이콘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사실에 순진하기만 한 마트로나는 몸을 돌려 부모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소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린아이의 장난쯤으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두 번째 발현하시자 소녀의 부모는 이웃집 몇 사람과 함께 소녀가 일러준 곳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땀 흘렸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트로나가 손으로 조금 더 파헤치자 낡은 천으로 싼 이콘이 나왔습니다. 분명 오래된 그림이었음에도 색깔은 아주 선명했고 알 수 없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은 도시 전체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대주교가 그 이콘을 들고 근처 니콜라우스 성당까지 화려한 행진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이콘 앞에서는 곧바로 치유의 기적까지 일어났습니다.

 

이후 그들은 카잔의 이콘이 1612년 폴란드 군대가 모스크바를 쳐들어왔을 때, 1790년 스웨덴의 칼 12세의 군대와 폴타바의 접전을 벌였을 때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패전도 러시아인들은 우리의 ‘사랑의 부인’ 카잔 이콘에 그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나폴레옹 군대와 싸워 이긴 후 성 페테르스부르크에 이 성스러운 이콘을 위한 고유의 바실리카를 세웠습니다. 그 성당 광장에선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종교적 유물과 예술품들은 강제로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그때 카잔의 성모 이콘은 폴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흘러갔다가 마침내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 이콘은 52년 동안 개인 소유로 이리저리 소장자가 바뀌었다가 1970년 푸른 군대에 의해 파티마의 비잔틴 교회에 모셔지고, 그 후 러시아에서 원래 모셨던 성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카잔의 이콘은 13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기서 가장 큰 가치는 러시아인들이 이 이콘에 보내는 경애(敬愛)입니다. 이 은총의 그림이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함께 공경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각주 1) 불교에서 일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시간 개념.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한 겁이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9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23) 빛을 담은 그릇 - 성모 마리아


고통받는 자식 걱정으로 슬픔 가득한 성모님

 

 

- (작품 4) 피에타: 템페라, 25 x 30cm, 죽전성당, 용인, 한국.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과 성모, 이콘의 구성으로 그린 십자가의 길 중 13처

 

 

2. 사람의 아들과 어머니

 

어머니는 자식에게 언제부터인지 알게 모르게 그의 심장 소리를 들려준 원천적인 분입니다. 성자께서도 그 소리를 듣고 겸손하게 사람의 아들로 오시어 사랑의 어머니를 선택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가장 절실하고,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숨기면서 어려울 때나 슬플 때, 또는 기쁠 때 꺼내보고 싶은 보석 같은 말일 것입니다.

 

이콘에서의 성모님은 애틋한 사랑을 드리운 모습, 그리고 자식 생각으로 근심에 잠긴 듯 우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이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는 천사가 인사하는 내용을 반복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성모송의 ‘복되다’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되다’와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온갖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다 받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계신 것을 복이라 일컫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이미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으니 이로써 최상의 위치에 오르게 되실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콘에서 성모님의 표정이 우울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시메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느님께 찬미하며 드디어 구원이 오시는 것을 보고 평화로이 떠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언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에게 벌어질 일들을 예언하며 그로 인해 당신께도 깊은 슬픔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작품 1)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실 때 그 심정은 얼마나 참담하셨을까! 예수님 자신은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인의 죽음을 어머니에게 보여야 하는 ‘사형수’였습니다. 악인들이 말합니다.

 

 

- (작품 1) 주님 봉헌: 칠보, 13x10cm, 12세기 말, 게오르그 예술박물관, 트빌리시, 구르지아.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와 요셉, 시메온과 한나가 등장한다.

 


- (작품 2) 유다의 입맞춤, 모자이크, 성 마르코 대성전, 베네치아, 이탈리아

 


- (작품 3) 십자가 처형 : 템페라, 47.5 x 36.5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그리스 크레타 작품의 모작, 작품의 등장인물은 성모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 요한 사도, 백부장. 예수님의 피는 아담(사람)의 해골로 떨어진다. 이는 파스카의 의미를 보여 준다. IC와 XC 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자이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 2,12; 17-20)(작품 2)

 

피를 흘린 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의 모습, 힘에 부쳐 넘어진 아들과 만나는 장면. 모든 장면에서 뚝뚝 끊어져 흐르는 영상과 소리 없는 아우성이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수많은 군중이 울고 웃는 소란 속에서 예수님은 홀로 견뎌야 할 고통과 고독에 잠겨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 저를 보는 자마다 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 댑니다. ‘주님께 맡겼으니 그분께서 그자를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그분께서 구해내시겠지’”(시편 22,7-8)라는 시편 내용을 보면 그 상황이 그려집니다. 사건 이후에도 모여서 수군거리는 사람들,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웃들, 생계 유지를 위한 어떠한 일거리도 내주지 않을 사람들로 성모님의 처지가 어려웠을 것으로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의 자비를 알리고, 의인 때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9,13 참조) 그분께서는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분이 흘리신 피는 사람의 해골로 떨어져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골고타(해골 터)이며 죄인들이 처형당한 곳입니다. 그 장소는 하느님께서 찾으신 터로 가장 적합한 상징을 보여줍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작품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이로써 성모님은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요한으로 옮겨져 요한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시는 상징성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조롱받고 심한 매질을 당한 뒤 급기야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상황이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단장(斷腸)’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입니다. 중국 진나라 환온(桓溫)이 촉으로 가다가 장강 중류 삼협(三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를 한 마리 잡아왔는데, 그 원숭이 어미가 울면서 강둑 언저리 백여 리를 뒤따라와 배 위로 뛰어오르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더랍니다. 가슴을 저미는 슬픔으로 ‘창자가 끊어져 버리다’라는 뜻을 지닌 단장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 ‘부모는 산에다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자식의 죽음이 가슴을 더욱 저미는 슬픔임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모든 것을 가슴에 새기는(루카 2,19 참조) 어머니의 마음에는 고통받는 자식 걱정으로 칼에 꿰찔리는 아픔이 가득할 것임을 보여줍니다.(작품 4)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16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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